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도선! 동리산문의 선승인가 풍수도참의 비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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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 2024 년 8 월 [통권 제136호] / / 작성일24-08-05 09:13 / 조회891회 / 댓글0건본문
한국선 이야기 8 | 남종선 전래와 나말여초 구산선문의 형성 ⑥
‘풍수도참사상과 선사상의 상관성 여부’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무어라 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선각국사先覺國師 도선道詵(827~898)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도선에게 운명의 딱지처럼 따라다니는 ‘풍수설의 대가’니 ‘풍수도참의 비조鼻祖’니 ‘비기秘記의 원조’니 하는 수식어들은 그가 동리산문의 대표적인 선승禪僧이었다는 사실을 가리기에 충분하다.
전라남도 곡성군 태안사를 중심으로 한 동리산문의 개산조 혜철慧徹(885~861)은 도의와 홍척과 더불어 마조도일의 제자인 서당지장으로부터 인가받아 왔다. 따라서 혜철로부터 인가받은 도선은 마조의 정맥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도선에게서 풍수도참사상이 출현한 것이다. ‘이점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난제를 해결하는 것은 나말여초의 선사상에 접근하기 위한 또 하나의 관문이다.
동리산문과 도선
1925년 육당 최남선은 태안사를 방문하여 “신라 이래의 이름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 있어 선종의 절로는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古初의 신역神域 같다.”라고 극찬했다. 해동에 있어 선종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라는 말은 옳지 않지만, 태고의 신비롭고 신성한 구역이라는 말은 태안사의 인상을 제대로 묘사한 말이다.
희양산문 봉암사와 더불어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 바로 태안사이다. 혜철의 비문을 찬한 최하崔賀는 혜철이 동리산문을 개산할 당시 태안사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곡성군 동남쪽에 산이 있어 ‘동리桐裏’라 하였고, 이 가운데 작은 절이 있어 ‘대안大安’이라 이름하였다. 그 절은 수많은 봉우리가 가리어 비치고 하나의 물줄기가 맑게 흐르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들이 오는 일이 드물고 경계가 그윽하고 깊어 승려들이 머물기에 고요하였다. 용신龍神이 상서로움과 신이함을 드러내고 독충과 뱀이 그 독을 감추며, 소나무 그림자가 어둡고 구름은 깊어서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였으니 바로 삼한三韓에서 뛰어난 절경이었다.(주1)
곡성 태안사는 분명 절경이다. 그래서 도선의 풍수도참사상이 그의 스승인 혜철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론하기도 한다. 그래서 위의 인용문은 혜철의 풍수적 안목을 입증하는 논거로 제시되곤 한다. 그런데 최하가 찬한 혜철의 비문 속에서 풍수나 도참사상의 단서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필자는 풍수도참사상이 혜철의 영향과는 무관한 도선의 독자적인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혜철은 814년(헌덕왕 6)에 당나라로 가서 서당지장의 선법을 이어받고 839년에 귀국한 뒤, 태안사를 중심으로 크게 교화하여 도선道詵, □여□如등 수백 명의 제자를 배출함으로써 동리산을 중심으로 구례, 광양, 운암 일대에 걸쳐 새로운 선문을 이루게 되었다. 혜철의 선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여선사는 태안사에 있으면서 선법을 펴다가 제자 윤다允多에게 선법을 전하였다. 윤다는 고려 태조의 존경과 귀의를 받으면서 동리산문의 선풍을 크게 떨쳤다. 도선의 비문을 찬한 최유청은 도선이 혜철로부터 선법을 이어받은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때(846년 20세) 혜철대사가 밀인密印을 서당지장 선사로부터 전해 받고 귀국하여 동리산(대안사)에서 개당 연설을 하니 법을 더 구하고자 하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스님(도선)도 그 선문에 옷을 공손히 추켜올리고 제자 되기를 청하였다. 대사(혜철)가 그의 총민함을 가상하게 여겨 지성으로써 제접하여 무릇 이른바 ‘말이 없는 말과 법이 없는 법[無說之說 無法之法]’을 허중虛中에서 주고받으니 그 깨달음이 확실하게 되었다.(주2)
도선은 □여선사와 더불어 혜철의 선법을 이어받았다. ‘무설지설 무법지법’이란 말은 남종선의 종지를 가리키는 말로써, 혜철의 비문을 쓴 최하가 서당지장에게서 혜철이 인가받는 장면을 묘사할 때도 등장하고 있다. 즉 최유청은 이 말을 통하여 도선이 서당지장과 적인혜철로 이어지는 마조선의 계승자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혜철과 도선의 공통점은 모두 화엄에 밝았다는 점이다. 혜철은 15세의 나이에 부석사로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웠는데, 그에 대한 이해력이 출중하여 ‘불교계의 안자顔子’로 불렸다. 도선 역시 15세에 월유산 화엄사에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웠는데, 귀신같이 그 내용을 이해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즉 젊은 나이에 화엄사상에 심취했다가 그 한계를 느끼고 선사상으로 전향했다는 점이 혜철과 도선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혜철이 ‘도선의 총민함을 가상하게 여겼다는 점’ 또한 화엄을 염두에 둔 말로 보인다.
도선이 혜철의 문하에 있었던 기간은 846년부터 849년까지 고작 3년이었고, 23세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이후 도선은 독자적인 길에 들어선다. 이 시기 당나라 무종에 의한 회창법난이 일어났고, 846년 해상왕 장보고가 염장에 의하여 피살되기도 하였다. 견훤과 궁예 등이 등장한 것은 이로부터 50년 정도 이후의 일이니, 도선이 신라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꿈꾸면서 풍수도참사상을 창안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신화의 베일 밖 도선의 진면목
월출산 도갑사에 있는 「도선 수미 양대사 비문」은 조선 초 문장가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것이고, 옥룡사에 있는 비문는 고려 문신 최유청崔惟淸이 지은 것이다. 도선의 저술로 『정감록鄭鑑錄』 또는 『도선밀기道詵密記』가 있다고 하나 모두 후인이 도선의 이름을 가탁하여 지은 것이고, 그 외에도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도선실기道詵實記』, 『도선시당기道詵詩堂記』가 있다고 하나 역시 도선의 진찬은 아니다.
일설에 의하면 도선은 당나라로 유학 가서 밀교 승려 일행一行으로부터 풍수설을 배워 왔다고 전한다. 이경석 또한 “중국의 천자가 도선을 국사로 책봉하여 존경하였으며, 일행선사도 도선이 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찬탄하였다.”(주3)라고 말했다. 그런데 일행은 당나라 초기의 승려이고 도선의 생몰년은 당나라 말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연대에 모순이 있고, 도선이 당나라에 유학하였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다. 이러한 점 때문에 혹자는 도선이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이 아니라 가공의 신화적 존재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비록 고려 왕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도선이 신화화되었지만, 이는 그만큼 민중들 속에서 도선의 영향력이 지대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도선이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서였다. 875년(헌강왕 1)에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왕건이 태어났다고 한다. 물론 도선이 왕건의 아버지인 왕융을 정말로 만났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태조 왕건이 도선의 풍수도참사상과 비보사탑설을 신봉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943년 박술희를 불러 전한 <훈요십조> 가운데 제2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모든 사원들은 모두 도선의 의견에 의하여 산천의 순역順逆을 가려서 창건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선정한 이외에 함부로 사원을 짓는다면 지덕地德을 훼손시켜 국운이 길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후세의 국왕·공후·후비·대관들이 각기 원당願堂이라는 명칭으로 더 많은 사원을 증축할 것이니, 이것이 크게 근심되는 바이다. 신라 말기에 사원들을 야단스럽게 세워서 지덕을 훼손시켰고 결국은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주4)
892년(효공왕 2)에 도선이 열반에 들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박인범朴仁範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으나, 끝내 돌에 새기지는 못했다. 이는 이 해에 견훤이 이 지역에 후백제를 세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옥룡사에 도선의 비가 다시 세워진 것은 고려에 들어서이다. 최유청은 비문에서 도선이 구례 화엄사 아래에 있는 사도촌에서 한 이인異人으로부터 풍수도참사상을 전해 받은 내력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 이인은 도선에게 “이것도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고 사람을 제도하는 법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도선은 혜철로부터 선법을 전해 받고 옥룡사에 자리를 잡기까지 15년 동안을 산천을 떠돌며 구도 행각을 이어 갔다. 그의 풍수도참사상은 이러한 구도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이니 대보살의 자비행이라 말할 수 있다. 땅을 생명체로 인정하고 문제가 있으면 고쳐서 활용한다는 생각은 도선 풍수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는 풍수 전문가가 지적하듯이 무엇보다도 지구가 앓고 있는 병을 도선의 경험과 실천에서 나온 혜안으로 치유하고자 한 도선 풍수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비보사탑裨補寺塔’을 전국 각지에 세우는 실천행으로 옮겨졌다. ‘비보裨補’란 병이 든 땅에 지기地氣를 보완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비보사탑설’이란 이런 곳에 절과 탑을 세워 땅의 기운을 북돋우고 결국은 사람이 편히 살 수 있는 땅으로 바꾼다는 대단히 적극적인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백계산 옥룡사 주석과 도선의 선풍
도선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선풍을 드날린 것은 광양 백계산 옥룡사에 머물면서부터이다. 857년(헌안왕 1)에 옥룡사에 머물기 시작한 도선은 864년(경문왕 4)에 옥룡사를 창건하였고 892년 열반에 들기까지 35년간을 옥룡사에 머물렀다. 이 시기 도선은 미우사, 도선사, 삼국사, 운암사 등을 창건하였으며, 수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김두진과 추만호 등은 동리산문을 혜철이 태안사에서 개산한 산문이라고 정의하고, 다시 ‘혜철→□여→윤다’의 ‘대안사계(파)’와 ‘혜철→도선→경보’의 ‘옥룡사계(파)’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도선이 옥룡사에서 혜철의 선사상을 펼쳤는지 아니면 풍수도참사상을 전수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도선의 사후 옥룡사는 견훤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왕건이 적극적으로 도선의 비보사탑설을 강조한 데에는 후백제 민중들의 민심을 돌리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고려시대 이후 왜곡과 조작으로 일관되어 온 도선의 행적에 대한 기록과 설화들에서 그의 참다운 선사상을 캐내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선사상의 측면에서 보면 혜철과 도선 그리고 도선과 경보 사이에는 분명 불연속의 지점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현종은 도선을 대선사로 추증하였고, 숙종은 왕사로 또 인종은 선각국사로 추증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도선이 위대한 고승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선이 주창한 풍수도참사상 또한 그가 깨달은 선의 경지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화엄과 선사상에 밝았던 도선이 꿈꾸었던 세상(풍수)은 병(육체적 정신적 병 모두) 없이 살아갈 수 있는 포근한 삶의 터전이었고, 그가 말한 명당은 불국토의 다른 이름은 아니었을까.
<각주>
(주1) 최하 찬, 「곡성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문」 (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문고, 1994, 88쪽).
(주2) 최유청 찬, 「백계산 옥룡사 증시선각국사 비명병서」.(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3』, 423∼424쪽). “于時 惠徹大師 傳密印於西堂智藏禪師 開堂演說於桐裏山 求益者多歸之. 師迺摳衣禪門 請爲弟子. 大師嘉其聰敏 接以至誠 凡所謂無說之說無法之法 虛中授受 廓爾超悟.”
(주3) 이경석 찬,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 비문」(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 1』, 424-425쪽).
(주4) 이능화 편, 『역주 조선불교통사 1』(5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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