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왕실 수륙재의 설행과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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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4 년 7 월 [통권 제135호] / / 작성일24-07-05 09:06 / 조회939회 / 댓글0건본문
불교 교리에 의하면 중생은 생유生有·본유本有·사유死有·중유中有의 네 기간을 거치며 윤회한다고 한다. 중생이 사망한 ‘사유’와 다른 세계에 태어나는 ‘생유’의 사이에 있는 ‘중유’의 기간이 49일이어서 그 칠칠일 동안 망자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천도의식이 칠칠재이다. 그 칠칠재를 지금은 흔히 사십구재라고 부른다.
중생의 천도를 위해 시행된 고려시대의 수륙재
우리나라에 망자를 위한 사십구재가 정착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가장 빠른 기록은 고려 공민왕대에 이달충李達衷이 찬술한 「김제학천처칠칠소金提學薦妻七七疏」이다. 이 글을 통해 고려 말 불교 상례喪禮에서 사십구재가 설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칠칠재에서 설행하는 대표적인 천도의식 형태로 수륙재가 있다. 법당 앞마당에 대형 괘불을 내걸고 그 앞에 무대를 설치하여 거행하였는데, 이와 관련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확인된다. 고려 고종대에 활동했던 천태종의 진정국사 천책이 「수륙재소水陸齋疏」를 남기고 있다.
처음에는 백련도량에서 행하고 다음은 만연정사에서 행하였습니다. 세 번이어야 완전히 갖추어지므로 익숙하게 준비하여 다시 조계산에서 설행하였습니다. 하나로 꿰뚫듯이 의식은 모두 불경을 따랐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펄펄 끓는 고통스런 지옥 중생, 물어뜯는 축생, 어두운 곳의 귀신들, 인간계와 천상계의 귀하고 천한 이들, 네 발이나 여러 발 달린 중생, 형체 있거나 형체 없는 중생 모두 적멸의 근원을 알고 함께 영원한 열반의 덕을 증득하게 하소서. - 『고려사』 선종 7년, 1090년 1월 26일.
위 글을 통해 수륙재는 세 번에 걸쳐 진행되었고, 윤회하는 모든 중생의 천도를 위해 설행하는 불공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수륙재의 방법과 절차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기 어렵지만 경전에 의거하여 거행했다고 하였으므로 아마도 고려 선종대에 최사겸이 가져왔다고 하는 『수륙의문』에 따라 설행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왕실의 상례에서도 확인된다. 1365년(공민왕 10)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나옹혜근이 국행수륙재를 주관하고 설법한 내용이 「국행수륙재기시육도보설國行水陸齋起始六道普說」에 실려 있는데, 이것이 칠칠재로서 수륙재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수륙재가 7일마다 열려 매번 승려들이 범패를 부르고 채색 비단이 사찰을 뒤덮으며 꽹과리와 북소리가 울렸다고 하였다.
고려 왕시의 원혼을 달래는 조선 초기의 수륙재
조선시대 수륙재는 고려 말 수륙재를 계승하였으며 크게 두 가지 형태로 행해졌다. 하나는 머물 곳 없는 외로운 영혼인 무주고혼無住孤魂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한 천도재로서 행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손들이 망자亡者를 위해 설행하는 칠칠재·백일재·소상재·대상재 등의 천도재로서 행해진 것이다.
먼저 무주고혼을 위한 수륙재는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그 아들들을 비롯한 왕씨들을 천도하기 위해 처음 개설되었다. 태조는 재위 3년(1394)에 삼척, 강화도, 거제에 나뉘어 수용되어 있던 왕씨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왕씨의 자손들을 수색하여 처형하고, 그 이듬해인 태조 4년(1395) 2월에 삼척 삼화사, 개경 관음굴, 그리고 거창 견암사에서 국행수륙재를 설행하였고, 매년 봄가을로 왕씨들을 위한 수륙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권근은 「수륙의문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하께서) 금으로 『법화경』 세 부를 필사하시고 특별히 내전에서 친히 전독하셨으며, 또 『수륙의문』 21책을 인쇄하셨다. 무차평등대회를 세 곳에서 설행하게 하도록 하시고, 각각 『법화경』 1부와 『수륙의문』 7책을 영원히 그곳에 보관하게 하고 그에 따라 (수륙재를) 거행하도록 하셨다. 한 곳은 천마산 관음굴로 강화도에 있던 왕씨들을 천도하기 위함이고, 한 곳은 아무 고을 아무 산으로 삼척에 있던 왕씨를 위함이며, 한 곳은 아무 고을 아무산으로 거제에 있던 왕씨를 위함이다. - 『양촌집』 권22.
태조는 『법화경』을 금으로 사경하고 세 곳에서 수륙재를 설행하도록 하였다. 세 곳에서 수륙재를 거행한 것은 왕씨가 강화도와 삼척과 거제에 나누어 유배 보냈다가 처형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고려 고종대 진정국사 천책이 세 곳에서 수륙재를 개설했던 전례도 참고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설행되었던 수륙재의 소문 중에서 삼화사와 관음굴의 소문은 권근에게 쓰도록 하고, 현암사의 소문은 정총에게 맡겼다.
<삼화사행수륙재소>
새 국가에서는 가벼운 벌로 전 왕조의 후손들을 보전하고자 하여 여러 지방으로 나누어 보내 가업을 경영하도록 하였으니, 어찌 고려의 후손들이 변란을 일으켜서 용납하기 어려운 큰 벌을 받게 될 줄 알았겠습니까? 이미 그들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어 오직 천도시키기에 힘써서 일찍이 그들을 위해 『법화경』을 만들었고, 또 매년 수륙재 의식을 베풀도록 하였습니다. … 부처님의 방편력으로 영원히 원한을 풀고,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노닐며, 청량의 극락세계에 태어나 오묘한 깨달음의 과보를 원만히 이루게 하소서. - 『양촌집』 권 27.
<관음굴행수륙재소>
이미 고려 왕족들과 함께 살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극락에 왕생하도록 천도하고자 하여 금자로 『법화경』을 사경하였으며, 매년 10월에 수륙재를 베풀도록 하였습니다. 이 주선한 것을 부처님께서 밝게 살펴주소서. 엎드려 원하건대, 왕씨의 영혼이 모두 원한을 풀고 환희심을 내어 길이 윤회의 길을 벗어나고, 번뇌세계를 벗어나 극락세계로 왕생하여 무생법인을 깨달으소서. - 『양촌집』 권28.
<현암사행수륙재소>
왕씨는 죽어서 비록 천명이 이미 가버렸지만 내 마음은 처량하여 그들의 명복의 자량이 되고자 하였다. 이에 공인에게 명하여 금니로 『법화경』을 필사하고 청정한 사찰에 특별히 평등의 재를 설행하도록 하였다. … 엎드려 바라건대, 고려의 왕씨 등은 모든 부처님의 가피력과 여러 하늘신의 보호를 받아서 삼악도의 비루한 곳을 영원히 떠나 구품연화대에 모두 오르소서. - 『복재집』 권하.
태조는 재위 3년(1394)에 삼척, 강화도, 거제 및 여러 지방에 나뉘어 수용되어 있던 고려 왕족들을 처형하였지만, 그 이듬해인 태조 4년(1395) 2월에 삼척 삼화사, 개경 관음굴, 거창 현암사에서 매년 봄가을로 왕씨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수륙재를 지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 왕족을 위한 수륙재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강원도의 수륙사인 상원사가 화재를 당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절의 수륙재는 고려 왕씨를 위한 것이다. 또 경상도의 현암사도 이미 화재를 입었으니 혁파하라.” 하였다.
- 『세종실록』 7년, 1425년 12월 19일.
삼화사의 수륙재는 얼마 후 상원사로 이전되었다가 화재를 이유로 폐지되었다. 이때 현암사 역시 화재를 이유로 폐지되었으며, 관음굴의 수륙재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지만 함께 폐지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조선 왕실에서는 고려 왕족이 계속 대중의 기억에 소환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무주고혼의 천도와 왕실의 상례로써 수륙재
이 외에도 무주고혼을 위한 수륙재가 한강변이나 북한산 진관사 등지에서 자주 설행되었다. 진관사에서는 태조에 의해 수륙사水陸社가 설치되고 공사가 끝나자 임금이 직접 행차하기도 하였고, 세종대에는 효령대군이 한강변에서 7일간 수륙재를 설행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망자를 위한 칠칠재로서 수륙재는 태종비인 원경왕후 국상 이후에 기존의 사십구재가 수륙재로 정착되어 연산군대 인수대비의 상례까지 이어졌다. 조선 건국 후 첫 국상은 태조의 정비인 신덕왕후의 상이었다. 당시는 아직 국상에 대한 예제가 정비되기 전이므로 고려의 전례에 따라 불교적으로 상례가 치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태조가 승하하자 『주자가례』에 의하여 상례를 치르도록 공표하였지만 실제로는 사십구재·백일재·법석法席과 재齋를 함께 설행하였다. 또한 정종의 원비 정안왕후와 정종의 사십구재에서도 법석과 재를 함께 설행하였다. 승하 후 5일간 법석을 벌이고 7일이 되는 날 초재를 지내며, 회향 후 다시 5일간 법석을 벌이고 두 번째 7일이 되는 날 2재를 지내는 방식으로 일곱 번의 7재를 치렀던 것이다. 이때 49일간 지속된 법석과 재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고 매우 번거로웠기 때문에 국상의 간소화에 대한 요구가 제기되었던 것 같다. 결국 세종 2년(1420) 태종비 원경왕후의 국상부터는 법석을 폐지하고 7일째의 재만 설행하였는데, 그 재의 형식이 수륙재였다. 원경왕후의 상례에 대해 예조에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지금 국가에서 시행하는 칠칠재는 다 수륙재와 같이 법으로 정하였으니, 돌아가신 선왕과 선후의 기신재도 역시 산수가 정결한 곳에서 수륙재로 하는 법을 거행케 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 『세종실록』 2년, 1420년 10월 1일.
원경왕후 국상 이후 왕실 상제례는 ‘법석을 배제한 수륙재’로 간략하게 거행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연산군대 성종 모후 인수대비 상례까지는 대체로 준수되었다. 실제로 세종은 “칠칠재와 선왕의 기일재에는 간략하게 수륙재를 베풀어서 전례를 폐하지 않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성종 국상의 초재일의 실록 기록에는 “이날 승지 송질을 보내어 장의사에서 수륙재를 설행하였다.”라고 하여 ‘초재’라 기록하지 않고 ‘수륙재’라고만 기록하였다. 즉 칠칠재·백일재·소상재·대상재 등에서 법석 등의 큰 행사는 생략되고 수륙재만 설행됨으로써 상제례가 간소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형태의 수륙재 중에서 왕실 의례에서 먼저 폐지된 것은 첫 번째의 무주고혼을 위한 수륙재였다. 무주고혼을 위한 수륙재는 유교 제례인 여제厲祭와 비슷한 의식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여제는 비명非命에 죽어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인 여귀厲鬼를 위해 거행하는 제사이므로 무주고혼을 위한 수륙재와 유사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미 태종도 “수륙재는 여제와 비슷하니, 추천追薦은 수륙재에 합하여 설행하라.”고 밝힌 바 있었다. 그러한 시점에 조정 대신들은 불교 의식인 수륙재의 폐지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세종 14년(1432) 집현전 부제학 설순 등이 수륙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지금 국가에서 오히려 기신忌辰 수륙재를 개설하니 신하와 서인들의 설재設齋를 금지할 수 없으며, 종문의 승선僧選의 법은 아직도 그 옛 제도를 따르고 있으니 승도僧徒로 출가出家하는 것을 중지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 『세종실록』 14년, 1432년 3월 5일.
위의 상소는 세종 14년 2월 한강에서 있었던 수륙재를 비판하며 폐지를 건의하였던 것이다. 여제가 무주고혼을 위한 수륙재와 그 의미가 비슷하다는 인식이 있었고, 이미 태종 4년(1404) 6월 『홍무예제』에 의거하여 전국 각지에 여단厲壇을 건립하고 ‘여제의厲祭儀’가 상정된 바 있었고, 세종 22년(1440)에는 예조에서 『여제의주厲祭儀註』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 그리고 단종 1년(1453)에는 수륙재를 대신하여 매년 봄가을에 여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여제가 설행되지는 못하고 성종대에 처음 여제가 설행되었다. 성종 16년(1485) 황해도 극성에서 『국조오례의』에 의거하여 여제를 올렸다. 이후 무주고혼을 위한 수륙재는 점차 여제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던 것 같다.
또한 수륙재가 여제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칠칠재로서 수륙재 역시 점차 유교적 의례로 변화되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태종비 원경왕후 사십구재부터 연산군대 인수대비까지 사십구재가 수륙재 형식으로 설행되었지만 그 이후 왕실의 상례는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행해졌다. 성종대에는 무주고혼을 위한 수륙재가 폐지되었고, 연산군대에는 칠칠재로서 수륙재가 사실상 폐지되었다. 이로써 궁궐 내 왕실의 불교 의례는 거의 사라지고, 지방의 원당 사찰로 이관되어 설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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