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현장법사의 구법여행과 역경譯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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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9 년 8 월 [통권 제76호] / / 작성일20-05-29 10:32 / 조회6,737회 / 댓글0건본문
서재영 | 성균관대 초빙교수
『백일법문』은 삼론종에 이어 유식사상과 법상종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중국에서 유식과 법상종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현장법사다. 대승불교의 양대 산맥은 용수보살의 사상을 계승한 중관학과 무착과 세친의 사상을 계승한 유식학이다. 이 두 사상을 중국에 전래한 주역이 바로 대표적 역경승으로 손꼽히는 구마라집 삼장과 현장법사이다. 중관사상 관련 경론이 번역되면서 삼론종을 비롯한 중관사상이 성립하고, 유식관련 경론이 번역되면서 법상종 등 유식학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당나라 법 어기고 천축으로
구마라집에 대해서는 중관사상을 다룰 때 이미 살펴보았음으로 이번 호에서는 유식관련 문헌을 번역한 현장법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현장(玄奘, 602-664) 법사는 당나라 초기의 고승이자 중국의 대표적 역경승이다. 낙주洛州 구씨현丘氏縣 출신인 현장은 불과 10세 때 형을 따라 낙양 정토사에서 불경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13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현장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후 현장은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당대에 유행하던 열반涅槃, 섭론攝論, 비담毘曇, 성실成實 등 제반 불교학을 두루 공부했다.
이 때 현장의 관심을 끈 경론은 유식唯識을 다룬 무착無着의 저작이었다. 하지만 당시까지 무착의 저서는 일부만 번역된 상황이었고, 번역도 체계적이지 못했다. 이에 현장은 불교학에 대한 의문을 풀고, 불교에 대한 학문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의거한 연구가 필요함을 절감한다.
불교원전에 대한 이런 갈증은 현장만의 일이 아니라 진리에 목마른 수많은 승려들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중국 근대의 불교학자 양계초梁啓超에 따르면 4세기부터 약 4백 년 동안 인도를 다녀온 승려들 중 이름이 알려진 인물만도 169명에 달한다고 했다. 나아가 7세기 경 의정義淨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따르면 그가 책을 집필할 당시 약 50년 동안 57명의 승려들이 구법을 위해 천축으로 떠났다고 기록했다. 구법승들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은 구법승들의 출국을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다. 현장이 구법여행을 계획할 당시는 당태종 이세민이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으로 불리는 정변을 통해 황제로 등극한 직후였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통해 등극한 태종은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대외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그 첫 조치가 당나라에 위협이 되던 북방의 돌궐에 대한 총공세였다. 이를 위해 국경지대에는 비상령이 선포되고 엄격한 통행금지가 시행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장과 그의 도반들이 제출한 출국요청은 거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진리를 향한 현장의 열정을 세속적 권력으로 막을 수 없었다. 현장은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고 629년 서천西天을 향해 길을 떠났는데, 당시 현장은 28세의 패기만만하던 청년이었다.
구법여행의 첫 행로는 장안을 출발하여 고비사막과 기련산맥 사이로 뻗은 하서회랑을 통과하는 여정이었다. 그 다음 행로는 오늘날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에 속하는 투르판과 쿠차를 거쳐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지나 인도로 들어가는 대장정이었다. 현장이 거쳐 간 구법의 행로는 살아 돌아올 보장이 없는 여행이었다. 타는 갈증과 싸우며 끝없이 펼쳐진 고비사막을 가로 질러가야 했고, 험난한 설산을 넘어야 했고, 흉포한 산적을 만나야 했고, 말도 통하지 않는 다양한 문화권을 통과하는 여행이었다. 무수한 전법승과 구법승들은 그와 같은 역경을 넘어야만 비로소 한 편의 경전을 역출할 수 있었다.
고창국 국문태의 환대와 지원
현장은 630년 서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오늘날 투르판에 해당하는 고창국高昌國에 당도한다. 당시 고창국을 다스리던 왕은 한인漢人 출신의 국문태麴文泰였다. 그는 현장에게 인도로 가지 말고 그곳에 머물면서 불법을 설해줄 것을 간청하며 길을 막았다. 현장은 왕의 부탁을 받고 고창국에서 한 달 간 머무르며 『인왕반야경』을 설했다. 하지만 구법여행의 결연한 뜻은 굽히지는 않았다.
단식까지 불사하는 것을 보고 현장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깨달은 왕은 출국을 허락한다. 대신 구법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고창국에 들러 법을 설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불심이 깊었던 국문태는 죽음의 길로 떠나는 현장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4명의 사미승을 선발하여 동행시킴은 물론 승복 30벌, 황금 100량과 은전 3만 냥, 그리고 비단 500필을 여행경비로 제공했다. 나아가 서역을 통치하던 돌궐의 군주에게 현장의 안전을 보장해 주라는 소개장까지 써주었다. 이렇게 해서 현장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천산산맥을 지나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인도에 도착하게 된다.
장안을 떠난 현장은 무려 17년 동안이나 서역의 여러 나라와 인도 곳곳의 불적佛跡을 순례한다. 그리고 현장의 최종 종착점은 당시 불교학의 요람이었던 나란타사那爛陀寺였다. 현장은 그곳에서 5년 동안 머물며 호법護法의 제자인 계현戒賢으로부터 『유가론』, 『비바사론』, 『정리론』 등 대소승의 교의를 두루 공부했다. 그리고 중관과 유식 두 종파를 융화하는 『회종론會宗論』과 외도와 소승의 교설을 비판하는 『파악견론』을 저술했다. 나아가 스승으로부터 학식을 인정받아 나란타사에서 여러 경론을 강설하기도 했다.
험난한 구법여행과 불교공부를 마친 현장은 방대한 대소승의 경전을 구해 귀국길에 오른다. 현장은 자신의 구법여행을 후원해 준 국문태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돌아가는 길에 고창국을 경유하려 했다. 하지만 고창국은 당의 북방정책으로 인해 이미 멸망하고 난 뒤였다. 이에 현장은 서역의 불교중심지 중 하나였던 호탄에 당도하여 황제에게 귀국을 알렸다. 태종은 국법을 어기고 떠났지만 현장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속히 귀국하여 황궁으로 들라고 했다.
이렇게 현장은 장대한 구법여행을 마감하고 645년 정월 태종의 성대한 환대를 받으며 당나라로 귀국한다. 고창국 국문태의 극진한 배려와 후원으로 구법여행을 할 수 있었지만 고창국은 당에 의해 멸망하고, 오히려 현장의 출국을 가로막았던 당나라가 현장의 모든 성과를 독점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현장의 장대한 구법여행은 이렇게 끝났지만 그의 임무는 여행이 끝나는 순간 다시 시작되었다. 현장은 목숨을 걸고 가져온 구법여행의 결과물들을 하나씩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는 664년 입적할 때까지 무려 19년 동안 당 황실의 적극적 후원을 받아 수많은 경론들을 번역했는데, 그 분량이 무려 1,338권에 달했다. 쿠차 출신의 역경승 구마라집 삼장이 번역한 경론이 73부 384권임을 감안할 때 현장은 그 보다 무려 3배나 많은 경전을 번역한 셈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후 700년 동안 185명의 역경승들이 5,048권에 달하는 경론을 번역한다. 이 가운데 현장이 번역한 것이 무려 25%에 달하고 있어 중국불교사에서 현장이 남긴 업적을 짐작할 수 있다.
방대한 대·소승 경전의 번역
현장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으로 당대에 행해지던 경전 번역기법이나 번역어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당시까지는 주로 서역 출신 역경승들에 의해 번역이 이루어진 탓에 의미 전달에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현장의 번역은 개념과 의미의 전달이 정교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리하여 현장 이후 진행된 번역은 현장의 번역이 모범사례로 준용되기 시작했다. 역경사적 측면에서도 구마라집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부르는 반면 현장에 의해 개척된 새로운 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장의 업적은 이처럼 방대한 경론의 역출에만 그치지 않는다. 중국불교사에서 현장의 역할은 유식학과 관련된 경론을 번역하여 중국불교계에 새로운 자양분을 수혈한 것을 꼽을 수 있다. 현장에 의해 유식문헌이 번역됨으로써 유식을 기본으로 하는 법상종法相宗이 성립하고, 현장은 법상종의 개조로 추앙받게 된다.
현장이 남긴 또 하나의 업적은 구법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은 정리하여 『대당서역기』를 남긴 것이다. 12권에 달하는 이 책은 17년에 걸친 구법여행의 행적을 세밀하게 정리한 기행문으로 646년에 완성되었다. 『대당서역기』는 현장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138개에 달하는 나라와 도시들의 지리, 풍토, 관습, 전설 등을 정리하고 있다. 현장이 이 책에서 남긴 기록은 6~7세기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정치, 경제, 민족, 풍습, 종교의 상황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는 기록으로 평가 받고 있다.
특히 현장은 천축의 80개국 중 무려 75개국을 역방하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역사적 기록이 일천한 인도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현장의 이와 같은 업적은 수많은 대소승의 경전을 중국에 안겨준 인도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라는 의미를 띤다. 서역은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인도와 서역의 문물이 들어오는 루트이자 중국의 비단과 문물을 수출하는 문명의 교차로였다. 현장은 동서의 문물이 교차하는 그 험난한 길을 구법의 길, 다르마 로드로서의 의미를 더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선지식을 찾아 구법여행을 하는 선재동자의 역사적 모델을 들라면 그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현장법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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