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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교를 만들어 낸 불교의 바닷길 ]
힌두교에서 불교국가로 전환한 크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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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  2025 년 12 월 [통권 제152호]  /     /  작성일25-12-04 13:32  /   조회2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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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불교사 이해의 첩경은 미얀마와 태국, 그리고 캄보디아와 베트남 불교이다. 푸난과 짬파, 그리고 앙코르 세 나라는 시기를 달리할 뿐더러 민족 구성원 자체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다. 그런데 세 왕국은 모두 힌두와 불교문명이 매개된 혼재 국가였다는 공통의 특장이 있다.

 

크메르는 남부 메콩강과 캄보디아 남동, 라오스 일부에 걸쳐 있었다. 한국인의 보편적 착시는 국민국가 영역 위주로 사고하고 그들 역사의 계기적 변화를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베트남 남부, 라오스, 캄보디아 불교가 상호 겹치는 대목은 역사적 영역 혼재, 인종적 혼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많은 한국인이 앙코르와트 관광에 나선다. 그런데 그 유적지는 힌두문명과 불교문명의 혼재물이다. 앙코르와트도 힌두에서 불교로 전환한 경우이다. 앙코르는 똔레삽 호수 주변의 관련 유적에 전통적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신성 도시’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나가라(nagara)에서 유래한다. 나가라는 뱀에서 유래하였고, 이는 물과 연관된다. 앙코르와트 입구의 코브라상도 물을 상징한다. 

 

사진 1. 뱀을 상징하는 나가. 불법의 수호자로 앙코르를 비롯하여 인도와 동남아 곳곳에 세워져 있다.

 

크메르 한자 표기는 진랍眞臘이다. 푸난을 접수한 크메르족 조상격인 콤(Khom)족의 진랍 왕국은 본디 푸난 북쪽, 오늘날의 남부 라오스와 북부 캄보디아에서 일어났다. 진랍은 8세기 초반에 분열한다. 『구당서』에서 당 신룡神龍(705〜706) 이후 육진랍과 수진랍으로 둘로 나뉘었다고 설명한다. 진랍의 기본 종교는 힌두교였다. 수진랍은 자바의 해상강국 사일렌드라 왕국에게 복속되는 운명을 겪는다. 그만큼 남방 해상세력의 힘이 강력하게 동남아에 미쳤다.

 

캄보디아 불교 전래 역시 아쇼카왕의 전파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불교의 본격화는 먼 후대의 일이다. 아마도 힌두교와 불교가 습합된 상태가 장기 지속되었을 것이다. 수리야와르만 1세(Suryarvarman, 재위 1010〜1050)는 캄보디아 역사상 최초로 국왕이 불교도임을 선언한다. 브라만교와 불교의 편견 없는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대승불교를 숭앙하면서도 테라바다 불교의 확산도 용인하는 방식이었다.

 

사진 2. 앙코르와트 사원 전경.

 

12세기 초에 수리야와르만 2세(재위 1113〜1150)가 들어서자 상황이 바뀐다. 왕은 힌두사원 앙코르와트를 완성한다. 힌두교에 의탁한 통치자였다. 앙코르(Angkor)는 산스크리트어로 ‘도읍’이라는 뜻이다. 와트(Wat)는 크메르어로 사원을 뜻하므로 앙코르와트는 ‘사원의 도읍’이라는 뜻이다. 힌두교 3대 신 중 하나인 시바와 비슈누 신에게 봉헌되었다. 앙코르와트 중앙의 다섯 개의 높은 탑은 힌두 신이 살고 있는 메루(Meru)산인데 불교의 수미산이다. 해자처럼 판 도랑은 바다를 상징한다. 바다 위에 메루산이 우뚝 솟은 형국을 뜻한다. 

 

1177년 베트남 해안가의 짬파왕국이 크메르를 공격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힌두 신의 영력이 떨어져서 공격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왕은 불교로 전환한다. 불력에 의탁하여 나라의 운명을 구해 보고자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으나, 단순하게 짬파의 공격 때문만이 아니라 이미 불교가 민간 사이에 넓게 저변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불교로의 전환을 결정했을 것이다. 대승불교가 테라바다 불교와 공존하면서 융성하였고 많은 승려들이 존재했다. 

 

사진 3. 앙코르와트 유적의 도면.

 

힌두사원에서 불교사원으로 바뀐 앙코르와트

 

앙코르와트 주변에 앙코르 톰(Thom)을 세우면서 기존의 힌두사원을 불교사원으로 바꾼다. 시바에 헌정한 부조는 불보살로 바뀐다. 12세기 말 불교 교리가 부드럽게 스며들면서 앙코르는 불교 신앙의 중심지가 된다. 앙코르 톰(Angkor Thom)의 중심 사원은 자야와르만 7세에 의해 건립된 바이욘(Bayon) 사원인데 불교가 중심이었다. 

 

바이욘은 크메르제국의 마지막 국가 사찰이었으며, 상좌부 성향이 강한 앙코르에서 대승불교 사찰로 지어졌다. 다만 바이욘은 불교사찰이면서도 힌두 요소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크메르 고유의 토착신도 포함하였다. 캄보디아 사람은 자야와르만 7세를 크메르인을 수호하기 위해 극락정토에 온 보살이라고 믿었다. 왕 스스로 ‘위대한 지고의 불교도’로 자칭하였다. 자야와르만은 자신을 생불이자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주장했다. 짬파의 침략으로 무너진 왕조를 재건설하면서 불심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자야와르만 7세의 의도가 반영된 사원이다.

 

사진 4. 앙코르와트 사원의 불상.

 

사원 전면에 216개의 인면을 배치하였다. 이전에는 없는 양식이다. ‘앙코르의 미소’로 불리는 이 불상들은 관음보살의 얼굴이자 동시에 왕 자신의 용안을 본뜬 것으로 알려진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빛이 사방팔방으로 비추어 왕의 통치가 세계에 비치고 백성을 보살핀다는 대승불교 이념을 상징한다. 관세음보살을 통하여 통치자의 자비심과 위력을 과시한 크메르제국 최후의 기념비적 불교유산이다.

 

바이욘은 본질적으로 불교사원이지만 사원 부조에는 힌두교 모티브가 곳곳에 엿보인다. 건축 양식은 인도 영향을 받아들인 위에 건물 형태나 석조 장식 등에서 앙코르 왕조의 독자 양식을 발현하여 이룩한 것이다. 캄보디아의 종교 성향과 인력 동원 능력, 종교적 열정과 국력, 뛰어난 예술 수준과 우주관, 도시의 구획 방식 등을 알려준다.

 

사진 5. 앙코르와트 사원의 부조상.

 

13세기 중반, 크메르 통치자 자야와르만 8세에 의해 힌두 신앙의 짧은 부활이 이루어졌다. 초기 크메르 제국의 힌두교 중심을 복원하고 앙코르를 힌두 중심으로 되돌렸다. 불교에 헌정되었던 바이욘조차도 이 짧은 기간 동안 개종되었으며, 건축 장식에 많은 부처의 얼굴이 제거되었다. 왕의 단독 결정이라기보다는 힌두에 의탁한 브라만 지배세력의 불만과 요구가 반영된 결과다.

 

한번 포교가 시작된 불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13세기 말까지 불교는 앙코르 도읍이 포기될 때까지 국교로 존재했다. 그리하여 크메르의 오랜 문화유산에는 힌두와 불교의 중첩된 이미지가 겹쳐져서 잠복되어 있다.

 

중국 사서에 기록된 진랍국의 역사

 

바이욘 부조에 중국 상선이 보인다. 광동이나 통킹만에서 온 중국 정크의 전형이다. 남중국해에서 인도차이나반도로 중국 상선의 뱃길이 이어졌다는 증거다. 크메르족과 중국의 영향 관계는 오랜 것이다. 오늘날 중국인 범죄조직에 의한 캄보디아 문제가 한국에서도 크게 부상하는데, 사실 역사적으로 중국과 캄보디아는 오랜 친연성을 지녀왔다. 바이욘 부조의 중국 상선은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암시한다. 

 

사진 6. 앙코르 톰의 중심부에 위치한 바이욘 사원. 12세기 후반 자야바르만 7세가 건설했다. 

 

송대 『제번지』에 의하면, 진랍국은 부처를 근엄하게 신봉하여 매일 여인 2백여 명이 춤을 추며 공양을 드렸다. 그들을 아남阿南이라고 부르는데 기녀들이라고 하였다. 조여괄은 불전에서 불교의례를 집행하는 여성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 나라의 승려와 도사들은 주법呪法의 영험함이 심하다. 승려 중에 옷이 누런 자는 아내를 들일 수 있고, 옷이 붉은 사람은 사원에서 거주하며 계율이 정밀하고 엄격하다.”고 하였다. 대처승과 청정승이 별도로 존재했고, 승려와 달리 도사라는 존재가 별도로 존재했다.

 

13세기 몽골 침략을 받아 크메르는 항복을 하며 원제국에게 세금과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했다. 테무르 칸은 주달관周達觀(1266〜1346)에게 동남아 군사 정보와 정치 상황, 지리, 물산 등을 기록하고 오라는 칙령을 내리며 1285년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제국통치에 들어온 크메르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군사 정보는 물론이고 나라 전반에 걸친 현지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진 7. ‘크메르의 미소’로 불리는 바이욘 사원의 거대한 얼굴 조각상.

 

주달관은 1년간 머물면서 그곳을 통치하던 인드라와르만 3세 곁에 1297년 7월까지 머물면서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를 남겼다. 진랍제국을 이해하는 기본 사료다. 당시에 진랍의 운명은 기울고 있었다. 주달관은 시암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황폐해진 평야를 만났다. 『진랍풍토기』에는 이 시기 캄보디아가 정체 상태로 있었다는 상황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지도 또 너무 몰락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불교 또한 그러한 상태였다.   암송 문헌이 매우 많다는 것은 다양한 경전이 들어와 있었음을 뜻한다. 아마도 남방 계통의 빠알리어 경전이 들어왔을 것이다. 야자나무 잎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패엽경貝葉經이 통용되었다는 뜻이다.

 

“나라 중심에는 금탑 1좌가 있고 옆에는 석탑 20여 개가 있으며, 석실 100여 칸이 있다.”고 하였다. 송·원대까지 이어지던 수도 앙코르는 15세기에 이르러 포기된다. 수도의 퇴락은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이웃 시암의 침략 때문이다.

 

장기 지속한 앙코르와트의 재발견

 

앙코르와트는 완전히 정글 속에 묻힌 채 인적이 끊겨버린 여타 크메르 사원들과는 다르게 단 한 번도 완전히 버려진 적은 없었다. 멸망 이후, 앙코르에 있던 많은 전적이 시암의 수도 아유타야로 옮겨졌다. 대항해시대 이래로 유럽인의 발길이 잦았으며, 1863년 프랑스 식민당국에 의해 대대적 ‘재발견’이 이루어진다. 프랑스 극동학원이 주도하여 복원과 보존 작업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방문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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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분과학문의 지적·제도적 장벽에 구애받지 않고 융·연구를 해왔다. 역사학, 민속학, 인류학, 민족학 등에 기반해 바다문명사를 탐구하고 있다. 제주대 석좌교수,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역사민속학회장,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POCC) 등을 거쳤다. 『마을로 간 미륵』, 『바다를 건넌 붓다』,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등 50여 권의 책을 펴냈으며, 2024 뇌허불교학술상을 수상했다.
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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