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일본 조동종 교단의 내부 분열과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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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 2024 년 8 월 [통권 제136호] / / 작성일24-08-05 09:03 / 조회651회 / 댓글0건본문
일본선 이야기 8 |
종교는 분열을 먹고 자란다. 조동종의 분열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발단은 도겐의 사후, 고운 에조孤雲懐奘(1198∼1280)의 뒤를 이어 영평사 3대 주지를 맡은 뎃츠 기카이徹通義介(1219∼1309)를 둘러싸면서 일어났다. 1272년 기카이가 퇴위한 뒤에 다시 에조가 주지에 취임했다. 1280년 그가 열반하자 기카이는 영평사 산록에 지은 양모당養母堂에서 노모를 모시며 사찰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이시카와현 남부에 대승사大乘寺를 개당했다.
반세기 동안 이어진 삼대상론과 분파
그 사이 기엔義演(?∼1314)이 4대 주지가 되었다. 기카이와 기엔은 에조의 문하에 속했지만 둘의 사후 각각의 제자들이 서로 영평사 3대를 주장하고 위패를 만들어 조사당에 모시고자 했다. 결국 양쪽 다 전주前住로 받들기로 하고 논쟁은 가라앉았다. 이를 삼대상론三代相論이라고 한다.
이러한 논쟁이 반세기 동안 이어지는 가운데 분파가 형성되었다. 논쟁의 핵심은 교단 운영의 견해 차이에 있었다. 어느 종파든 종조 사후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다반사다. 애초에 기카이의 3대 주지 취임에 반대한 측에서는 그가 도겐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고 있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에조의 권유로 송나라의 5산 선찰을 견학하고 왔으며 이를 기반으로 영평사를 일신했다. 그리고 당시 몽고의 침입을 우려한 막부가 모든 사원에 진호국가의 역할을 요구하여 영평사도 어쩔 수 없이 기도작법을 시행했다. 이러한 행보는 순선純禪을 주장한 도겐의 사상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일련의 역사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인물들의 면면과 활동 상황을 통해 파악해 보고자 한다. 먼저 에조는 달마종의 승려였지만 도겐 문하에 들어와 오로지 그의 사상을 정리하는 데에 일생을 바쳤다. 도겐이 평생 전개한 철학인 『정법안장正法眼蔵』과 『영평광록永平廣錄』, 남송에서 수행한 기록인 『보경기寶慶記』를 서사했다.
에조는 “자기 자신의 불심은 무명을 타파하고 진여의 광명을 수장하고 있다.”는 내용의 『광명장삼매光明蔵三昧』의 저술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도겐을 모시며 받든 생생한 언어를 기록한 『정법안장수문기正法眼蔵随聞記』를 기록했다. 도겐의 사상은 물론 당시 중국과 일본 선종계의 상황, 나아가 당시 도겐 교단의 생생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서적이 되었다. 또한 에조가 수행 과정에서 생긴 질문에 도겐이 친절하게 가르침을 주는 이야기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에조는 “좌선 수행을 하면서 선어록이나 공안을 읽으면 백천의 하나쯤은 회득會得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좌선에는 그런 정도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좌선을 즐겨 행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도겐은 “공안이나 조사의 일화를 읽고 조금 알 것 같아도 그것은 오히려 불조가 되는 길로부터 멀어지는 인연이 된다. 얻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이 바르게 좌선하며 시간을 보내면, 그것이 그대로 불조의 길이 될 것이다. 옛사람도 어록을 보는 것과 일관되게 좌선하는 것을 함께 권하고 있지만, 역시 좌선을 특히 권면했던 것이다. 또한 조사의 일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은 좌선의 효과에 의해 깨달음이 열린 인연이 된 것이다. 실질적인 효과는 좌선에 있다.”고 설한다. 이는 후대에 교단이 임제종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질 것인가라는 문제에도 중요한 시금석이 되는 법어이기도 하다.
지관타좌라는 도겐의 정신을 지킨 에조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에조는 18살에 천태종 승려가 되었다. 정토종에서도 공부하고, 26세에 달마종을 연 다이니치 노닌大日能忍의 제자인 붓치 가쿠안佛地覺晏 문하에 입참, 『수능엄경』의 ‘빈가병유頻伽缾喩, 즉 빈가병의 두 구멍을 막고 가운데 허공을 가득히 채워 멀리 천리나 되는 다른 나라에 가서 사용한다는 비유로 성품을 설명한 것’를 투과하여 인가받았다. 이후 구불교의 탄압을 받아 피난을 가기도 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도겐을 만나 법거량을 하는 중 건인사에 주석 중이던 도겐의 견처가 매우 뛰어남을 알고 2년 연하이지만 사사하기를 원했다. 이후 가쿠안이 입멸하자 달마종의 문인들과 함께 도겐 문하에 들어왔다. 흥성사의 수좌로서 도겐의 신변을 떠나지 않으며 가르침을 기록했다. 1236년 39세 때, 흥성사에서 “일호중혈一毫衆穴을 꿰뚫는다.”는 도겐의 법어를 듣고 대오하여 인가받았다.(『전광록傳光録』).
영평사의 주지로 있을 당시에는 도겐의 유풍을 지키고자 하는 보수파와 도겐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법요 의식을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개혁파가 대립했다. 후자에는 달마종에서 온 승려들이 주류를 이뤘다. 에조는 이러한 대립을 융합하고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했다. 도겐의 시자로서 그의 영묘 옆에 거실을 마련, 생전에 모시던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열반 뒤에도 도겐의 시자 위치에 묻어줄 것을 유언하고, 자신을 위한 사후 법요도 폐하고 8일간의 도겐의 법요 중 하루를 자신을 위해 회향하도록 유언했다. 오직 한결같이 도겐의 분신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에조 때부터 발생한 양 파의 대립은 기카이에 이르러 더욱 격화되었다. 그는 달마종의 3조인 에칸懐鑑 문하에서 수학하고, 19세에 천태종에서 수계했다. 1241년에 에칸과 함께 도겐에게 귀의했다. 영평사에서 전좌典座, 감사監寺 직책을 맡았다. 도겐 사후에는 에조에게 사사했다. 중국 답방을 한 후, 중국의 청규, 어록, 경록 등을 가지고 귀국했다. 이를 통해 영평사의 의식과 규칙 등을 정비했다.
그런데 기카이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달마종의 개창자 노닌이 두 제자를 송나라에 보내 임제종 양기파인 대혜종고의 법을 이은 졸암덕광으로부터 인가받은 사실과 에칸의 계승자로서 도겐의 법맥을 이은 것은 동제洞濟 두 집안을 겸하는 것에 다름이 없다고 보았다. 실제로 기카이는 양쪽에서 받은 법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승사 문서』) 이는 조동종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삼대상론은 이처럼 중국 선종의 원류에까지 소급되는 일이자 가풍의 문제이기도 했다. 후에 달마종의 색은 퇴색되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순선의 시대를 연 달마종계와 조동종계가 합일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도겐선의 변질를 초래한 기카이의 개혁
그럼에도 여기에는 도겐의 사상을 견지하려는 세력과 자파의 세속적인 발전을 원하는 세력 간의 대결이 있었다. 당시 영평사에 영향력을 행사한 신도는 가나가와현의 호족인 하타 노시波多野氏였다. 무사로서 왕이 주재하는 조정 내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었다. 이 호족은 당연히 후자를 원했다. 기카이에 대해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켜 줄 적임자로 보았다.
영평사의 재정을 책임진 기카이는 당연히 세속과의 거래도 고려해야 했다. 그가 본사에 돌아와서 생각한 것은 첫째는 산문, 별채, 불전 등 가람의 정비와 확충, 둘째는 토지신 등의 호법신 조영, 죽파풍경粥罷諷經, 즉 공양을 끝내고 경을 읊는 것, 그리고 밀교사상 의례의 도입을 위한 규정의 개정이었다.(『삼조행업기의개전三祖行業記義介傳』).
그는 도겐이 일반 민중을 위한 방편으로 행했던 용신龍神이나 관음보살에 대한 기도만이 아니라 16선신을 향한 기도도 도입했다. 그런데 도겐은 『정법안장수문기』에서 “지금의 사람들은 많은 불상을 만들고 탑을 쌓는 일을 불법 흥륭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 (중략) 초암이나 나무 아래에서라도 법문 일구를 사량하고 한때의 좌선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불법 흥륭이다.”라고 설한다.
또한 그는 수행에 들어가서는 분향, 예배, 염불, 참회, 간경을 하지 않고, 오직 타좌打坐하여 심신탈락을 얻도록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순수한 도겐선을 지키기 위해 에조의 제자들인 자쿠엔寂圓, 젠에詮慧는 영평사를 나와 각각 보경사寶慶寺와 영흥사永興寺를 창건하고 그곳에서 활동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영평사 4대 주지가 된 기엔은 전자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도 또한 달마종의 에칸 문하에 출가했다. 도겐의 사후 에조에게 사사했다. 기카이에게 반대한 세력의 추대에 의해 4대 주지가 되었다. 그러나 하타 노시 등의 사찰 외호자들로부터는 멀어졌다. 대중의 지지도 받지 못하여 결국 보은사報恩寺에 은거하게 되었다. 이후 영평사는 무주無住의 상태로 황폐하게 되었다. 마침내 자쿠엔의 제자인 기운義雲(1253∼1333)이 1314년 5대 주지가 되어 도겐의 순수선풍을 진작하여 교세를 확장했다. 자쿠엔은 천동여정의 제자로 법형인 도겐을 따라 일본에 온 조동종의 선사다.
『정법안장』을 편집한 영평의 중흥조 기운
기운에 대해 교단은 영평 중흥의 조祖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 임제종은 중국 승려들의 일본 상륙, 일본 승려들의 중국 유학 등으로 양국의 거래가 활발하고, 더구나 왕실이나 무사들의 비호를 받아 장족의 발전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는 임제종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하는 동시에 도겐이 극력 부정한 견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동제洞濟 융화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임제의 어록을 인용하면서 참된 출가를 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기운을 오해하여 후대에 중국의 승려로 보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다. 특기할 것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일본 조동종의 권위 회복과 교법의 증명을 구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또한 평생 총림을 벗어나지 않는 수행자의 면모를 굳게 지키며, 도겐의 지관타좌, 심신탈락의 가르침을 확고하게 수립했다. 『정법안장』 60권을 편집하여 수행의 핵심 텍스트로 활용하며 도겐의 사상을 보다 깊이 있게 발전시키기도 했다. 임제종 우위의 풍조 속에서 자파의 정체성 유지에 기운이 고민한 흔적을 역력히 볼 수 있다.
조동종이 독자성을 유지, 발전하면서 기카이와 기엔 중 누군가를 영평사 3대로 할 것인가에 대한 제자들의 논쟁은 막을 내렸다. 보수파와 개혁파의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삼대상론을 거치면서 기카이가 대승사로 옮긴 후 제자들도 따라오면서 비로소 교단의 분열이 현실화되었다. 도겐의 법손은 후쿠이현의 영평사와 이시카와현의 대승사로 나눠지게 되었다. 마침내 대승사의 2대 주지인 케이잔 조킨瑩山紹瑾이 나와 조동종의 전국적인 부흥이 이뤄지게 되었다. 1321년 이시카와현의 율사 조켄定賢은 자신이 주지로 있는 제옥관음당諸嶽觀音堂을 조킨에게 기증했다. 이곳이 바로 영평사와 더불어 양대 본산인 총지사(總持寺, 1911년 가나가와 현으로 이전)가 되었다. 교단에서는 도겐은 고조로 조킨은 태조로 부르고 있다.
역사는 앞에서 볼 때 미래를 알 수가 없다. 결과를 놓고 퇴보와 발전을 언급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때로 논쟁은 새로운 인물을 탄생시켜 교단이 도약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무한한 생명력을 지닌 불법의 조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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