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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성철스님 시봉이야기』와 한국불교 역사 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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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6 년 5 월 [통권 제37호]  /     /  작성일20-05-29 12:30  /   조회6,49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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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에 열림원 출판사에 속한 ‘책읽는 섬’에서 ‘엮은이 원택’으로 하여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는 부제로 『설전(雪戰)』을 출판하였습니다. 저는 원고는 정리하였지만 책의 편집과 제목은 편집자인 함명춘 선생에게 일임하였습니다. 작년 봄에 법정 스님과 최인호 선생과의 인생 대화록인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라는 책을 함 선생에게 선물로 받고 한 번에 읽은 기억이 있어서 모든 것을 믿고 맡긴 셈이었습니다.

 

제목을 “‘설전(雪戰)’이라고 붙인 것은 차갑고 냉철하면서도 부드러운 수도자의 자세를 ‘눈’이라는 매개로 형상화하는 한편,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웃게 만드는 유일한 다툼인 ‘눈싸움’의 이미지를 통해 성철과 법정 두 큰스님 사이에 오간 구도의 문답과 인연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표지 글에 간략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애꿎게 주위에서 “‘법정 스님이 묻고 성철 스님이 답하다’고 해야지 스님이란 단어가 없으니 너무 세속적이다.”는 야단을 들어야 했습니다.

 


성철 스님과 원택 스님. 해인사 인근 남산 매화봉에서 찍은 모습. 

 

『설전(雪戰)』 출간의 인연인지 2월 말쯤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스님, 스님은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이번에 조현 기자 대신에 종교를 맡게 된 한겨레신문의 이길우 기자입니다. 이번에 출간하신 『설전(雪戰)』을 재미있게 읽어서 스님을 한 번 뵙고 싶습니다.”

“요즘은 부산에 많이 머물고 있고 백련암에는 주말에만 가끔 들르고 있습니다. 백련암에서 인터뷰는 자주 했으니 산청 겁외사에서 한 번 만났으면 합니다.”

 

이렇게 인연이 돼서 이길우 기자님을 3월 초에 겁외사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한겨레신문 3월 16일 수요일자 ‘녹색 삶 휴심정’ 난에 전면에 가깝게 큰 지면으로 제 인터뷰가 보도되었습니다.

보도가 나오고 하남 정심사 주지로 있는 사제 원영 스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한겨레신문을 잘 읽었습니다. 사형님, 오늘이 음력 2월 8일로 부처님 출가일입니다. 기사를 ‘원택 스님 출가이야기’라고 했으면 똑 떨어졌을 텐데 아쉽습니다.”

 

오후에는 고심정사 불교대학 총동문회장인 문선이 보살님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그동안 조선, 중앙, 동아일보 등에서는 더러 스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오늘 아침 한겨레 신문을 받아보고 스님 사진도 크게 나오고 기사도 엄청 크게 실려서 우리스님도 이제 한겨레신문에서도 모시는 큰스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스님 축하드립니다. 하하.”

 

그리고 지난 4월 16일 토요일자 불교신문에 ‘우리스님’(8면)이라는 난의 전면에 ‘성철 스님 선양은 한국불교 전체를 위한 일’이라는 제목으로 제 얘기가 보도되었습니다. 종단에 큰 어른스님들도 많으신데 외람된 일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하면서 기사를 읽어 나갔습니다.

 

“출가 이후의 삶은 온전히 성철 스님에게 바친 삶이다. 매우 예민하고 강퍅했던 스승에게서 주야장천 ‘곰 새끼’라 욕을 먹으면서도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말씀을 기록할 뿐 해석하진 않는다’는 게 원택 스님의 철칙이다. 모든 내용이 성철 스님의 육성이자 친필이며 한 글자도 더하거나 덜지 않았다. 행여 흠을 낼까 그 흔한 석·박사 학위도 따지 않았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세태에서, 진정 주목할 만한 인욕이다.”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글이 혹시나 세속에 의혹을 일으키는 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몇 마디 적을까 합니다.

 

예전에 이 인터뷰 기사를 쓴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녹음된 큰스님의 말씀들을 녹취해서 어록들을 여러 권 출간하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제가 학사 자격에 머문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석사도 하고 박사학위도 받았더라면 제 지식이 큰스님 말씀에 많이 첨가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임이 다른 사람들의 예에서 많이 드러남을 보았습니다. 저는 큰스님의 말씀을 녹취하면서 제 마음 대로 글자 한 자라도 더 보태거나 빼지 않고 큰스님 말씀을 그대로 정리하였습니다. 큰스님을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큰스님 말씀의 원 뜻을 가지고 비판하고 옳음을 주장하는 것은 다음 학자들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위의 장 기자님의 글에서 “행여 흠을 낼까 그 흔한 석·박사 학위도 따지 않았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세태에서, 진정 주목할 만한 인욕이다.”는 말은 과찬의 말이고 저는 석・박사를 공부할 시간도 없었고 더구나 학문할 재주가 없었음을 솔직히 고백함이 편할 것 같습니다.

 

범어사에서 봉행되는 동산 노스님의 제사는 음력 3월 23일입니다. 매년 꼭 참석하고 나서 무비 큰스님을 찾아 인사를 드립니다. 무비 스님은 한때 디스크 치료를 잘못 하여 하반신 마비가 되었을 정도로 꼼짝 못하고 병석에 계신 때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문병차 인사를 드리니 아래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시봉이야기표지앞면 

 

“내가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덕분에 원택 스님이 출간한 성철 스님 백일법문 CD를 수십 번도 더 들었으니 당신 상좌들보다 내가 더 당신을 아는 상좌가 되었네. 지금 돌이켜 보니 옛날에 범어사나 종단에 큰스님들이 많이 계셨고, 모두들 존경할 만한 수행과 학덕을 가졌던 어른스님들이셨어.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니 그 큰스님네들의 흔적이 아무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어. 그 뒤의 사람들이 자료와 기록을 잘 정리하여 남겼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없으니 세월 속에 그 큰스님들의 자취를 찾을 길이 없어. 그러나 다행히 성철 스님을 상좌들이 자취를 잘 정리해가고 있으니 참 고마운 일이요. 원택 스님, 주위의 말에 신경 쓰지 말고 열심히 하소!”

 

위 이야기를 장 기자에게도 했던 기억입니다. 이 글에서 장 기자는 “남이 보면 성철 스님 개인을 위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나중엔 불교 전체를 위한 일이었음을 그들도 알게 될 것이라고 한 무비 스님의 말씀이 위로가 힘이 된다.”고 저를 격려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동안 준비하고 또 기다리고 기다리던 개정증보판 『성철 스님 시봉이야기』가 512쪽짜리 한 권으로 4월 15일에 발행되어 책을 받아들고 책장을 넘겨보니 감개무량하였습니다. 2001년 5월부터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산은 산 물은 물, 성철 스님 시봉이야기’가 주 5일씩 연재되기 시작하여 10월 말쯤에 연재를 마치게 되니 정말 하늘을 날 듯 가뿐한 기분이 되살아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재를 하면서 글쓰기가 힘들 때마다 이헌익 부장과 오병상 기자를 원망하고 또 원망하였는데 이번에 다시 예전의 시봉이야기에 더해 100여 쪽에 이르는 ‘6장 시봉이야기 그 후’ 챕터를 새롭게 추가하여 1993년 11월 큰스님이 열반에 드신 후 23년간 이루어진 추모사업들을 첨가하고 보니 저도 백련암에서 출가한 지 45년이나 됨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인이 되신 이헌익 부장님과 JTBC 보도총괄로 있는 오병상 기자님에게 너무 고맙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때 두 분의 강력한 요청이 없었더라면 개정증보판 『성철 스님 시봉이야기』는 끝내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철 스님 시봉이야기』는 송광사 불일암의 법정 큰스님이 큰 대들보가 되어 주셨음이 분명합니다. 지금 와서 법정 어른 스님께 크게 감사한 부분은 “절집 저작의 무료 배포인 ‘법공양’을 철폐하고 정가를 붙여 서점에 큰스님 책을 내어 놓자고 큰스님을 설득해보자.”시던 말씀입니다.

 

그래서 작정하고 “큰스님! 법보시로 책을 무료로 나누어 주면 시간적으로 보시하는 것은 그때뿐이고 공간적으로는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특정의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인연이 된답니다. 그러나 정가를 붙여 전국의 서점에 내놓으면 그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면 시간적으로 영원히 서점에 진열되고 공간적으로는 우리가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널리 읽힐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큰스님께서 법보시, 법공양의 전통을 벗어나 큰스님의 저서에 정가를 붙여 시중 서점에 내놓는 것이 이 시대 불교출판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며 성철 큰스님께 거듭거듭 이 뜻을 전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백련암에서 담소를 나누는 스님들. 왼쪽부터 원영, 성철, 법정, 원택 스님 

 

오늘 법정 큰스님의 예견의 말씀과 같이 큰스님의 저서들이 대형 서점들의 서가에서 독자들을 반기고 있는 현실이니 법정 어른스님께 성철 큰스님의 상좌로서 거듭 거듭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 선원수좌회에서 미국 선원 탐방을 하고 온 인사에게서 전해들은 말입니다.

 

“LA 고려사에서 현호 스님을 친견하였는데 뜻밖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철 스님께서 해인사 초대 방장에 추대되시고 첫 결제를 하였는데, 그때 현호 스님께서 ‘방장스님! 우리 수좌들은 지금까지 정화불사에 휩쓸려 수행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강원에도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무식하니 불교의 선과 교에 대한 기본 가르침을 먼저 대중들을 위해서 교설해 주십시요’하고 간청해서 ‘백일법문’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저에게 확인을 구하는데 1967년은 저에게 있어 유사이전의 원시시대여서 아는 것이 없으니 확답을 못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철 스님 시봉이야기』는 법정 스님, 현호 스님 두 분의 역할이 컸는데, 현호 스님의 ‘백일법문’ 인연담까지 들으니 저는 두 분 스님께 더욱 ‘지심귀명례’ 해야겠습니다.” 하며 법정, 현호 스님께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성철 스님 시봉이야기』 첫 표지에는 ‘생전 22년 사후 23년, 45년간 성철 스님을 모신 원택 스님의 눈으로 바라 본 큰스님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열반 후 추모 불사의 자취를 진솔하게 그린 기록물이다’라고 하였고 책 뒤표지에는 ‘추상같은 엄격함과 천진불의 따스한 순수함으로 많은 이들을 보듬었던 성철 큰스님 58년 산승의 삶과 그림자 시봉을 해온 원택 스님의 45년 출가의 삶, 100년이 넘는 2대에 걸친 절집의 수행의 삶을 솔직하고 재미있게 쓴 우리스님 이야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2011년 8월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발행한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책을 펴 천천히 목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시대에는 천주교도와 성직자들이 나라의 역적이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천주교의 순교자이자 산역사로 기록하고 있으며 125위의 시복 시성을 기원하는 원력을 세우고 있습니다. 우리 조계종도들도 우리불교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 모두 한마음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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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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