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별어]
등신불의 효시는 가섭 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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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4 년 6 월 [통권 제14호] / / 작성일20-05-29 14:30 / 조회9,464회 / 댓글0건본문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
소시적에 국어과목을 좋아했다. 언젠가 교과서 속에서 김동리(1913~1995)의 단편소설『등신불』을 만났다. 소신공양의 절차까지 묘사한 경이로운 내용으로 가득하다. 화식(火食, 익힌 음식)을 끊고 하루에 깨 한 접시를 먹으면서 몸을 만들어간다. 그 후 가늘고 깨끗한 명주를 발끝에서 어깨까지 전신에 감은 다음 들기름을 그 위에 붓기를 시간을 두고서 몇 번 반복한 다음, 적당한 시점에 불을 붙인다. 그 때 마침 비가 퍼붓는다. 하지만 다비하는 자리를 피해서 내렸고 머리 뒤로는 후광이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를 함께하던 사람들의 질병이 치료되는 기적을 보여준다. 3년 동안 많은 시주금이 쏟아졌다. 타다가 굳어진 몸에 금을 씌웠고 금불각을 만들어 모셨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였다. 미완성 소신공양이 급기야 등신불(等身佛)로 바뀐 것이었다.
대만 자항사의 진짜 등신불
학인시절에 대만을 방문했다. 자항사(慈航寺)에서 말로만 듣던 등신불을 진짜로 만난 것이다. 스님의 생전모습을 사진으로 나란히 걸어놓았다. 사진얼굴과 등신불 얼굴을 비교해가며 뚫어질 듯 몇 번이고 쳐다보았다. 자항(慈航, 1895~1954) 법사는 열반 3년 전부터 곡기를 끊고 야채와 소나무 껍질로 공양을 하셨다고 한다. “입적 후 시신을 화장하지 말고 항아리에 그대로 안치해 두었다가 3년 후에 열어보라.”는 유언을 남겼다.
3년 후에 개봉하니 가부좌 상태로 머리카락만 자란 채 생전모습 그대로였다. 그 육신에 금칠을 하여 등신불로 만들어 자항기념당에 모셨다. 더불어 스님을 보관했던 항아리도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얼마나 많은 참배객이 다녀갔는지 작년(2013)에 다시 갔을 때 도량의 규모는 20여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세를 자랑하고 있다. 대만을 불국토로 만드는데 적지 않는 역할을 하신 것이다.
지장성지 구화산의 육신보전
중국의 불교성지 중에서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성지는 안휘성 구화산의 지장성지이다. 주인공인 김교각(696~794) 스님이 신라출신인 까닭이다. 스님은 열반하면서 당신의 법구를 석함에 넣고 3년 후에도 썩지 않으면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그대로 따랐다. 육신보전〔肉身寶殿. 현판의 육(肉)자는 월(月: 육달 월)로 바꾸어 표기했다〕을 지었고, 그 안에 7층탑을 만든 후 다시 그 탑 속에 3층 목탑을 모셨고, 그 안에 스님의 등신불이 가부좌 자세로 앉아있다고 한다. 참배객에게 등신불을 간접방식으로 친견토록 해놓은 셈이다. 자항 스님과 교각 스님은 친히 당신의 법구(法軀)를 등신불로 만들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소박한 옻칠 등신불 육조혜능 선사
육조혜능(638~713) 선사의 등신불은 ‘선사답게’금칠이 아니라 옻칠을 했다. 그리고 개방하다시피 하여 언제나 누구든 직접 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배려했다. 표정도 살아 있고 얼굴모습도 별다른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소박하게 드러낸 모습이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이게 무슨 진신상(眞身像)이냐?”고 하면서 칼로 대사의 팔을 쳤다가 흰 뼈가 드러나자 숙연해하면서 물러섰다는 얘기도 구전되고 있다.

중국 남화선사에 모셔진 육조혜능 진신상
선사께서는 열반 3년 전에 고향집인 국은사(國恩寺)에 보은탑을 세우게 했다. 불조(佛祖)와 부모 그리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당신이 열반 후 들어가실 탑으로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40년을 살던 조계산을 떠나 고향으로 가서 입적했다. 하지만 돌아가신 후에 문제가 발생했다. 오래 머물렀던 소주(韶州) 백성과 고향 신주(新州) 주민이 서로 “우리 스님!”이라며 다투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말려야 할 고을 수령까지 그 싸움에 가세하기에 이르렀다. 할 수 없이 타협책을 찾아야 했다. 향을 피워 연기가 가는 방향으로 당신을 모시기로 양쪽이 합의한 것이다. 연기가 조계산을 향하는지라 다시 옛 자리로 운구되었다. 선사는 당신을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스승을 너무 존경한 사부대중의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려는’ 굳건한 의지에 ‘마지못해’ 등신불이 되신 것이다.
화장과 매장의 선택권
『선원청규』「존숙천화(尊宿遷化)」편에 의하면 일반대중은 반드시 화장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존숙(방장급)은 화장을 하거나 입탑(入塔: 탑 안에 육신을 그대로 모시는 일종의 매장 형식)을 한다.”고 했다. 이것이 등신불의 청규적 배경이라고 하겠다. 방장(주지)스님은 화장과 매장 중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존숙은 장례를 마친 후 진영(眞影)을 조당(祖堂)에 안치토록 했다. 이심전심(以心傳心)과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종지로 하는 선종은 스승의 위상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조당집』권17에 신라 선종의 초조인 도의 국사가 육조 선사의 조당을 참배하려 갔을 때, 영당의 문이 저절로 열렸고 예배를 마치고 나오니 그 문이 저절로 닫혔다고 한 것도 이런 선종정신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생얼’등신불 가섭존자
『보림전』권1 「가섭」편에서 존자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했다. 줄거리는 이렇게 요약된다.
“아사세왕은 궁전의 대들보가 부러지는 꿈을 꾸었다. 가섭 존자의 열반을 알리는 것으로 해몽했다. 즉시 죽림정사로 가서 아난 존자와 함께 계족산으로 갔다. 왕이 도착하자 산이 스스로 열리고 그 안에 가섭 존자가 선정의 상태로 앉아 있었다. 물론 전신모습 그대로 였다(迦葉…全身不散). 예배를 하고 공양물을 올린 후 왕과 아난이 그 산을 나오자마자 산은 합쳐져서 원래대로 되었다.”
가섭 존자는 가부좌를 한 채 계족산을 육신보전 삼아서 금칠도 옻칠도 하지 않은 ‘생얼 등신불’이 되신 것이다. 지금이라도 아사세왕 만큼의 신심을 갖추고 계족산으로 달려가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을 외운다면 산이 대문처럼 열리면서 우리도 존자의 등신불을 친견할 수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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