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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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4 년 6 월 [통권 제14호] / / 작성일20-05-29 14:32 / 조회5,985회 / 댓글0건본문
한 달 이상을 ‘멘탈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의 상태로 지내던 중 강의 준비 차 『법화경』 「화성유품」을 읽게 되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여행 가이드가 심하게 멋있는지라 우리에게도 그런 지도자가 있었으면 하는 꿈을 잠시 꾸어 보았다.
비유에 나오는 가이드는 우선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산전수전 겪으면서 목적지까지 가 본 경험이 있기에 어디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멀고 험한 길에 사람들이 지쳐 있을 때 마술로 쉼터를 만들어 보여주고 쉬게 한다. 잠시 쉬면서 정신을 수습한 다음에, 이 쉼터는 가짜였다고 사람들에게 이실직고하며 갈 길이 더 남았음을 알린다. 다시 길을 떠나자고 설득하여 진짜 보물이 있는 곳을 향해 함께 나아간다는 이야기.
부처님께서 도 닦는 수행자를 위해 들어준 비유지만, 이 이야기는 세속에 맞춰보아도 손색없을 만치 잘 맞아떨어진다. 여행 가이드를 정치적 지도자로, 보물을 그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로 볼 수 있다. 지도자는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 일을 처리하는 능력, 다시 길을 나서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 소통 능력이 요구된다. 그중에서도 요즘 이 나라 지도자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자질은, 중생이 지쳐있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공감능력이 아닐까 싶다.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특히 선거가 끝날 때마다 이민 가고 싶다는 글이 많이 올라온다. 지난 대선 후에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어느 외국 거주자가 이민을 말리는 댓글을 써서 눈길을 끈 적이 있다.
백인 동네에 사는 그는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이유 없이 어디선가 날아온 커다란 플라스틱 우유병에 맞았다고 하면서 웬만하면 제 나라에서 사는 것이 낫다고 이민을 말렸다. 백인 동네에 사는 유색인종이라서 특별히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제 나라를 떠나면 여기서는 겪지 못할 또 다른 종류의 어려움이 있을 터이다. 그곳이 부르키나파소든, 파푸아뉴기니든 상관없이.
타향살이의 어려움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요즘 들어 부쩍이 나라를 뜨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다.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은 한 아버지의 인터뷰를 보았는데, 세금 내고 이 나라에서 살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이민을 가겠다고 한다. 눈물도 흘리지 않고 언성도 높이지 않고 담담히, 그저 단호하게 말하는 그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가 여기를 떠나서 사람대접 받으면서 잘 살았으면 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속담이 있다. 쿨하게 들린다. 이미 한 번 크게 떠난 출가자에게는 떠나는 것이 별 일 아닐 수 있다. 그렇게 떠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떠날 수도 없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이 나라에 살다가 맞아죽기 전에 도망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돌봐야할 사람들이 여기에 있으니까, 외국 가서 적응할 용기도 능력도 없으니까, 비행기 표 값 마련하기도 어려우니까. 마음이 붙들고 조건이 붙들어서 여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그저 맷집을 늘려가면서 버티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버틸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매를 맞는 틈틈이, 내가 뭘 잘못했기에 때리는 놈 따로 있고 맞는 놈 따로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절이 싫어도 떠나지 말고 수행하기 좋은 도량으로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각자에게 있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화성유품」의 훌륭한 지도자를 바라는 것이 헛된 소망인 줄 이미 여러 차례 겪어 왔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를 연발하던 경험 있는 지도자에게 속아도 보았다. 그럼에도 강력한 지도자를 바라는 마음이 선거 때마다 일어나는 것을 보면 사회의 고질병인 듯하다. 선가에서는 이미 많은 선사들이 이 병을 타파해 보여 준 사례가 있다.
임제 스님은 부처도 믿지 말고 조사도 믿지 말며, 석가도 필요 없고 조사도 필요 없다고 하였다. 오직 자신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살불살조’라고 알려진 이 가르침은 선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내린 것이지만 역시 세속의 현실에 적용할 만하다. 불조라는 찌꺼기가 마음에 남아 있으면 수행에 방해가 되듯이 강력한 지도자라는 우상이 남아 있으면 언제나 속고 살 수밖에 없음을 가르쳐 준다.
임제에 앞서 단하(丹霞, 739~824) 스님은 이런 도리를 몸으로 보여 주었다. 혜림사라는 절에 간 날, 주인은 없고 날씨는 추워서 법당에 있는 목불을 쪼개서 불을 때 쬐고 있었다. 출타했다가 돌아온 주지가 기겁을 하면서 “어떻게 나의 목불을 땔 수가 있소?”하자 단하 스님은 태연히 주장자로 재를 헤치며 “부처님의 사리를 찾고 있소.”라고 대답했다.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단 말이요?”라고 성을 내자 “기왕에 사리가 없다면 협시불도 갖다가 때야겠네.”라고 응수했다.
피곤함이 극에 다다른 중생에게 이 이야기는 1차 위안을 주고, 2차 가르침을 준다. 단하 스님의 도력을 배우면 좋겠지만 그러지는 못해도 최소한 그의 이성과 논리, 쫄지 않는 배짱, 유머감각은 배워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지금 사회에 필요하기도 하고.
마침 선거일이 다가왔다. 364일 잠들어 있어도 이날만큼은 정치적으로 주인공 노릇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잘 따져보고 하루 허락된 권세를 휘두를 참이다. 투표 결과가 맘에 들지 않아도 승복하고, 그 다음날부터 가만히 있을 것인지, 가만있지 않을 것인지 생각해 보려 한다. 선지식에게도 속지 않는 수행자의 자세를 배운다면 훌륭한 지도자를 바라던 미망을 타파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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