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어떤 근거로 열반을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로 간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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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4 년 9 월 [통권 제137호] / / 작성일24-09-05 11:02 / 조회1,190회 / 댓글0건본문
‘열반 궁극실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를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경전에 걸쳐 발굴한다. 그 사례를 소개하고 비판과 대안을 피력해 보려 한다. 직관적이거나 소략한 논의로는 비판과 대안이 설득력을 확보하기 어렵기에 몇 회에 걸친 글이 될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근거를 찾는 경우
<열반은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를 체득하는 것이다>라는 견해가 니까야 문헌에서 채집하는 근거들은 결국 행行(saṅkhārā)으로 압축된다. 전형적인 견해는 이런 식이다. -<‘무상·고·무아’ 법설의 정형구인 제행무상諸行無常(sabbe saṅkhārā aniccā), 제행개고諸行皆苦/一切皆苦(sabbe saṅkhārā dukkhā), 제법무아諸法無我(sabbe dhammā anattā)가 바로 ‘열반은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행行 현상’(saṅkhata-dhamma)인 유위법은 무상하고 고통이다. 이에 비해 열반은 ‘행(行) 아닌 현상’(asaṅkhata-dhamma)인 무위법으로서 무상과 고통에서 벗어난 경지이므로 ‘불변의 완전한 절대적 존재 상태’이다.>
니까야·아함의 경구로서는 『우다나[自說經]』의 두 시구가 즐겨 채택된다. 하나는,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주1)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ajātaṃ), 생겨나지 않고(abhūtaṃ), 만들어지지 않고(akataṃ), 형성되지 않은 것(asaṅkhataṃ)이 있다.”(주2)라는 것이다.
또한 니까야에서 열반을 ‘불사不死(amata)의 경지’라고 표현하는 구절들도 ‘열반 궁극실재론’의 근거로 채택되곤 한다. 예컨대 이런 식의 이해다. -<‘불사不死(amata)의 경지’라는 말은 열반을 체득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는 뜻이다. 따라서 열반은 변하지 않을 수 있는 ‘불변·절대의 궁극실재’가 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근거를 찾는 경우
‘열반 궁극실재론’의 근거를 대승경론에서 구하는 경우는, 대승 열반경인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 말하는 ‘열반의 특성에 관한 설명’이 즐겨 거론되곤 한다. 특히 열반의 특성을 ‘상常·낙樂·아我·정淨’의 네 가지로 설명하는 것이 강력한 근거로써 채택된다.
“만약 ‘부처 [본연의] 면모를 봄[見佛性]’으로써 번뇌를 끊을 수 있다면 이것을 ‘완전한 열반[大般涅槃]’이라 부르니, ‘부처 [본연의] 면모[佛性]’를 보기 때문에 ‘늘 [본연에] 머무름[常]’·안락함[樂]·‘[참된] 자기[我]’·온전함[淨]이라 부르고,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번뇌를 끊어 없애는 것도 ‘완전한 열반[大般涅槃]’이라 부른다.”(주3)
이 구절을 ‘열반 궁극실재론’의 근거로 삼는 견해들은, <‘상常·아我’라는 것은 열반의 경지가 ‘영원한[常] 궁극실재[我]’라는 것이고, ‘낙樂·정淨’이라는 것은 그 영원한 궁극실재를 채운 긍정적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이 용어들의 의미를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외면한 것이다. ‘의미맥락 일탈의 오해’이다. 후에 다시 소개하겠지만, 『대반열반경』 ‘상·낙·아·정’의 의미에 대한 원효의 해설은 정곡을 찌른다.
이 밖에도 대승불전 전반에 걸쳐 부각되는 긍정형 기호들, 예컨대 진여眞如·진여심眞如心·진심眞心·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자성自性·구경각究竟覺·본각本覺·진각眞覺·심체心體·자성自性·여래장如來藏 등의 용어를, 그 용어들의 의미와 관련하여 구사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개념과 묶어 열반을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라고 이해하는 근거로 채택하곤 한다. 나중에 거론하겠지만, 이때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시간적 변화로부터의 초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열반을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로 보는 근거의 출발점-행行(saṅkhāra)
니까야/아함에서는 열반을 무위법無爲法(asaṅkhata-dhamma)이라 부르기도 하면서 유위법有爲法(saṅkhata-dhamma)과 대비시킨다. 그리고 무위법과 유위법의 차이를 가르는 것은 행行(saṅkhārā)이다. ‘행行인 현상’(saṅkhata-dhamma)은 유위법이고, ‘행行이 아닌 현상’(asaṅkhata-dhamma)은 무위법으로서 곧 열반이라 말한다. 따라서 행行(saṅkhāra)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따라 열반인 무위법의 특징과 의미가 결정된다.
‘열반 경험’과 ‘열반 아닌 경험’을 가르는 근본 조건은 행行(saṅkhāra)이다. 지혜·해탈·열반의 삶은 ‘행行의 지배에서 풀려난 삶’이고, 무지·속박·고통의 삶은 ‘행行에 지배되는 삶’이라고 한다. 도대체 행이 무엇이길래 열반의 삶과 비非 열반의 삶을 가르고, 중생 인간의 인식 내용을 결정하는 것일까? 붓다의 길을 탐구하는 학인들이라면 초미의 관심으로 탐구해야 할 문제다.
열반을 불변·절대의 경지로 간주하는 견해는 제행무상諸行無常·제행개고諸行皆苦 법설을 결정적 근거로 삼는다. 이 법설의 의미를, <모든 행은 변하는 것이고, 변하는 행은 모두 고통이다. 따라서 무상한 행을 벗어나 불변의 경지를 성취하는 것이 바로 열반이다>라고 읽는다. ‘변화[無常]와의 관계를 끊고 불변으로 초월하려는 시선’, 다시 말해 ‘변화 혐오와 불변 선호의 시선’이다. 그러나 이런 시선은 ‘변화·관계의 현상 그 자체’에서 ‘사실 그대로’의 진리를 구현하는 붓다의 중도가 아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붓다의 중도는 <변화·관계의 현상과 접속을 유지한 채 구현되는 자유와 평안의 지혜 길>이다.
제행무상·제행개고라는 말은 ‘행의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에 따라 구분되는 두 유형의 행’을 고려하여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를 설정하지 않고 해탈·열반의 성취를 설하는 붓다 법설의 내용과 부합한다. <‘불변하는 동일·독자의 것이 있다고 보는 무지’를 조건 삼는 의도 작용[行]은 그에 따른 형성이 모두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현상을 변화와 관계로 보는 지혜’를 조건 삼는 의도 작용[行]은 ‘사실 그대로 아는 이해’를 일으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이렇게 읽는 것이 중도의 길에 부합한다. 이어지는 글에서 자세히 거론한다.
교학 전통과 학계에서는 행(saṅkhāra)을 ‘의도적 형성’ ‘의도적 행위’ ‘업의 형성’ ‘형성된 것’ 등으로 번역하면서 ‘의도’를 행의 핵심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니까야에서는 신체와 언어 그리고 인지와 관련된 작용이나 현상을 행行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호흡을 신행身行, ‘일으킨 생각’(尋, vitakka)과 ‘지속적 고찰’(伺, vicāra)을 구행口行, 느낌과 인식을 의행意行이라 일컫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 경우 역시 ‘의도’와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들숨과 날숨 같은 ‘신체적 작용[身行]’은 그 상태나 특징이 의도와 무관하지 않는 현상이고, ‘언어적 작용[口行]’과 ‘인지적 작용[意行]’도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신행身行은 ‘신체적 의도 작용’, 구행口行은 ‘언어적 의도 작용’, 의행意行은 ‘인지적 의도 작용’이라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행의 핵심을 ‘의도’에서 찾는 것은 타당하다. 문제는 행을 ‘일체의 의도적 행위’로 보는 관점에 있다.
행行은 붓다 법설 전체의 탐구 내용을 근원적 지점에서 결정하는 창窓이고 문門이다. 행에 대한 이해 여하에 따라, 열반을 비롯한 각종 교설과 수행에 관한 이해가 결정된다. 그런데 <‘일체의 의도적 행위에 의한 형성’을 그치는 것이 열반이다>라는 관점이 전통 교학과 학계의 행 탐구를 지배하는 것으로 보인다. 초기 교학에서부터 현재까지, ‘의도에 따른 형성 작용’이라는 의미를, 그 의미의 ‘발생 조건’을 성찰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태도가 일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12연기에서 설하는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行]이 있다>라는 말을 <모든 의도적 행위는 무명을 원인으로 생겨났다. 따라서 모든 의도적 행위를 그치는 것이 열반이다>라고 이해한 결과로 보인다. 연기법을 단선적 발생 인과론으로 보는 시선인데, 이런 이해는 연기법의 초점에서 벗어나 있다. 필자의 판단이 타당하다면, 행에 관한 ‘무조건적/비非 연기적 이해’가 붓다 법설에 대한 이해와 교학 형성을 주도해 온 셈이다. 그러나 이 행이라는 말은 ‘조건적 용법’으로 보아야 한다. ‘의도에 따른 형성 작용’이라는 의미는 그 ‘의미의 발생 조건’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모든 언어는 그 의미를 발생시키는 조건들과 관련시켜 이해해야 한다>라는 연기적 이해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행의 의미를 ‘무조건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에 봉착한다. <의도에 따라 행위를 하면서 무엇을 형성해 가는 것은 인간 고유의 면모가 아닌가?> <만약 ‘열반은 행의 그침’이라는 말이 ‘일체의 의도적 행위나 그에 따른 형성을 그치는 것’을 뜻한다면, 과연 그런 열반이 인간에게 가능한 것인가? 설혹 가능하다 해도 인간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도적 행위는 무상한 것이므로 일체의 의도가 모두 그친 것이 열반’이라면, 열반이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라는 것인가?> <모든 진리와 행복은 인간의 의도적 선택과 그에 따르는 노력에 의해 구현된다. 만약 일체의 의도적 행위를 그쳐야 한다면, 열반이라는 진리와 궁극적 행복은 무엇으로 성취하는가?>
불교가 아직도 여러 유형의 허무와 염세 및 신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의 빈약함에 있다. <인간의 의도적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불교라면, 불교는 결국 삶을 혐오하고 부정하는 염세와 허무주의가 아니냐?>라는 의문은 타당하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불교에 대한 시선이 결정된다.
행(saṅkhārā)에 대한 이해는, 열반의 문은 물론이거니와 붓다의 길에서 만나는 겹겹의 여러 관문을 통과해 가기 위해 언제나 챙겨야 하는 열쇠에 해당한다. <니까야는 이해하기 쉬워 좋다>라고 하는 분들이 많지만, 필자에게는 두꺼운 관문들이 줄지어 버티고 서 있어 그 오의奧義를 쉽게 포착하기 어려운 원형 보전寶典이다. 가급적 자신의 이해를 현재어에 담아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을 글쓰기의 원칙으로 삼고는 있지만, 행과 관련하여 앞으로 이어질 글들은 쉽게 읽히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여기 오온五蘊에서의 현상’인 행의 의미에 접근하려면, 붓다가 12 연기에서 말하는 <‘무명–행–식’의 연기적 발생과 소멸>에 관한 설법의 의미를 성찰해야 실마리가 풀린다. 12연기 전체에 대한 견해는 별도의 글로 다루어 보겠지만, 우선 ‘무명–행–식’ 연기의 의미만이라도 유심히 성찰해야 한다. 게다가 ‘무명–행–식’의 상호 연관과 그 의미는, 사성제·팔정도에 망라된 붓다 법설의 모든 관문을 여는 핵심 열쇠가 된다. 글이 길어질 수밖에 없고, 쉽게 읽히지 않는 논의가 될 수밖에 없다. 미리 양해를 구한다. 가급적 필자의 소견을 분명히 밝히려고 노력하겠다.
<각주>
(주1) 『우다나』 80; 전재성 번역 『우다나』 8-1, 「열반의 경」①(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9), pp.214~215.
(주2) 『우다나』 80; 전재성 번역 『우다나』 8-3, 「열반의 경」③, 같은 책, p.216.
(주3) 『열반경』 권23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T12, p.758c15~18). “若見佛性能斷煩惱, 是則名爲大般涅槃, 以見佛性故, 得名爲常樂我淨, 以是義故, 斷除煩惱亦得稱爲大般涅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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