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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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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4 년 8 월 [통권 제136호]  /     /  작성일24-08-05 10:42  /   조회86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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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학자의 불교 이야기 8 |

 

불교의 중국 전래 

 

인도 불교는 1세기 전후해서 중국으로 들어왔으리라 봅니다. 이렇게 들어온 불교는 중국 재래종교인 유교나 도교와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5세기와 6세기 수隋·당唐 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로 발전했습니다. 당나라 문화를 중국의 황금기로 본다면 이 시기는 불교문화가 중국에 꽃 핀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와 맞물려 한국에서도 불교가 융성했습니다. 

 

사진 1. 불교가 최초로 중국에 전해진 사찰 낙양 백마사. 사진: 위키백과.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여러 종파로 갈라졌지만 크게는 삼론종三論宗, 유식종唯識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정토종淨土宗, 선종禪宗 등이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 중 삼론종과 유식종은 기본적으로 인도 불교를 옮겨놓은 셈이고, 나머지 종파들은 불교를 중국화한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분류 방법은 처음 네 종파는 이론 중심의 종파라면 정토종과 선종은 수행 중심의 종파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에서는 이런 종들을 선禪과 교敎로 통합하고 이를 통불교通佛敎라 칭했습니다.

 

선불교의 시작

 

한국에서는 선禪·교敎 둘 중 선을 중심으로 한다고 하여 ‘선주교종禪主敎從’ 혹은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선종의 초조라고 하는 보디다르마(Bodhidharma, 약 470~534) 이야기를 좀 하려 합니다. 보디다르마를 줄여서 달마達磨라고 합니다.

 

중국 선종의 전통에 따르면 선불교의 시작은 부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부처님이 한때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을 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꽃 한 송이를 청중들에게 보였습다.(주1) 청중 중에 오로지 마하카샤파摩訶迦葉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부처님은 그 꽃을 그에게 주면서 “이것으로 올바른 진리의 눈[正法眼藏]”을 그대에게 맡기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꽃을 들어 청중에게 보였다는 염화시중拈花示衆이나 꽃을 드니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拈花微笑라는 고사성어가 나왔습니다.

 

사진 2. 대중에게 연꽃을 들어 보이는 석가모니 부처님. 공주 마곡사 석가모니불괘불탱.

 

이렇게 ‘말 없는 가르침’으로서의 선이 시작되어 계속 내려오다가 제28대조 보디다르마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인도 남쪽 어느 왕국의 셋째 왕자였는데, 중국으로 가라는 자기 스승의 명을 받들고 중국을 향해 동쪽으로 왔습니다. 여기서 유명한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如何是祖師西來意]’이라는 화두가 생겼습니다.

중국에 온 달마대사는 지금의 남경에서 양나라 무제武帝를 만났습니다. 양무제는 불교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공로를 자랑삼아 달마대사에게 물었습니다.

 

사진 3. 김명국의 달마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짐은 왕위에 오른 후 절도 많이 짓고, 불상도 많이 세우고, 불경도 많이 필사하고, 스님들도 많이 도왔는데, 이런 일에 어떤 공덕이 있겠소?”

달마대사는 ‘무공덕’이라는 한마디 말로 그의 말을 일축하고 말았습니다. 양무제는 놀라면서 왜 그 일이 헛된 일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달마대사는 그런 일은 이른바 ‘유루공덕有漏功德으로 완전한 해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세속적 이익을 위한 자기중심적인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행위란 공적空寂한 것으로, 결국 최고의 목표는 ‘넓고 텅 비어 거룩이고 뭐고가 없는 상태’,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고 했습니다.

 

사진 4. 달마대사가 9년 면벽했다는 소림사 달마동.

 

아무튼 이런 만남이 역사적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이 이야기는 무제가 가지고 있던 선행중심주의 혹은 율법주의적 종교관을 넘어서서 어디까지나 깨달음을 중요시하는 것이 선불교의 기본 자세라는 것을 말해주기에 충분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이 만남에 실망한 후 양자강을 건너가 숭산崇山의 소림사少林寺로 들어가 암벽을 마주 보고 앉아 9년간 참선에만 정진하였습니다. 이른바 면벽面壁 9년입니다. 

 

기독교의 경우?

 

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자연히 요즘 한국이나 이민 교회에서 성공했다는 목사들이나 전도자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들도 그리스도교의 바울 선생에게 무제와 비슷한 질문을 했다고 하면 바울 선생을 무슨 대답을 했을까 자못 궁금해집니다. 가령 이들이 “바울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그 열렬한 전도열을 본받아 그동안 몇 안되는 교인들로 시작해서 천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켰고, 교회 건물도 으리으리하게 짓고, 여러 곳에 지교회도 설립하고, 전국으로 순회설교도 하고, 미디어를 통해 방송도 하고, 해외에 선교사도 파송하고, 이북 같은 곳에 성서도 보내고… 바울 선생님,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런 질문에 바울 선생은 어떤 대답을 할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외적인 성취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갈라디아서 6:14,15 참조)

 

무언지교無言之敎

 

다시 달마대사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달마대사는 소림사에 머문 지 9년이 되어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불러 그들이 깨달은 바를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한 제자가 나와서 “진리란 긍정과 부정을 넘어서는 경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고 했습니다. 달마대사는 그를 보고 “너는 내 살갗을 얻었구나.” 하고 말했습니다.

 

그다음 제자도 나서서 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달마대사는 그를 향해 “너는 내 살을 얻었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다음 제자가 나서서 또 뭐라고 하니 달마대사가 그를 향해 “너는 내 뼈를 얻었구나.”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혜가慧可(487~593)가 나왔습니다. 그는 달마대사에게 경건하게 절을 한 다음 가만히 서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달마대사는 그를 향해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구나.”라고 했습니다. 혜가는 달마대사를 이어 제2조가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기독교 외경에는 속하지 못한 『도마복음서』 제13절에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기를 누구와 같은지 말해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당신은 의로운 사자使者와 같습니다.”고 하고, 마태는 “당신은 지혜로운 철인과 같습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마가 나서서 “선생님, 제 입으로는 선생님이 누구와 같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침묵하는 도마를 향해 예수께서 “나는 자네의 선생이 아닐세. 자네는 내게서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취했네.”라고 하고는 도마를 데리고 물러가셔서 그에게 세 가지 비밀의 말씀을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사진 5. 도마복음 파피루스.

 

달마대사가 혜가의 침묵을 가장 높이 산 것이나, 예수님이 도마의 침묵을 특별하게 본 것은 절대적 진리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침묵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유마거사도, 예수님도(주2) 진리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처럼 여러 종교에서 절대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도덕경』 제1장에 “도를 도라고 말해 버리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고 하는 말이나 제56장에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고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달마대사는 선불교의 기본 정신을 표현하는 네 가지 명구를 남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에 얽매이지 말라. 2) 교외별전敎外別傳: 경전을 떠나 별도로 전해진다. 3) 직지인심直指人心: 사람의 마음에 직접 다가가라. 4) 견성성불見性成佛: 본성을 보면 깨달음에 이른다.

 

이 네 가지 명구를 관통하는 요지를 들여다보면 선불교의 기본 목표가 문자나 교리나 의례 같은 것에 매달려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고 아니라고 하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문자나 교리나 의례 같은 것은 깨달음을 얻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標月指]이지 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달을 보는 것,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거룩한 것이고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없애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부처님이나 조사들이라도 깨달음을 얻는 데 방해가 된다면 주저 없이 죽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것입니다. 이 네 개의 명구가 달마대사 자신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하더라도 달마대사를 초조로 받드는 중국 선불교 전통의 기본 정신을 잘 나타내는 말임에 틀림이 없다 하겠습니다.

 

<각주> 

(주1) 저도 2015년 인도 방문시 이 산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주2) 예수님은 체포되어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갔을 때,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대답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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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서울대학교 종교학 석사,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교 종교학과에서 ‘화엄 법계연기에 대한 연구’로 Ph.D. 학위취득.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 명예교수. 저서로는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도덕경』, 『장자』, 『세계종교 둘러보기』,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종교란 무엇인가』, 『예수는 없다』,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살아계신 예수의 비밀의 말씀』, 『오강남의 생각』 등. 번역서로는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예수』, 『예수의 기도』, 『예언자』 등.
soft10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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