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정편오위, 조동종의 핵심적 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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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4 년 9 월 [통권 제137호] / / 작성일24-09-05 09:14 / 조회1,195회 / 댓글0건본문
중국선 이야기 44_ 조동종의 선사상 10
조동종의 제접법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선사상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조동오위曹洞五位 혹은 정편오위正偏五位이다. 그런데 이 조동오위는 조동종의 핵심적인 선사상으로 이를 모두 상세히 논함은 몇 권의 책이 필요할 정도이므로 최대한 간결하게 논하고자 한다. 조동오위는 마땅히 앞에서 언급한 석두희천石頭希遷이 승조僧肇의 『조론肇論』을 읽고 찬술했다는 「참동계參同契」로부터 논해야 할 것이다.
「참동계」의 회호와 현중명의 이사원융
우선 희천의 「참동계」에서는 “사事에 집착하면 원래 어리석음이요, 리理에 계합하여도 깨달음이 아니다. 문문門門의 일체 경계가 회호回互·불회호不回互한다. ‘회호’하면 상섭相涉하고, ‘불회호’하면 위位에 의지하여 머문다.…… 눈에 부딪힘에도 도를 깨닫지 못한다면, 발을 움직인들 어찌 길을 알겠는가?”(주1)라고 한다.
이 구절로부터 보자면, 『조론肇論』의 ‘촉사이진觸事而眞’, ‘물아일체物我一體’ 등의 사상적 취지를 엿볼 수 있으며, 희천은 그를 이사理事의 회호와 불회호로 촉목회도觸目會道를 제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희천의 사상은 양개가 찬술한 「현중명玄中銘」에서는 ‘이사원융理事圓融’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체體와 용用을 혼연히 하여 치우침[偏]과 원만함[圓]을 완만하게 굴린다. … 맑게 깨달으면 붉은 봉황에 깃들이지 않고, 맑은 연못이 어찌 붉은 바퀴에 떨어지겠는가. 혼자면서 외롭지 않고, 뿌리가 없으면서 영원히 굳세고, 쌍으로 밝혀 운을 가지런히 하면, 일[事]과 이치[理]가 원융圓融을 갖춘다.”(주2)
이로부터 명확하게 이사의 원융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붉은 봉황[丹鳳]’과 ‘붉은 바퀴[紅輪]’는 태양과 일륜日輪을 의미하니, 바로 윤회輪廻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렇게 체용體用과 이사理事가 원융함은 바로 회호回互·불회호不回互와 연계되고, 이로부터 이른바 ‘조동오위’의 사상이 도출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보경삼매가寶鏡三昧歌』에서는 “육효六爻를 거듭 떠나, 치우침과 올바름[偏正]이 서로 갈마들어[回互], 겹치어 셋이 되며 변함을 다해 다섯이 되었다.”(주3)라고 하여 ‘다섯’의 행법行法으로 전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조동오위
이러한 조동오위는 『인천안목人天眼目』 권3에 실린 ‘오위군신五位君臣’의 항목에서 본적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정위正位는 바로 공계空界에 속하여 본래 무물無物이고, 편위偏位는 바로 색계色界로서 만 가지 형상이 있다. 편중정偏中正은 일[事]을 버리고 이치[理]에 들어가고, 정중래正中來는 이치를 등져 일에 나아간다. 겸대兼帶는 중연衆緣에 그윽하게 상응하여 제유諸有에 떨어지지 않고, 오염되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옳지도 않고 치우치지도 않으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텅 비고 오묘한 대도大道는 집착이 없는[無著] 진종眞宗이다.”라고 한다.”(주4)
이로부터 정正과 편偏의 기본적인 의미를 엿볼 수 있는데, ‘정’은 체體, 이理, 공空이고, ‘편’은 용用, 사事, 색色이라 하겠다. 따라서 정편正編의 오위五位는 실제로 체용體用, 이사理事, 공색空色에 존재하는 다섯 가지 관계라 하겠다.
『동산양개어록』에서는 이를 정중편正中偏·편중정偏中正·정중래正中來·겸중지兼中至·겸중도兼中到의 다섯으로 구분하여 각각 게송을 붙이고 있다.
우선, 정중편의 게송은 “삼경三更의 초저녁 달빛 밝은 앞에, 서로 만나 몰라봄을 의아해하지 말지니, 오히려 은은히 옛날의 싫어함을 품는다.”(주5)라고 하였다. 이 정중편의 위位에서는 앞에서 본적이 ‘이치를 등져 일에 나아감’이라고 평한 바와 같이 용用·사事·색色 등에 치우친 것을 의미한다.
둘째, 편중정의 게송에서는 “눈먼 노파가 옛 거울을 만나니, 분명하게 얼굴을 비추어 보면 참됨이 없는데, 다시는 그림자를 머리로 앎을 그만두거라.”(주6)라고 하였다. 이 편중정에서는 본적이 ‘일을 버리고 이치에 들어감’이라고 평한 바와 같이 이理·체體·공空에 치우쳐 있음을 의미한다.
셋째, 정중래의 게송은 “없음 가운데 길이 있어 진애塵埃와 멀어지고, 다만 현재 왕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전조前朝에서 말 잘하다 혀 잘린 것보다 또한 나으리.”(주7)라고 하였다. 이 정중래는 이치를 버리고 일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일을 버리고 이치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이미 이理·체體·공空을 어느 정도 체득하였으며, 그러한 바탕에서 용用·사事·색色을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넷째, 겸중지의 게송은 “양쪽의 칼날이 서로 부딪침에 피할 필요 없으니, 좋은 솜씨는 불 속의 연꽃과 같아, 완연히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의지意志가 있구나.”(주8)라고 하였다. 이 겸중지는 현상의 세계가 이미 환유幻有임을 여실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본체本體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엿볼 수 있음이지 아직 도달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다섯째, 겸중도의 게송은 “유무有無에 떨어지지 않으니 누가 감히 호응[和]하겠는가. 사람마다 모두 중류衆流를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를 끊어 다시 숯 구덩이로 돌아가 앉는다.”(주9)라고 하였다. 이 겸중도는 조동종에서 제시하는 최고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에서 조산이 설명한 ‘겸대兼帶는 중연衆緣에 그윽하게 상응하여 제유諸有에 떨어지지 않고, 오염되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옳지도 않고 치우치지도 않음’과 일치하는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제유에 떨어지지 않음’이지만 ‘그를 끊어 다시 숯 구덩이로 돌아가 앉음’이라고 하겠다.
조동종과 임제종의 사빈주
『인천안목』 권3에 실린 명안明安의 ‘오위빈주五位賓主’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정중편正中偏은 바로 자비를 베풀어 접물接物하게 하는 것으로, 곧 주인 가운데 손님이 있음[主中賓]이요, 바로 제일구인 사람을 빼앗음[奪人]이다. 편중정偏中正은 비춤[照]과 용用이 있는 것으로, 바로 손님 가운데 주인이 있음[賓中主]이요, 제이구인 경계를 빼앗음[奪境]이다. 정중래正中來는 바로 기특하게 받아들임으로, 주인 가운데 주인이 있음[主中主]이요, 제삼구인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음[人境俱奪]이다. 겸중주兼中主는 바로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님[非有非無]으로, 곧 손님 가운데 손님이 있음[賓中賓]이요, 바로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人境俱不奪]이다. 겸중도兼中到은 격格을 벗어나 자재自在하니, 사구四句를 떠나고 백비百非를 끊으니, 묘함이 다한 본래 없음[本無]의 묘함이다.(주10)
여기에서는 정편오위를 조동종의 사빈주四賓主와 연결하여 해석하고 있음이 두드러진다. 이 사빈주는 임제종의 사빈주와는 서로 다른 사상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임제종의 사빈주는 첫째, 손님이 주동적으로 주인을 보는 상황을 말하는 빈간주賓看主, 둘째,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주간빈主看賓, 셋째, 찾아온 손님이나 맞는 주인이 모두 주인이 되어 만나는 주간주主看主, 넷째, 손님이나 주인이 모두 손님으로 전락하는 빈간빈賓看賓이다.
그렇지만 조동종의 사빈주는 위의 인용문과 같이 주중빈主中賓·빈중주賓中主·주중주主中主·빈중빈賓中賓이다. 『인천안목』 권3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사빈주는 임제종의 (사빈주와) 같지 않다. ‘주중빈’은 체體 가운데 용用이고, ‘빈중주’는 ‘용’ 가운데 ‘체’이며, ‘빈중빈’은 용중용用中用으로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놓음이고, ‘주중주’는 사물과 나를 모두 잊고[物我雙忘], 사람과 법이 모두 사라지며[人法俱泯], 정위正位와 편위偏位가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주11)
이로부터 조동종의 주主는 체體, 이理를 가리키며, 빈賓은 용用, 사事를 가리키는 것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조동종의 사빈주는 철저하게 정편오위의 입장에서 논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임제종과 조동종의 사빈주를 비교하는 것에는 복잡한 사상적인 측면도 있지만, 간략히 말하자면, 임제종의 사빈주는 무엇보다도 선사와 학인의 만남을 통하여 선리를 깨우치게 함, 즉 돈오頓悟를 이루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조동종에서는 사실상 본래면목의 현성現成을 더욱 중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조동종의 체용體用과 이사理事의 원융을 더욱 중시하기에 나타난 결과라 하겠다.
그런데 명안은 조동종의 ‘오위’와 ‘사빈주’를 함께 논하면서 임제가 제창한 탈인불탈경奪人不奪境·탈경불탈인奪境不奪人·인경구탈人境俱奪·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의 사료간四料簡을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명안, 즉 대양경현大陽警玄(943~1027)은 오대五代와 송초宋初에 활동하던 조동종 선사이다. 오대로부터 송대에는 중국불교가 임제종과 조동종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면서 점차 대립이 발생하였던 까닭에 명안이 임제의 제접법을 인용하고 있는 점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양개나 본적의 어록에는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사상적 내용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명안의 시기에는 여전히 오가의 선사들이 자유롭게 교류하며 서로의 사상을 섭수攝受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편오위는 조동종의 핵심적인 선사상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대부분의 조동종 선사들이 그에 대한 해석과 게송 등을 제시하고 있다. 더욱이 정편오위는 공훈오위功勳五位, 군신오위君臣五位, 왕자오위王子五位 등 다양하게 전개되고, 나아가 이 오위설을 주역周易의 괘상卦象과 연계하여 설하고 있다. 그에 따라 여기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정편오위를 논하였고, 그로부터 나타난 조동종의 제접법인 사빈주를 언급하였다.
<각주>
(주1) [宋]道原纂, 『景德傳燈錄』卷30(大正藏51, 459b), “執事元是迷, 契理亦非悟. 門門一切境, 迴互不迴互. 迴而更相涉, 不爾依位住. …… 觸目不會道, 運足焉知路.”
(주2) [日本]慧印校, 『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大正藏47, 515b), “渾然體用, 宛轉偏圓. …… 蒼悟不栖於丹鳳, 澂潭豈墜於紅輪. 獨而不孤, 無根永固, 雙明齊韻, 事理俱融.”
(주3) 앞의 책(大正藏47, 515a), “重離六爻, 偏正回互, 疊而爲三, 變盡成五.”
(주4) [宋]智昭集, 『人天眼目』 卷3(大正藏48, 313c), “正位卽屬空界, 本來無物; 偏位卽色界, 有萬形像. 偏中正者, 捨事入理; 正中來者, 背理就事. 兼帶者, 冥應衆緣, 不墮諸有, 非染非淨, 非正非偏, 故曰: 虛玄大道, 無著眞宗.”
(주5) [日本]慧印校, 『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大正藏47, 525c), “三更初夜月明前, 莫怪相逢不相識, 隱隱猶懷昔日嫌.”
(주6) 앞의 책, “失曉老婆逢古鏡, 分明覿面別無眞, 休更迷頭猶認影.”
(주7) 앞의 책, “無中有路隔塵埃, 但能不觸當今諱, 也勝前朝斷舌才.”
(주8) 앞의 책, “兩刃交鋒不需避, 好手猶如火里蓮, 宛然自有沖天志.”
(주9) 앞의 책, “不落有無誰敢和, 人人盡欲出常流, 折合還歸炭里坐.”
(주10) “正中偏, 乃垂慈接物, 卽主中賓, 第一句奪人也. 偏中正, 有照有用, 卽賓中主, 第二句奪境也. 正中來, 乃奇特受用, 卽主中主, 第三句人境俱奪也. 兼中主, 乃非有非無, 卽賓中賓, 乃人境俱不奪也. 兼中到, 出格自在, 離四句絶百非, 妙盡本無之妙也.”
(주11) [宋]智昭集, 『人天眼目』 卷3(大正藏48, 320c), “四賓主, 不同臨濟. 主中賓, 體中用也; 賓中主, 用中體也; 賓中賓, 用中用, 頭上安頭也; 主中主, 物我雙忘. 人法俱泯, 不涉正偏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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