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서유기 ]
손오공의 자아 왕국과 삼장의 황금보탑
페이지 정보
강경구 / 2025 년 12 월 [통권 제152호] / / 작성일25-12-04 10:15 / 조회9회 / 댓글0건본문
삼장에게 쫓겨난 손오공이 고향인 화과산에 돌아오니 옛 터전은 모두 폐허가 되어 있었다. 500년 전 하늘과의 전쟁으로 손오공이 잡혀간 뒤 이랑진군의 부하들이 화과산을 불태우고, 수시로 사냥꾼들이 찾아와 원숭이들을 사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손오공은 남은 부하들을 모은 뒤 사냥꾼들을 모두 물리치고 다시 제천대성으로 복위하여 자아왕국을 재건한다.
폐허가 된 화과산
이 얘기는 폐허가 된 화과산에서 시작해야 한다. 손오공이 천상을 어지럽힌 죄로 부처님의 손바닥(오행산)에 갇혀 500년을 지내다가 삼장을 만나 서천여행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그동안 이랑신과 그 수하의 사냥꾼들이 쳐들어와 화과산을 불태우고 수시로 원숭이 종족을 잡아간다. 그리하여 4만 7천이나 되던 부하들이 혹은 죽고, 혹은 잡혀가고, 혹은 달아난 결과 1천 명 불과한 인원이 남아 있다가 손오공을 맞이한다. 그것은 손오공의 공에 대한 집착과 관련이 있다.

손오공은 백골요괴가 모습을 바꿔 나타날 때마다 단매에 때려죽이기를 반복했다. 그 절멸적 공에 대한 집착이 서천행의 주제인 색공선色空禪에 배치되므로 여행단에서 축출된 상황이다. 사실 공에 대한 집착은 오행산을 지난 뒤, 여섯 도적들을 때려죽일 때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도적의 이름은 눈으로 보고 기뻐함[眼看喜], 귀로 듣고 분노함[耳聽怒], 코로 맡고 애착함[鼻嗅愛], 혀로 맛보고 생각함[舌嘗思], 뜻으로 알아 욕망함[意見慾], 몸은 본래 걱정함[身本憂]이었다.
손오공이 웃음으로 이들을 상대한다. “아! 여섯 도적들이셨어. 내가 너희들의 주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길을 막는구나.” 손오공이 왕으로서의 마음[心王]을 대표한다면 눈의 지각[眼識], 귀·코·혀·몸·뜻의 지각이라는 6식은 그것을 구성하는 내용이다. “내가 너희들의 주인”이라는 손오공의 말이 가리키는 바가 이것이다. 손오공은 이 6식을 때려죽이고 백골요괴를 때려죽임으로써 마음의 작용을 멈추고 번뇌를 끊고자 한 것이다. 삼장이 축객령을 내릴 만하다.

한편, 손오공이 원래 거느렸던 4만 7천의 부하들은 부수적인 마음작용, 즉 심소법心所法이다. 손오공이 돌아오자 4명의 수령급 원숭이가 남아 있다가 손오공을 맞이한다. 그들의 이름은 마馬, 류流, 붕崩, 파芭로서 과거 손오공을 부추겨 하늘에 맞서도록 한 간신들이었다. 여기에서 마류馬流는 원숭이를 가리키는 광동 사투리인 것으로 보인다. 견자단이 주연한 「철마류鐵馬騮」라는 영화의 영문 표현이 ‘아이언 몽키(Iron Monkey)’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붕파崩芭는 끝없이 날뛰는 원숭이의 행동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다. 끝없이 움직이며 작동하는 마음의 작용을 원숭이에 비유한 것이다.

어쨌거나 화과산의 절멸적 폐허는 손오공의 공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것이었다. 손오공은 그 집착을 내려놓아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손오공은 자아를 부추기는 네 장군들(아치我癡, 아견我見, 아애我愛, 아만我慢)을 불러내어 자아 왕국의 재건에 들어간다.
자아 왕국의 재건
손오공은 우선 화과산의 원숭이들을 시켜 불에 탄 돌들을 찾아 쌓아 올리도록 한다. 그런 뒤 사냥꾼들이 쳐들어오자 주문으로 돌맹이들을 날려 그들을 모두 죽여버린다. 그리고는 사냥꾼들이 타고 다니던 죽은 말을 가져다 그 가죽으로 부하들의 옷을 해 입히고, 그 고기로 식량을 삼고, 창과 칼을 주워 무장을 시킨다. 그런 뒤 사냥꾼들이 남긴 깃발들을 가져다가 하나로 합쳐 제천대성齊天大聖의 깃발을 내건다. 큰 하나(One)를 설정하는 자아 왕국이 재건된 것이다.
이처럼 자아 왕국의 재건은 불에 탄 돌조각들을 모으는 일로 시작된다. 그 돌조각들은 손오공이 서천여행을 하면서 6식을 죽이고 백골요괴를 죽였던 것처럼 의식작용을 절멸시켰던 기억들이고 흔적들이다. 그러니까 돌조각들을 모은다는 것은 그 절멸의 기억을 자부심의 근거로 삼았다는 뜻이다. 원래 불에 타고 남은 돌조각들은 과거의 제천대성이 보기에는 패배의 역사이다. 자아의 욕구가 분쇄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손오공이 보자면 승리의 기념물들이다. 이렇게 승리의 기념물들을 모은 승전탑이 세워짐으로써 자아 왕국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손오공은 돌조각들을 날려 사냥꾼들을 몰살시킨다. 승전의 흔적에 자부심을 느껴 자아의 왕국을 세움과 동시에 공성을 관조하는 눈(사냥꾼)이 사라져 버렸다는 뜻이다.
말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고 그 고기를 식량으로 삼았다는 점 역시 주목할 부분이다. 마음[心]을 원숭이에 비유하고 뜻[意]을 말에 비유하는 의마심원意馬心猿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불교의 관용어이기도 하지만 『서유기』적 상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마음과 뜻은 번뇌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수행의 동력이기도 하다. 서천여행단의 최초 구성이 손오공[心]과 용마[馬]로 시작되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원숭이 부하들에게 말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고 그 고기로 식량을 삼게 한다. 마음(원숭이)과 뜻(말)이 한 몸이 되어 번뇌 증장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다음으로 손오공은 사냥꾼들의 창과 칼을 빼앗아 원숭이들을 재무장시킨다. 여기에서 사냥꾼은 번뇌라는 맹수를 물리치는 제반 실천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그들이 들고 있던 창과 칼은 수행의 다양한 방편을 가리킨다. 자아의 조복에 쓰이던 방편이 자아를 높이는 무기가 된 상황이다. 실제 수행의 현장에도 그런 일이 있다. 강한 집중[止]과 밝은 관찰[觀]은 자아를 성찰하고 번뇌를 항복시키는 창과 칼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의 우월함을 뽐내는 무기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손오공이 그랬다. 그는 화과산 수렴동에 자아 왕국을 재건하고 제천대성에 복위한다. 과거에는 자아의 실체성을 근거로 한 아집의 제천대성이었다. 지금은 공空에 집착하여 그것을 자아의 근거로 여기는 법집의 제천대성이다. 근거는 다르지만 결국 자아를 최고로 여기는 자리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결과는 동일하다. 공에 집착하는 손오공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팔계와 만나 하나가 되기 전까지 철두철미 요괴일 수밖에 없다. 물론 모양에 집착하는 팔계나 그에게 동조했던 삼장이 무사할 수는 없다.
황포대왕과의 만남
손오공을 떠나보낸 삼장은 다시 팔계를 보내 음식을 구해오게 한다. 팔계가 돌아오지 않자 다시 사오정을 보내 잘 곳을 찾아보게 한다. 그리고 사오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길을 찾아 남쪽 길로 들어섰다가 요괴를 만나게 된다.
손오공이 떠난 후 삼장을 지키고 음식을 구해오는 것은 팔계의 몫이 된다. 음식을 구해오라는 삼장의 당부에 팔계는 호언장담을 한다. “얼음을 비벼 불꽃을 만들고, 눈을 짜서 기름을 얻겠다는 마음으로 공양을 구해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팔계는 공양을 찾지 못하고 풀숲에 들어가 코를 골며 잠에 빠져 버린다. 왜 팔계는 공양을 구하러 다니다가 중간에 잠에 빠지는 것인가? 공양물은 도를 이루는 양식이다. 이전에 손오공은 밥 대신 산속에서 익은 복숭아 정도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산속의 인연은 복숭아이고 그 인연을 받는 것이 공양이다. 그것은 진리를 맞이하는 길이기도 하다.

지금의 이 인연이 진리가 드러난 현장이고, 부처님이 출현한 법당이다. 그러므로 진리와의 합일은 인연을 수용하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팔계는 진리가 아름다운 여인처럼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진리는 유위적 노력을 통해 밖에서 얻어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어떤 실체이다. 그래서 얼음을 비벼 불을 얻고, 눈을 눌러 기름을 짜겠다는 마음으로 나서는 것이다. 이러한 억지 추구와 유위적 실천은 진리에서 멀어지는 길이다. 그 닿지 않는 길을 고집하면서 억지로 추구하므로 금방 피곤할 수밖에 없다. “에이! 모르겠다! 그냥 풀숲에 들어가 잠이나 한숨 자야겠다.”
삼장의 관념적 중도
팔계가 잠을 자는 동안 삼장은 귀가 뜨거워지고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몸과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사오정을 내보낸다. 팔계도 찾아보고 묵을 곳도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삼장은 사오정을 기다리지 않고 짐과 말, 삿갓과 석장은 그 자리에 두고 길을 찾아 숲속으로 들어선다. 숲속에서 여러 갈래의 소로길을 만난 삼장은 그중에서 남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는데, 그 끝에서 황금보탑이 세워진 사원을 만나게 된다. 요괴의 사원이다.
왜 삼장이 귀가 뜨거워지고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불안을 느끼는가? 그것은 팔계의 잠과 관련이 있다. 진리를 밖에서 찾으면 두리번거리게 되므로 산란이 찾아오고, 억지 추구를 하게 되므로 피곤하여 혼침이 찾아온다. 이처럼 혼침과 산란은 밖에서 진리를 찾는 이에게 찾아오는 쌍둥이 자매다. 그것이 삼장의 불안을 야기한 것이다.
이때 삼장이 버려둔 짐과 말, 삿갓과 석장은 수행의 방편이다. 삼장의 서천여행에 있어서 짐과 말과 석장을 지키는 일은 중요하다. 이 짐은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별 효과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을 잘 지켜야 한다. 그러다 보면 모르는 사이에 서천에 도달하게 된다. 방편의 힘이다. 그래서 조석예불만 잘해도 도를 이룰 수 있고, 노는 입에 염불을 해도 아미타불이 현전하는 수가 있다. 삼장은 별도의 공양물, 별도의 숙소, 별도의 진리를 상정하고 있으므로 지금의 인연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수행방편을 방치한 것이다.

한편, 삼장은 숲속에서 여러 소로길을 만나 그중 남쪽으로 난 길을 택한다. 왜 남쪽인가? 삼장은 중도를 중간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팔계의 실체 집착(서쪽)도 아니고 손오공의 허무 집착(동쪽)도 아닌 남쪽이라는 중간을 택한 것이다.
황금보탑과 황포요괴
삼장이 황금보탑의 사원에 들어가 보니 황금 도포를 걸친 한 흉악한 요괴가 잠을 자고 있었다. 삼장은 깜짝 놀라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문밖으로 돌아나온다. 그러나 요괴가 그것을 알아채고 부하들을 시켜 삼장을 잡아들이게 한다. 황금보탑은 무엇인가? 또 왜 보탑 아래에 황금 도포의 요괴가 있는 것인가?
수행의 본격적인 장애는 수행자가 바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삼장에게는 황금보탑이 나타났다. 원래 삼장은 서천행을 시작하면서 탑을 만나면 탑을 참배하겠다는 발원을 한 바 있다. 그런데 그냥 탑도 아니고 황금보탑을 만났다. 순도 높은 부처의 현현이 아닐 수 없다. 황금이 부처의 금색신에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의 금색신 역시 불변의 실체는 아니다. 생멸하는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금빛에 혹해서는 안 된다. 그 자체가 삿된 길이기 때문이다. 모양으로 여래를 보고, 음성으로 여래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삿된 길을 걷는 이라서 여래를 볼 수 없다는 가르침이 적용되는 지점이다.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자청하여 자기 몸을 요괴의 입속에 넣어주는 일이 된다.

삼장이 만난 요괴는 푸른 얼굴, 흰 송곳니, 풀의 새싹과 같은 구렛나루, 연지색 두발, 앵무새 코, 새벽별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미녀로 변신하여 나타난 백골요괴와 같은 색깔이다. 다만 그 조화가 기형적이다. 이에 비해 백골요괴는 짙게 푸른 눈썹, 별 같은 눈, 달 같은 자태, 제비 같은 몸매, 앵무새 같은 목소리를 하고 푸른색 통, 초록색 병을 든 미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똑같은 모양과 색의 향연이지만 한쪽은 아름답고 한쪽은 흉하다. 인연에 따라 그 조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달라진 조합에 의미를 두어 아름다운 것은 좋아하고 추악한 것은 싫어한다면 그것 자체가 번뇌이다. 삼장이 요괴에게 잡힐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카일라스산 VS 카일라사 나트
『고경』을 읽고 계시는 독자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현재 필자는 히말라야의 분수령에 서 있다. 성산聖山 카일라스산을 향해 이미 순례길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의 앞다리는 티베트의 땅을 …
김규현 /
-
기후미식의 원형 사찰음식
사찰음식은 불교의 자비와 절제, 공존의 정신을 바탕으로 합니다. 자연의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생명을 해치지 않고도 풍요를 느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음식 문화입니다. 인공조미료나 육류를…
박성희 /
-
동안상찰 선사 『십현담』 강설⑧ 회기迴機
성철스님의 미공개 법문 12 회기라! 기틀을 돌린다고 해도 괜찮고, 돌려준다고 해도 괜찮고, 경계에서 한 바퀴 빙 도는 셈이야. 열반성리상유위涅槃城裏尙猶危&…
성철스님 /
-
법안문익의 오도송과 게송
중국선 이야기 57_ 법안종 ❹ 중국선에서는 선사들의 게송偈頌을 상당히 중시하고 있다. 본래 불교는 십이분교十二分敎(주1)로 나누고 있으며, 그 가운데 운문韻文에 해…
김진무 /
-
소신공양과 죽음이 삶을 이기는 방법
만해 선생이 내 백씨를 보고,“범부, 중국 고승전高僧傳에서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이니 분신공양焚身供養이니 하는 기록이 가끔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아…” 했다.내 백씨는 천천히 입을 …
김춘식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