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열반을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로 보는 남·북방의 시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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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4 년 6 월 [통권 제134호] / / 작성일24-06-05 11:06 / 조회1,453회 / 댓글0건본문
붓다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은 열반에 대한 불교 내부의 상충하는 관점 앞에서 당황한다. 같은 이름으로 전혀 다른 두 목적지를 가리키는 사태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도대체 어느 목적지로 정해야 하나? 붓다의 가르침은 어느 목적지를 가리키는가? 두 목적지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길이 달라진다. 또 길에 해당하는 붓다 교설에 대한 이해가 갈라진다.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 무아 등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것이다. 어느 목적지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전부 달라진다. 열반이라는 하나의 명칭을 두고 서로 다른 두 목적지로 읽는 혼란은 가히 불교 전체의 내용을 뒤흔든다. 소름 돋는 중차대한 문제가 아닌가.
같은 이름의 목적지를 전혀 다른 곳으로 읽는 두 관점은, 학문 영역이나 구도 현장에서 모두 각자의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있다. 열반이나 궁극적 깨달음을 ‘불변·절대의 궁극실재 체득’으로 간주하는 관점이 혹 더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서도 <열반·깨달음은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를 체득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서 불편함을 넘어 불쾌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특히 교학이나 수행론에 대해 나름의 정리된 이해를 수립한 이들 가운데 그런 경우가 꽤 있을 것 같다.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 이론인 최초기의 교학에서부터 열반을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로 설명하는 관점이 범람한다. 붓다의 길은 후학들의 교학에 의해 일찍부터 교란되고 굴절된 측면이 있어 보인다. 니까야 이해의 교학적 정통성을 자부하는 남방 상좌부 불교, 붓다 교설에 대한 사상적 이해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북방 대승불교, 그리고 이 두 권역의 교학에 대한 현대 학자들의 이해에서 이러한 해석학적 혼란이 두루 목격된다.
흥미로운 것은, 남·북방 불교 모두가 교학 내부의 견해 차이들에 대해 이단異端 배타적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은 단점과 장점을 동시에 지닌다. 불교사상의 이해를 혼란스럽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불교 특유의 ‘차이를 보는 연기적 사유’의 표현이기도 하다. <모든 이해와 행위의 향상은 다른 것과의 대비 및 관계에서 생겨난다>라고 하는 연기적 사유가 은연중에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지혜와 자비’의 상호 관계도 이런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 다른 기회에 거론해 보겠다.
남방 상좌부 불교의 경우
붓다의 법설에 대한 이해를 이론적 체계로 수립하는 노력과 성과를 아비달마阿毘達磨(범어 Abhidharma, 팔리어 Abhidhamma)라고 부른다. ‘abhi’는 ‘∼에 대한’, ‘뛰어난, 더 높은’이라는 뜻을 지닌 접두사이고, ‘dharma’란 붓다의 가르침인 ‘법法’을 지칭한다. 따라서 아비달마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해석’ 혹은 ‘부처님 가르침의 뜻을 드러내는 뛰어난 해석’을 의미한다. 대장경을 구성하는 경장·율장·논장 가운데 논장은 이 아비달마의 성과물이다.
붓다 입멸 후 약 100년이 지나자, 초기의 교단은 교설이나 계율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인해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로 분열하고 다시 18개 내지 20개의 부파로 갈라진다. 이 시대의 불교를 아비달마불교 혹은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 부른다. 각 부파는 나름의 아비달마를 수립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좌부에 속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유부有部라고 약칭)의 아비달마는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붓다의 법설에 대한 유부의 해석은 남방불교 교학의 강력한 토대이며 현재까지도 남방의 불교 이해와 수행론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북방 대승교학은 유부의 이론에 대한 비판과 극복의 과정에서 수립되었고, 유식학은 유부가 펼친 ‘현상 분류법 체계’에 의거하면서도 차별화되는 교학을 수립하고 있다. 긍정적 방식이든 부정적 방식이든 간에, 유부의 아비달마는 불교의 남·북방 교학 형성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모든 존재 및 현상을 ‘5부류[位] 75가지[法]’로 분류하여 해석하는 유부의 불교 해석법은, 유부의 관점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불교 이해를 위한 문제의 유형과 범주를 설정하는 기본틀로 채택되곤 한다. 붓다와의 대화에 유익한 길 안내가 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탐구를 방해하는 결정적 장애물이기도 하다. 붓다와의 새로운 대화를 위해서는 5위75법 해석 체계의 유효성과 문제점을 원점에서부터 재성찰할 필요가 있다. 교학의 전통적 권위에 매이지 않는 열린 성찰의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5위75법 해석 체계의 토대가 되고 있는 ‘연기법에 대한 유부의 이해’는 비판적으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유부는 모든 ‘존재 및 현상[法]’을 ‘조건에 의해 형성되어 생멸 변화하는 시간적인 유위법有爲法’과 ‘조건에 의해 형성되지 않는 비시간적인 무위법無爲法’으로 양분한다. 아울러 모든 현상의 이면에 있으면서 현상을 생성·소멸시키는 ‘바탕 실체[基體]’이고 항상 존재하는 궁극실재[法體]를 설정한다. 그리고 ‘시간에 연루된 조건인과적[緣起的] 궁극실재’로서 72종의 유위법有爲法을 분류하는 동시에, ‘시간과 무관하며 조건인과적[緣起的] 존재가 아닌 궁극실재’로서 열반을 비롯한 3종의 무위법無爲法을 따로 분류한다. 그리하여 총 75종의 궁극실재를 설정하고 이에 의거하여 모든 것을 설명한다. 이 체계에서는 궁극실재[法體]를 ‘시간적·연기적으로 존재하면서 작용하는 유위법’과 ‘비非시간적이고 비非연기적으로 존재하는 무위법’으로 양분하는데, 불교의 궁극목표인 열반은 무위법에 배속된다. 열반은 ‘비非시간적이고 비非연기적인 독자적·항구적 궁극실재’라는 것이다.(주1)
만약 열반이 무시간적·독자적인 것이라면 인간의 열반 성취는 불가능하다. 열반은 ‘경험’이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경험 내용은 ‘관계 속에서 변하는 조건들의 차이 대비’에서 발생한다. 열반이 ‘자유롭고 안락한 좋은 경험’이라면 그것은 ‘속박되고 불쾌한 좋지 않은 경험’과의 대비 관계에서만 발생한다. 고통 경험과의 대비 관계를 한 범주 안에 품어야만 행복 경험이 가능한 것이다. ‘행복이 아닌 것들’을 모두 쫓아내고 삭제하면 행복도 설 자리가 없어진다.
아비달마 유부의 열반관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열반의 의미에 새롭게 접근해 보는 필자의 탐구도 유부의 열반관이 없다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유부의 관점에 대해 ‘비판’과 ‘고마움’을 함께 경험한다. 인간의 모든 이해와 사유 및 경험은 긍정적 방식이건 부정적 방식이건 ‘차이들과의 대비 및 관계 구조’ 안에서 발생한다. 세계의 성립과 전개 자체가 본래 그러하다.
모든 ‘대비 관계에서 발생하는 경험’은 예외 없이 ‘관계 속에서 변하는 조건들’에 연루되어 있다. 열반 경험은 시간적·관계적 조건들과 관련되어 있고, 시간적·관계적 구조에서 발생하기에 그 내용도 시간적·관계적이다. <시간적·관계적 조건과 구조에서의 열반 경험이 왜 최고 가치인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명하는 것이 구도자 학인의 과제다. 다행히 붓다는 해답의 단서를 충분하고 적절하게 남기고 있다.
‘100% 순수한 오직 행복’이라는 말은 행복을 희구하는 염원의 표현일 수는 있어도,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 적도 없다. 행복은 ‘행복 아닌 것들’과 동거하는 뜨락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인간이 미혹의 주체에서 열반의 주체로 변신하는 것도 시간적·관계적 조건에 따른 변화이며, 열반으로 나아가는 모든 노력도 시간적·관계적 조건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느닷없이 열반을 시간 및 모든 관계와 분리시키는 유부의 시선은 인간 경험의 발생 연기에 대한 성찰의 미흡함이고 그런 점에서 비非연기적 사유이다. ‘변화·관계에서 벗어난 불변·절대의 궁극실재’에 대한 중생 인간의 보편적 갈망이 불교의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일 뿐이다.
열반에 대한 유부의 이런 시선은 비록 부파불교 내부에서도 이견들이 제시되지만, 남방의 불교 이해와 수행 현장을 전반적·명시적·묵시적으로 장악하고 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 고조되고 있는 초기불교 탐구는 주로 남방불교의 관점에 의거한다. 남방 상좌부 전통의 니까야 경전에 대한 이해와 수행 지침이 초기불교 탐구의 실제 내용이 되고 있다.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로 직접 가서 교학을 배우고 수행법을 익히는 학자와 구도자 학인들이 줄을 잇고, 그들이 배우고 익힌 내용이 각종 매체를 통해 활발하게 소개된다.
그러나 ‘니까야가 전하는 붓다의 원음’과 ‘남방 상좌부 전통의 니까야 이해’는 구분되어야 한다. 남방불교의 초기불교 이해는 붓다와의 대화에 유익하기도 하지만 장애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언제나 유념해야 한다. 붓다의 길이 안내하는 열반이라는 목적지를 읽는 상좌부 유부의 시선이 비불교적이라는 점은, 남방불교의 니까야 이해가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는 단적인 증거다.
북방 대승불교와 선종 선불교의 경우
현상 이면에 항존恒存하는 불변 실체를 설정하여 무상·고·무아·열반 등 붓다의 모든 설법을 설명하는 것이 유부의 관점이고, 이를 비판하면서 전개된 것이 대승불교이다. 따라서 대승불교 권역에서는 열반이나 궁극적 깨달음을 ‘불변·무조건·절대의 궁극실재’로 간주하는 시선이 자리 잡지 않아야 자연스럽다.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중관·유식·화엄이나 선종 선불교의 언어를 읽는 시선들 가운데는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로 향하는 관점들이 노골적으로 혹은 은연중에 활개를 친다.
공空의 경지나 긍정형 기호들을 구사하는 교학 이론 및 그에 대한 학인들의 이해에서 ‘불변·절대의 궁극실재에 대한 유혹’이 빈번하게 목격된다. 자성自性, 본성本性, 진여眞如, 진여심眞如心, 심진여心眞如, 진심眞心,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청정무구식淸淨無垢識, 여래장如來藏, 본각本覺, 구경각究竟覺, 일심一心 등과 같은 긍정형 기호들과 선종의 돈오견성頓悟見性을 ‘불변·절대의 궁극실재’와 연관시키려는 다양한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남방 상좌부 불교나 대승불교 권역을 관통하고 있는 ‘불변·절대의 궁극실재 현혹’의 속내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대안적 이해는 이어질 글들에서 피력해 보겠다.
<각주>
(주1) 불교에서는 시간이라는 실재가 있어 사물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현상을 시간이라는 단위로 표현하는 것이라 본다. 그래서 변하면 ‘시간적인 것’이고, 변하지 않으면 ‘비시간적’이라 말한다. 유부에서는 무위법인 열반을 ‘불변하는 것’으로 보므로 열반을 비시간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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