[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일상생활에서 중도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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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14 년 10 월 [통권 제18호] / / 작성일20-05-29 14:36 / 조회5,917회 / 댓글0건본문
중도가 부처님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싯다르타가 중도를 깨달아 생로병사를 해탈한 부처가 되었고, 그것이 불교의 출발이자 모든 불교의 핵심임을 공부하였습니다. 결국 불교는 중도의 깨달음을 근본으로 합니다.
“중도가 부처님”이라는 성철 스님 법어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를 아주 쉽게 생활 언어로 말씀하셨는데, 여기에 불교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중도(中道)가 부처님이니 중도를 바로 알면 부처님을 봅니다. 중도는 중간, 또는 중용(中庸)이 아닙니다. 중도는 … 상대적 대립의 양쪽을 버리고, 그의 모순, 갈등이 상통하여 융합하는 절대의 경지입니다. … 대립이 영영 소멸된 이 세계에는 모두가 중도 아님이 없어서 부처님만으로 가득 차 있으니, 이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부처님 세계가 우주의 본모습입니다. … ”
성철 스님은 중도가 바로 부처님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중도를 알면 부처님을 보는 것입니다.
중도는 유교의 중용(中庸)과는 다릅니다. 흔히 중도와 중용이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은 중도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중용(中庸)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도리에 맞는 것이 ‘중(中)’, ‘용(庸)’이란 떳떳함〔平常〕을 뜻 하는 것”이라고 주자는 설명했습니다. 이 중용에는 ‘지나치거나 모자람’이라는 면과 ‘도리에 맞는 중(中)’이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중용에는 상대 분별의 세계에서 도리에 맞는 중(中)을 말하지만, 불교의 중도는 모든 상대 분별을 떠나되 다 아우르는 원융무애한 절대의 세계입니다. 그러니 불교의 중도와 유교의 중용은 이름은 비슷하나 차원이 다릅니다.
불교의 중도(中道)는 우주만물의 존재원리이자 본래 모습이며, 절대 세계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상대 분별도 없습니다. 이 중도세계는 모두가 절대적인 존재이고 부처님입니다. 그렇다면 선과 악, 나와 너, 남과 북은 상대적 세계가 아니고 무엇이냐? 그것은 허망한 착각 세계라는 겁니다. 대립하는 양변에 집착해서 어느 한 면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보입니다. 나와 너가 다르고,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 이렇게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양변에 집착해서 본래 모습을 보지 못한 착각세계라는 것입니다.
중도는 우주의 존재원리이고 본질입니다. 나와 우주 만물은 모두 중도로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나’라는 존재도 독립된 실체가 있다고 보면 착각입니다. 독립된 실체로서 ‘나’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내가 공기를 호흡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존재하려면 공기에 의지해야 합니다. 공기뿐만 아니라 음식과 물, 바람, 불 즉 지수화풍에 의존하지 않으면 ‘나’라는 인간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독립된 실체로서 ‘나’란 존재할 수 없기에 ‘있다’고 보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렇다고, 또 이 글을 읽고 보는 ‘나’는 또 없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나’는 있다-없다 양변을 떠나되 다 아울러 중도(中道)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이것을 통일해서 중도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나’나 ‘인간’만이 중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차나 집, 휴대폰 등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실체가 없이 서로 서로 의지해서 존재합니다. 그러니 우주만물은 모두 중도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중도로 존재하니 중도가 부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갈등, 중도가 대안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는 우리 일상생활에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 인간은 지금도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다고 합니다. 늘 싸웁니다. 국가뿐 아니라 집단과 집단도 갈등합니다.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남과 북, 동과 서, 남과 여, 빈부, 노와 사, 이와 같이 인간이 사는 어떤 사회건 대립과 갈등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인간의 대립과 갈등 문제를 해소해 나가야 할 종교가 또 대립과 갈등의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인류의 전쟁 중에서 상당수가 종교 갈등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도 중동지역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천년 이상 전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가 먼저 전쟁을 일으킨 역사는 찾기 어렵습니다. 다행이라 할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조계종단이 잊힐만 하면 갈등이 일어나 세상의 웃음꺼리가 되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 인간은 밖으로도 갈등하지만, 자기 안에서도 갈등합니다. 마음이 복잡하거나 고민이 많으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잠도 편히 자지 못합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실수도 자주하고 인간관계도 어려움이 생깁니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고 예민하고 화도 자주 냅니다.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면 만병의 근원이 됩니다.
우리 일상생활은 이와 같이 내 안과 밖으로 끊임없이 대립하고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내 안과 밖으로 대립 갈등하게 되면,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어떻게 하면 마음 편히 살 수 있을까요?
인간의 모든 갈등의 근본 원인은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집착 때문입니다. ‘나’는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마치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집착하기에 이기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내가 살아야 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고, 너는 틀렸다, 이런 생각을 일으키니 서로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요? 바로 중도(中道) 사상입니다.
중도를 바로 알면, 나와 네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진보와 보수, 노와 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보와 보수는 방편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사회제도는 사정에 따라 진보적인 방식과 보수적인 방식으로 서로 의논해서 개선해 나가면 됩니다.
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는 사용자 덕분에 고용이 되어 일하고 급여를 받아 생활하면서 가족 부양하고 아이들 교육시키고 문화생활도 좀 하고 저축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노동자에게 사용자는 은인과 같습니다. 사용자 역시 노동자들이 일해 주는 덕분에 제품을 고객에게 팔아서 그 수익으로 회사를 유지하고 운영하며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고 더 좋은 집, 더 나은 차로 생활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없이 회사도 유지할 수 없고, 그렇게 더 나은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65억 인구 중에 부부의 인연이 된 게 얼마나 소중합니까? 다소 의견 차이가 있고, 성격이 다른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을 서로 사랑하며 위해 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내가 옳다, 잘났다는 생각에 집착하게 되면 대립하고 갈등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네가 둘이 아니라는 중도를 바로 알아 일상생활에서 중도를 실천하면 대립과 갈등을 해소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노사, 남북, 빈부, 종교 등 모든 인류세계에 직면한 대립과 갈등을 해소할 사상적인 대안은 불교의 중도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 불자들은 그렇게 갈등합니까?”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저는 중도를 모르기 때문에 싸운다고 답해드립니다. 제가 가는 곳마다 중도를 말하고 다닙니다. 이 중도를 알아야 불교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이 중도를 모르면 불교를 모르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중도를 공부하는 이해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인간의 이해를 불교에서는 알음알이〔知解〕라 합니다. 이 이해는 깨어있을 때는 어느 정도 되지만, 잠 잘 때 꿈속에서나 깊은 잠이 들었을 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즉, 우리가 깨어 있을 때는 중도를 알아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면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화가 날 때나 불이익을 받았을 때 중도로 대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욕망이 일어나거나 집착이 완전히 없어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의식에서 분별망상을 완전히 비워야 합니다. 내가 있다는 착각, 내가 옳다는 착각을 완전히 비워야 우리 본래모습으로 돌아가 자유자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화두 참선을 해서 동정일여·몽정일여·숙면일여가 되어 분별망상이 완전히 비워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정진해야 합니다.
화두 참선(禪)은 중도를 깨달아 영원한 행복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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