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손가락 사이]
진짜 내 글씨 한 줄
페이지 정보
최재목 / 2019 년 8 월 [통권 제76호] / / 작성일20-05-29 10:31 / 조회6,161회 / 댓글0건본문
시·그림 최재목 |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진짜 내 글씨 한 줄
진짜 내 글씨 한 줄
삐뚤삐뚤 써댄다
해우소 변기에는
죽을 힘 다해 피고
온 생명 다 바쳐서 지는
山, 山, 조각의 문자가
더러더러 있다
뜨뜻하게 허공을 머물다 가는,
무명풍
그런 헛소리
부모미생이전의 문자를
누구나 여기 오면
한 획 한 획, 애써 꺾어댄다
진짜 목숨 걸고 새긴 글씨
그런 맹세는
내가 눈 똥오줌 속에서만
헛소리처럼
들어있는 것이다
잘 모르겠다
흙을 파서 고운 이랑을 만들고
들깨 씨를 묻었다
이만하면 올해도 한 밭 가득 심으리라 확신하며
산을 내려왔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열흘이 지나도 한 달을 다 되어도
싹은커녕 잡초만 무성했다
아무래도 새들이 다 먹어치운 듯 했다
허탈하여 며칠 밭가를 맴돌며
섭섭한 마음으로 새들이 날아간 하늘만 쳐다보았다
이 맘쯤 푸른 들깨 싹들이 구름 고랑을 따라
푸릇푸릇 자라나겠지…,
언젠가는 들깨 알들이 주룩 주룩 지상에 쏟아지겠지…,
새들이 키울 하늘의 밭 모습이 궁금해져, 나는
밤마다 하늘로 올라갔다
거기, 들깨 싹들은 보이지 않고
내가 버려둔 지상의 빈 밭고랑만 즐비했다
꿈이 더 괴로워, 할 수 없이
시장에 가 들깨 모종을 사서
장마가 시작된 날 다 심어 놓고 내려왔다
그동안 새들이 나를 얼마나 놀려댔을까
한동안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하늘을 쳐다보지 않았다
싹터오지 않는 땅을 무작정 믿고 기다렸던 내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정직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일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옛거울古鏡’, 본래면목 그대로
유난히 더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불면석佛面石 옆 단풍나무 잎새도 어느새 불그스레 물이 들어가는 계절입니다.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포행을 마치고 들어오니 책상 위에 2024년 10월호 『고경』(통권 …
원택스님 /
-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 속에 있다네
어렸을 때는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 시절에 화장실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거든요. 무덤 옆으로 지나갈 때는 대낮이라도 무서웠습니다. 산속에 있는 무덤 옆으로야 좀체 지나…
서종택 /
-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없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二由一有 一亦莫守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
성철스님 /
-
구루 린뽀체를 따라서 삼예사원으로
공땅라모를 넘어 설역고원雪域高原 강짼으로 현재 네팔과 티베트 땅을 가르는 고개 중에 ‘공땅라모(Gongtang Lamo, 孔唐拉姆)’라는 아주 높은 고개가 있다. ‘공땅’은 지명이니 ‘공땅…
김규현 /
-
법등을 활용하여 자등을 밝힌다
1. 『대승기신론』의 네 가지 믿음 [질문]스님, 제가 얼마 전 어느 스님의 법문을 녹취한 글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이렇게 여쭙니다. 그 스님께서 법문하신 내용 중에 일심一心, 이문二…
일행스님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