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의 장인을 찾아서]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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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리 / 2024 년 5 월 [통권 제133호] / / 작성일24-05-04 22:48 / 조회2,165회 / 댓글0건본문
연꽃은 불교를 선명하게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진흙탕 안에서도 고아한 모습으로 그 자태를 은근히 드러내지만 그것을 자랑으로 삼지 아니한다. 연은 잎에서부터 뿌리며 씨앗까지 인간 삶에 어느 하나 유용하지 않은 것이 없다.
불교미술에서 ‘여성’이라는 주제
한여름 붉은 태양 아래서 제 할 일을 묵묵히 마친 연의 꽃은 마침내 스스로를 소멸하듯 툭툭 떨어져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취를 감춘다. 이는 불교 안에서 여성들의 모습과 유사성을 갖는다. 여성의 활동은 크게 부각되지 않지만 그들은 불교에 열렬히 귀의했고 크게 공헌하였다.
이번 호암미술관[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서는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동아시아 불교미술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하는 대규모 기획전을 마련했다. 바로 ‘불교에서의 여성’이라는 주제이다. 한·중·일 불교미술을 대표할 만한 작품들을 통해 젠더라는 관점에서 조명하였다. 이번 전시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에서는 불교를 지탱한 옹호자이자 불교미술의 후원자와 제작자로서 크게 기여한 여성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전시 들여다보기
워낙 방대한 대규모의 전시이고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미술품이 없으나 아직 관람전인 독자들을 위해 눈에 들어오는 몇 가지 작품을 감상해 보자.
황금빛으로 찬란한 감지금니紺紙金泥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모두 7권의 절첩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장을 압도할 만한 규모의 사경寫經이다. 각 권의 앞쪽에 경전의 내용을 압축해서 그린 변상도가 있고, 제7권 말미에 발원문이 있다. 이 사경은 1345년에 진한국대부인 김씨辰韓國大夫人 金氏가 충혜왕忠惠王(1315〜1344)의 영가천도를 기원하는 동시에 충목왕忠穆王(1337〜1348)과 그 모후이자 원 황실 출신의 덕녕공주德寧公主(1322〜1375)를 축원하고자 조성한 은자 『화엄경』 1부와 금자 『법화경』 1부 중 하나이다.
국대부인은 고려시대에 나라에서 왕실 밖 여성에게 내렸던 가장 높은 칭호이다. 국대부인의 칭호 앞에는 진한과 같은 역대 국명을 붙였다. 이처럼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김씨는 이 발원문에서 이전 겁의 불행으로 인해 여자의 몸을 받았다고 탄식한다. 이 같은 인식은 『법화경』 제12품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에 거론된 여성의 몸에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어서 부처가 될 수 없다고 본 여인오장설女人五障說과 관련이 깊다.
여덟 살 용녀龍女가 남성으로 몸을 바꾸어 단박에 깨달음을 얻은 이야기는 여인오장설의 반증으로 인식되어 중시되었다. 고려 후기 최고위층 재가 여성 신도가 발원한 사경이며, 뛰어난 장인이 투입되어 제작된 고려 사경의 수작이다.
백의로 온몸을 감싼 백의관음白衣觀音상은 우아하고 섬세하다. 백자로 빚은 관음보살상은 명·청대에 복건 지역에 위치한 덕화요德化窯에서 주로 제작하였다. 생산된 백자는 서구에서 ‘중국의 백색(Blanc de Chine)’이라 불릴 만큼 중국 백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상아를 연상시키는 따뜻한 백색은 명대 후기 덕화요 백자의 특징 중 하나이다. 부드럽고 고결한 백자 빛깔은 백의관음을 표현함에 가장 적격이었다. 보살의 우아함과 자상한 자태미가 극대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불사에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시점은 고려 후기이다. 당시는 원元(1271〜1368)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원 황실과 귀족들의 불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이다. 원으로 건너가 황후가 된 고려의 기황후寄皇后(1315〜1369)는 불사에 적극적이었는데, 1343년에서 1345년에 걸쳐 이루어진 장안사長安寺 중창 불사와 동불 제작이 알려져 있다.
고려 후기에는 아미타여래를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하는 삼존상이 조각과 회화로 다수 만들어졌다. 현세와 내세를 막론하고 불보살의 위력에 힘입어 고난을 피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염원이 반영된 것이다.
고려 때 제작된 은제 아미타여래삼존좌상에서는 특별히 부처님의 온화하고 순수한 미소가 인상적이다. 이 삼존불상 중 아미타여래상과 관음보살상의 복장腹藏에서는 발원문이 하나씩 발견됐다. 그중 관음보살상 발원문을 통해 1383년에 무려 500명이 훨씬 넘는 시주자들이 모여 이 삼존불상을 발원했음을 알 수 있다. 시주자들의 절반은 승려이고, 나머지 절반은 재가 신도로 보인다. 여기에는 비구니와 하층민 여성의 이름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불사에 참여했을 것이다. 전심으로 불사한 불자들에게 아미타여래삼존불의 편안한 미소는 위로와 안정을 선사했을 것이다.
부처님께 올리는 머리카락
여성들은 때로는 바늘과 실로 공덕을 쌓기도 하였다. 금빛으로 섬세하게 표현한 아미타여래삼존내영도는 망자를 극락정토로 데려가기 위해 맞이하러 오는 장면을 자수한 수불繡佛이다. 워낙 정교하여 얼핏 보면 그림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수놓았다. 아미타여래는 연화 위에 서서 구름을 타고 지상을 향해 가는 중이다. 관음보살은 망자가 올라탈 연대를 든 채 내려오고 있다.
바탕까지 자수로 호화롭게 꾸며 넣는 것을 총수總繡라고 한다. 수불은 대부분 극락왕생을 빌기 위한 목적에서 여성 재가 신도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내영 장면의 좌우변에는 정토신앙을 선양한 당나라 승려 선도善導(613〜681)의 「왕생예찬往生禮讚」 중 「찬불게讚佛偈」를 수놓았다. 여래의 머리 뒤로 방사되는 빛줄기는 “상호의 광명은 시방을 비춘다.”는 게송의 구절과 상통한다.
삼존의 나발과 좌우변의 게송은 모두 머리카락으로 수놓았다. 검은 실을 쓰지 않고 일부러 머리카락을 사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머리카락은 고대부터 한 사람의 영혼이 담긴 분신으로 여겨졌다. 사후에 수습한 고인의 모발을 이용해 가까운 이들이 발원하는 경우가 많았고, 왕생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자신의 모발을 이용해 수불을 제작하기도 했다. 신체의 일부가 작품 속에서 부처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오래도록 모실 수 있으니 참으로 값진 불사가 아니겠는가.
자색 비단 위에 금선으로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여래와 권속들을 그린 불화는 영산회도靈山會圖이다. 중앙에는 여래가 높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 했고, 그 좌우에는 여의를 든 문수보살과 책이 올려진 연꽃 줄기를 든 보현보살이 등장한다. 그 위쪽으로 팔대보살, 십대제자, 팔부중이 있고, 아래쪽으로 사천왕을 배치한 구도이다. 하단 중앙에 금으로 쓴 발문[金跋]이 있다. 조선의 11대 왕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가 임금과 본인의 무병장수를 빌고, 왕실의 후사가 이어지길 바라며 조성했다.
문정왕후는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아들을 대신해 1553년까지 수렴청정을 했고, 1563년까지 섭정으로써 정사에 관여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기에 정치적으로도 불교 부흥에 힘썼다. 영산회도는 문정왕후의 불심에서 비롯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다른 비빈들이 개인적, 소극적인 차원에서 불교미술품을 조성하였다면, 문정왕후는 정책적으로 불교문화를 확장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시도하였다는 차이점을 갖는다.
이번 전시는 동아시아 불교미술에 담긴 여성들의 번뇌와 염원, 공헌을 다양한 시각으로 조명한다. 불교미술 속에서 인간과 보살 혹은 여신의 모습으로 여성은 재현되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여성은 때로는 불편한 대우를 받기도 했고, 그것은 일종의 회한으로 남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들의 강인한 여성성은 오히려 찬란한 불교미술에서 든든한 후원자와 제작자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인다.
전시를 통해 진흙에서 피어난 청정한 연꽃처럼 사회와 제도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기로서 살고자 했던 여성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6월 16일까지 계속되며, 국내 소장 작품은 물론 메트로폴리탄, 보스턴, 후쿠오카시, 나라, 쾰른 동아시아, 영국 박물관 등에서 온 귀한 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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