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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로 읽는 서유기 ]
손오공의 수행과 깨달음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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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4 년 6 월 [통권 제134호]  /     /  작성일24-06-05 10:14  /   조회1,38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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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에게 이름을 부여받은 손오공은 일상의 예의범절을 익히는 ‘몸 학습’의 기간을 갖게 된다. 물 뿌려 마당 쓸고[灑掃], 부름에 응하고 질문에 답하며[應對], 나아가고 물러나며[進退], 두루 관계하는[周旋] 일 등이 그것이다. 또한 손오공은 초보 출가자로서 경전과 글자를 학습하고 예불 등의 일과를 익히는 한편 농사짓기, 정원 가꾸기, 물 긷기, 부엌일 하기 등과 같은 사원노동에 전력을 다한다. 

 

입문入門 2, ‘몸 학습’ 기간

 

모든 배움은 ‘스승 닮기’로 시작해서 ‘스승 떠나기’로 완결된다. 학문이 그렇고, 예술이 그렇고, 운동이 그렇다. 깨달음의 길 역시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수행자들은 기존의 자기 세계를 버리고 스승의 세계로 진입하는 길을 걷게 된다. 뛰어난 스승들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한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방법을 구사한다. 그 핵심은 제자가 갇혀있는 번뇌의 껍질(번뇌장)과 견해의 껍질(소지장)을 깨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니까 눈을 뜨는 깨달음은 껍질을 깨는 깨침과 동시에 일어난다. 깨달음을 깨침이라고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 1. 동자스님의 마당 쓸기. 사진: 조계사.

 

그러한 방법론의 공통분모가 계율이다. 불교의 계율은 자아의 세계를 깨뜨리는 기능을 한다. 그것을 익히는 데 있어서 ‘몸 학습’은 필수가 된다. 자신의 수행터를 청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물을 뿌려 청소하는 일, 스승의 부름에 응하고 묻는 말에 대답하는 일, 스승에게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 일상의 행위규범과 예의범절을 몸으로 익히는 일 등이 그 일환이다. 그것이 자기를 버리고 스승을 따르는 일에 속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초보 입문자에게 내려지는 사미계를 ‘스승의 가르침 가슴에 새기기[服膺]’, ‘스승 모시고 받들기[侍奉]’, ‘스승의 수건과 물병 챙기기[巾甁]’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스승 닮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작다고 무시할 수 없다. ‘몸 학습’이 바로 마음에 대한 눈뜸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육조스님은 방앗간에서 8개월간 방아를 찧다가 깨달았고, 향엄스님은 도량을 쓸다가 빗자루에 날린 돌맹이가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 손오공의 ‘몸 학습’도 그랬다. 실천의 양이 쌓이면서 차원의 전이가 일어나 스승과 같아지는 날이 도래한 것이다. 스승과 같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이 일을 승당이라고 부른다. 전당에 올라간다는 뜻이다.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자.

 

어느 날 손오공은 조사의 법문을 듣다가 기쁜 마음이 일어나 춤을 춘다. 손오공은 입문한 뒤 7년간 잘 익은 복숭아 산[爛桃山]에서 복숭아를 따 먹었다. 그 사이 조사에게 들은 법문이 푹 익어 오묘한 법음이 저절로 이해되는 눈뜸[解悟]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그에게 조사는 점술[術], 학문[流], 좌선[靜], 신체 단련[動]의 길을 차례로 제시하면서 그중 원하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손오공은 그때마다 영원히 사는 길이 아니라면 배우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조사는 “그러면 뭘 바라는 거냐?”고 고함을 치며 계척戒尺으로 손오공의 머리를 세 번 때리고는 뒷짐을 짚고 안으로 들어가 가운데 문을 닫아버린다. 대중들은 모두 그를 비난했지만 손오공은 그것이 3경에 뒷문으로 찾아오면 법을 전수해 주겠다는 암시임을 알아차리고 가만히 미소 짓는다. 그날 밤 3경이 되자 손오공은 뒷문으로 찾아가 반이 열리고 반이 닫힌 문으로 들어가 스승에게 법을 전수받는다.

 

승당昇堂, 기쁨의 춤을 추는 손오공

 

손오공은 스승의 설법을 듣다가 그 도리를 깨닫고 기쁨의 춤을 추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차원의 전이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손오공은 법사의 오묘한 법음[妙音]을 알아듣고 기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춘다. 자기 귀를 만지기도 하고, 뺨을 쓰다듬기도 하고, 눈웃음을 짓기도 하다가, 그것도 부족해서 손발을 움직여 춤까지 추게 된 것이다.

 

사진 2. 일본의 춤염불[踊躍念佛].

 

불경을 보면 불법에 대한 설법을 듣고 마음이 열려 기뻐하며[歡喜] 춤을 춘다[踊躍]는 관용적 표현이 자주 보인다. 당장 수보리로 인해 설해지고 홍인조사가 선문에 널리 선양한 경전인 『금강경』만 해도 청법 대중들이 “모두 기뻐하며[歡喜], 믿고 받아들여[信受], 받들어 실천하였다[奉行].”는 말로 전체 경전을 맺고 있다. 이처럼 법문을 듣다가 차원의 전이가 일어나 그것을 남김없이 수용하게 된 마음을 환희심이라고 표현한다. 

 

부처님의 설법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려면 자아와 대상에 대한 집착이 없어야 한다. 집착이 떨어지면 그 순간 마음의 질이 바뀐다. 여기에서는 환희심 하나로 표현했지만 그것은 다양한 명칭을 갖는다. 말이 떨어지기 전에 알아차리는 마음[具足心], 유연한 마음[柔軟心], 감내하는 마음[堪耐心], 탐진치를 떠난 위없는 마음[[勝上心], 한결같은 마음[一向心], 의혹없는 마음[無疑心], 장애없는 마음[無蓋心]이 그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바른 법을 받아들이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해오解悟라 한다. 중국 근대의 고승 태허太虛의 해오 체험에 대한 회고를 보자. 

 

사진 3. 중국 근대의 고승 태허太虛.

 

『대반야경』을 읽고 있는데 문득 몸과 마음과 세계가 사라지고 텅 빈 공중에 신령한 빛이 맑게 비치면서 무수한 국토가 뚜렷하게 나타나 마치 공중에 비친 영상과 같았다. 그 밝은 비춤이 끝이 없었다. 몇 시간이 찰나처럼 지나갔고 여러 날이 지나도 몸과 마음이 경쾌하고 편안한 희열 속에 있게 되었다. 며칠 사이에 반야부를 다 보고 바로 『화엄경』을 보는데 황홀하게도 그것이 모두 스스로 마음 가운데 직접 체험하는 경계였다. 이후 붓을 들어 노래 같기도 하고 게송 같기도 한 글들을 하루 수십 장, 글자로 하면 수천만 자가 넘는 글을 쓰게 되었다. 선종의 의문들이 모두 풀리고 마음에 걸림이 없어 천태, 화엄, 법상의 교리와 세간의 문자들이 자유롭게 활용되어 해오가 비범하였다. 

 

입실入室, 야반3경의 만남

 

왜 야반3경인가? 선문에서는 3경이 중요하다. 5조 홍인스님이 혜능스님을 불러 법을 전한 것도 3경이었고, 수석 제자였던 신수스님이 게송을 올리자 홍인스님이 그를 불러 점검한 뒤 인가를 유보했던 것도 3경이었다. 경봉스님도 열반에 임해 그 상좌였던 명정스님에게 당신을 보려면 “야반3경에 문빗장을 만져 봐라.”고 유촉했다. 선문에서 야반3경은 단순한 단어가 아닌 것이다. 왜 하필 3경인가? 거기에는 표층적인 이유와 심층적인 이유, 두 가지가 있다.

 

표층적인 이유로는 다른 사람이 엿듣거나 알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다른 사람이 엿듣는 것을 『서유기』에서는 여섯 귀가 듣는다고 표현한다. 법을 전수받는 자리에는 스승의 귀 두 개와 제자의 귀 두 개를 합쳐 네 귀만 있어야 한다. 왜 그런가?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확인하는 현장은 의외로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영리한 사람이라면 이것을 엿듣고 그 원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원리를 짐작하고 이해하는 일은 당사자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일은 재앙에 가깝다. 법이라고 불리는 객관적인 무엇이 따로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깨달음의 확인은 모두가 잠든 3경이 아니라 할지라도 어쨌든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야 한다.

 

사진 4. 입실하여 법을 전수받는 손오공.

 

심층적인 이유로는 분별적 생각이 잠드는 시점이 3경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분별적 생각이 정지하여 잠든 상태와 같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분별의 진여지혜가 열려 있어야 법을 전수받을 수 있다. 3경은 11시에서 1시 사이니까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보통 사람들은 밝음에서 어두움으로 넘어갈 때 또렷한 의식작용을 내려놓고 캄캄한 무지각에 빠진다. 이 상태라면 스승의 부름에 응할 수 없고, 전해주는 법을 받을 수 없고, 문빗장을 만져볼 수 없다. 어두움의 극치인 12시에서 밝음의 시작인 1시로 넘어가듯 무지각의 잠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야반3경은 단순히 시간을 나타내는 어휘가 아니라 오매일여의 차원을 나타내는 단어가 된다. 보살의 수행이 제8지를 넘으면 잠이 사라지는 멸진정의 선정을 성취하게 된다. 이 경우 아예 잠을 자지 않는 경우도 있고, 또 겉보기에 잠을 자는 경우도 있다. 다만 어느 경우라 해도 그 정신적 밝음이 유지되는 상태에 있게 된다.

 

사실 깨어 있을 때 밝은 알아차림이 유지되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생각이 잠드는 무상정을 성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상정은 얼음 속에서 잠을 자는 물고기와 같아서 조건이 바뀌면 다시 생각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더 지극한 수행을 통해 미세한 생각의 물결까지 완전히 벗어나는 멸진정을 성취해야 한다. 그때 잠 속에서도 밝은 상태가 지속되는 진여무심이 성취된다. 그러니까 멸진정(오매일여)은 잠이 사라졌느냐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분별이 잠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분별의 진여지혜가 열리는 일을 야반3경의 시간으로 표현한 것이다. 『서유기』에서는 이것을 반이 열리고 반이 닫힌 문에 비유한다. 손오공이 찾아갔을 때 스승의 문이 반개반폐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스승이 자고 있다. 스승의 잠 역시 반개반폐다. 왜 그런가? 스승은 분별이 사라지고 무분별지의 차원에 거주하는 존재다. 그래서 야반3경에 반개반폐된 문으로 손오공이 들어갔다는 것은 스승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제대로 된 입실이 이루어졌다는 말이 된다.

 

사진 5. 공자의 입실제자 안회.

 

손오공이 찾아가니 스승이 이것을 확인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앞에서 잠이나 잘 것이지, 뒤쪽에 와서 무엇하는 거냐?” 앞에서 잠을 자는 일은 분별지가 잠들었다는 뜻이다. 뒤쪽으로 찾아오는 일은 무분별지가 열렸다는 뜻이다. 나와 세계가 융합된 진정한 나를 확인하는 것이 ‘뒤에서 깨어 있는 일’인 것이다.

 

수보리 조사는 이러한 야반3경의 점검으로 손오공의 체험이 진실한 것임을 검증완료한다. 입실하게 된 것이다. 이에 제자는 스승과 하나가 된다. 그 사이에 생각이 끼어들 틈은 없다. 손오공은 침상으로 돌아와 외친다. “모두 일어나라. 날이 밝았다.” 이제 그는 스승의 분신이다. 그럼에도 그 도착한 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 진리와 한 몸이 되는 길에는 오로지 향상만 있을 뿐 머무를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공자의 입실 제자인 안회는 말한다.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으시고[仰之彌高], 뚫을수록 더욱 단단하시다[鑽之彌堅]. 바라보면 바로 앞에 있는가 하다가[瞻之在前], 홀연히 뒤에 계신다[忽焉在後]. …마치 높이 솟은 산과 같아[如有所立卓爾], 따라 오르고자 해도[雖欲從之], 그게 참 막막하다[末由也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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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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