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사의 전각과 가람배치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거연심우소요]
고운사의 전각과 가람배치


페이지 정보

정종섭  /  2024 년 5 월 [통권 제133호]  /     /  작성일24-05-04 22:22  /   조회127회  /   댓글0건

본문

등운산 고운사 ②

 

고운사도 여러 잡역을 부담하였는데, 특히 종이를 만들어 공납한 일이 눈에 띈다. 어람지御覽紙, 동지사장후지冬至使壯厚紙, 팔대가책지八大家冊紙, 성균관삭지成均館朔紙, 장지壯紙등 최고급의 종이를 만들어 공납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저상지楮上紙인데, 이런 고품질의 종이를 만들어 공납할 정도였으면 보통 수준의 종이도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사진 1. 고운사 산문.

 

1802년에 경상감영에서 종이 값으로 고운사에 지불한 금액이 128냥인 것을 보면, 관청에서 공짜로 공납을 받은 것은 아니어서 종이를 만드는 일은 사찰 재정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품질 좋은 종이를 제조하였으니 자연 선비들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도 맡게 되었을 것이고, 문집을 인출하는 한지도 공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18년의 「등운산고운사사적비」를 보면, 당시에 고운사는 사세가 번창하여 전각이 모두 366칸에 이르렀고, 고운사에 출가한 강유문姜裕文(1898〜1941)이 편찬한 『고운사본말사사적孤雲寺本末寺事蹟』에 의하면 1940년까지 28명의 고승 진영이 있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이런 많은 건물들이 해방 이후 근래에 오기까지 상당히 사라져 버렸고 사세도 기울어졌는데, 지금은 중창 불사로 인하여 상전벽해로 번창한 모습이 되어 있다.

 

일주문과 천왕문

 

고운사길을 따라 끝까지 들어가면 근래에 지은 웅장한 산문山門을 만난다. 산문에는 「謄雲山孤雲寺등운산고운사」라고 해서로 단정하게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산문에서 계곡을 끼고 잘 정돈된 길을 걸어가면 일주문을 만난다. 수미산으로 들어가는 문을 의미하는 일주문인 조계문曹溪門에는 공포의 끝부분과 지붕이 만나는 지점에 「曺溪門조계문」이라는 현판이 높이 걸려있다. ‘조曹’ 자는 서예에서 ‘조曺’로도 혼용하여 썼으므로 조계문의 현판에는 ‘조曺’로 썼지만 원래는 ‘조曹’이다. 그 아래에 출입구 위에는 1967년에 이우영李宇榮이 독특하게 쓴 「謄雲山孤雲寺등운산고운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진 2. 고운사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면 넓게 열린 공간이 펼쳐진다. 옛날에는 계곡 옆으로 난 길이었지만 근래에 조성된 넓은 이 공간으로 걷다 보면 본격적으로 사역으로 들어가는 문인 천왕문天王門을 만난다. 천왕문에는 갑옷을 입은 무장武將 모습을 한 사천왕상이 있다. 사천왕四王天은 불교의 삼계三界 중 욕계欲界의 6개 하늘나라[六天]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수미산須彌山의 중턱에 머물며 수미산의 사방을 지키는 네 명의 외호신外護神을 말한다. 수미산 정상의 도리천忉利天에 있는 제석천帝釋天, Indra Śakra(힌두의 신 인드라Indra가 수용된 것)을 섬기며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호법신護法神이다.

 

사진 3. 고운사 천왕문.

 

이 호법신들은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두 상인이 올리는 음식을 받을 그릇이 없음을 보고 염부제閻浮提에서 각기 발우鉢盂를 가지고 내려와 싯다르타에게 발우를 바쳤는데, 이런 설화에 근거하여 간다라미술에서는 사천왕은 머리에 터번을 쓰고 높은 신분의 의복을 입고 싯다르타에게 발우를 공손히 바치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표현되었다. 나중에 불교가 동아시아 국가로 전래되면서 이 사천왕은 불법佛法의 수호자로서의 이미지가 강조되어 험상궂은 인상에 근육질을 한 무장武將으로 표현되었다.

 

사진 4. 고운사 사천왕상.

 

천왕문에 사천왕을 봉안하는 경우에는 목조 조각상이나 흙으로 만든 조상으로 세우기도 하고 그림으로 그려 놓기도 한다. 동서남북의 사방을 관장하는 천왕이 각 방위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지 않고 천왕문의 건물 속에 모두 모여 있는 것은 일주문부터 본전까지 일직선으로 전각을 배치하는 가람구조로 인하여 천왕문을 세운 곳에 사천왕상을 모두 모아두면서 그렇게 되었다. 자바Java섬의 보로부두르Borobudur 유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방에서 쌓아 올리는 구조물에서 수미산 전체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사천왕이 지키는 산중턱에서는 4명의 천왕들을 동서남북으로 각기 흩어 배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 5. 보로부두르 유적.

 

고불전과 두 개의 누각

 

사찰에서는 최후의 문인 해탈문解脫門 즉 불이문不二門을 지나야 수미산의 정상에 이르는데, 천왕문에 이르면 일단 수미산의 중턱에는 온 셈이다. 이 문을 지나면 왼쪽에 아름다운 자태를 한 고불전古佛殿을 만난다. 고불전에는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석불이 있다. 고불은 과거세의 붓다를 말하기도 하고, 고승을 일러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것 같지 않다. 

 

사진 6. 고운사 고불전.

 

고불전은 앞쪽으로 돌출되어 나온 곳에 중문이 나 있고, 좌우에 있는 문은 약간 뒤로 물러나 있어 흡사 봉황이 날개를 펴고 있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 건물이 약사전藥師殿으로 불리었는데, 그 후에 현재의 대웅보전이 있는 자리에 약사전이 세워졌다가 그 자리에 대웅보전이 신축되면서 현재는 그 뒤에 자리하고 있다. 

 

고불전에 있는 석불이 약사여래불은 아님이 분명한데, 현재의 약사전의 석불상도 약사여래불의 모습은 아니다. 고불전의 다른 방에는 고운사에서 지고 있던 한지의 공납 부담도 줄여주면서 도와준 고을 현령 이용준李容準에게 감사하는 철로 만든 공덕비가 서 있다. 이것을 보면, 옛날 고운사 종이 공납의 부담이 실로 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서 볼 수 있듯이, 가람의 배치는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되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전각들이 들어서고 또 허물어지고 다시 전각들을 세우는 것을 반복하면서 전체 가람의 배치가 이루어져 왔다.

 

사진 7. 고운사 가운루.

 

고불전을 지나 걸어가면 계곡 위에 무지개처럼 공중누각으로 서 있는 가운루駕雲樓를 만난다. 고운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고 있는 건물이다. 그 옛날에는 계곡을 가운데 놓고 가허루와 우화루가 양쪽에 따로따로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 현종 시기에 와서 계곡 건너편에 있는 원래의 가허루는 없어지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공중누각으로 지은 것이 현재의 가운루라고 보인다. 그 기능으로 보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로서 역할을 한 것인데, 다리 위에 집을 지어 누각처럼 되었다. 다리를 누각처럼 지은 것으로는 송광사松廣寺 극락홍교 위의 청량각과 삼청교 위의 우화각, 태안사泰安寺의 능파각, 경주의 월정교月精橋 등에서 볼 수 있다.

 

이 가운루는 영조 때의 신유한 선생이 사적비 비문을 지을 때에는 가허루로 불렸고, 1887년 김시오의 중수기에 수광루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건대, 그 이후 가운루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구름 위로 떠오른 수레라는 의미인지 수레를 타고 구름 위로 오르는 니르바나nirvana의 경지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고운 선생이 태워 가는 수레라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 이미 일주문과 천왕문을 건너왔기 때문에 계곡을 건너는 의미가 속세를 떠나 붓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고, 바로 이 계곡을 건너면 수미산의 정상에 이르든가 아니면 아미타불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운루 위를 지나는 사람들은 곧 서방정토에 이르거나 니르바나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리라. 

 

사진 8. 가운루와 우화루 사이.

 

이 가운루는 여러 차례 불에 타고 중수된 것인데, 1935년에 주지 영호泳鎬 화상이 가운교駕雲橋를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에 와서 이름이 ‘가운駕雲’으로 바뀌었고, 현판을 가운루로 써서 건 것으로 보인다. 「駕雲樓가운루」라는 현판은 누각 바깥에는 행서체로 쓴 것이 걸려 있고, 안쪽에는 해서체로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가운루를 건너가면 계곡을 바라보고 서 있는 절의 강당인 우화루雨花樓를 만난다. 원래의 이름은 우화루羽化樓로 되어 있었는데 후에 불교의 의미에 합치되도록 하기 위하여 『법화경法華經』의 내용에 따라 우화루雨花樓로 이름을 바꾼 것 같다. 지금은 가운루와 우화루, 종각의 건물이 ㄷ자로 둘러싸고 있는 썬큰(sunken) 공간이 형성되어 있고, 우화루도 요즘 유행에 따라 카페로 바뀌는 바람에 썬큰 공간은 카페에서 바깥으로 내다보이는 정원 같은 공간으로 되었다. 우화루에는 카페로 들어가는 쪽에 「雨花樓」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고, 카페 안 대들보에는 「羽化樓」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중정을 향한 쪽의 바깥 처마 아래에는 「孤雲寺」라고 쓴 현판도 걸려 있다. 

 

사진 9. 두 개의 우화루 현판. 雨花樓와 羽化樓.

 

가운루를 지나 우화루를 끼고 옆으로 들어가면 극락전의 앞마당에 들어서게 되고, 앞으로 바라보면 극락전이 석축 위에 서 있다. 우화루는 계곡에 연해 있어 누의 아래를 통과하여 들어갈 수 없기에 옆으로 돌아 들어가는데, 이 경우는 문이 없어도 옆으로 들어가는 공간이 해탈문解脫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본전 앞에 누각이 있는 경우에도 누각 아래를 통과하는 구조가 아니면 옆에 작은 해탈문을 세워 본전 앞마당으로 들어가게 하는데, 이런 문이 없는 경우에는 마당으로 들어가는 옆 공간이 해탈문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우화루를 돌아 극락전으로

 

붓다의 공간에 들어서니 적막하고 청정한 분위기에 감싸인다. 은해사銀海寺 백흥암百興庵의 극락전 마당에 들어섰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분위기이다. 극락전의 현판은 백흥암 극락전의 현판 글씨와 거의 흡사한데, 잠두마제蠶頭馬蹄의 운필을 강조한 기성쾌선箕城快善(1693〜1764) 대사가 쓴 것으로 보인다.

 

사진 10. 고운사 극락전.

 

극락전을 바라보고 왼쪽에 있는 것이 과거에 가장 큰 승방으로 사용된 만덕당萬德堂이고 오른쪽에 자리한 것이 낙서헌樂西軒이다. 낙서헌은 요즘은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으나 과거에는 요사와 객실로 사용되었다. 우화루는 만덕당과 걸쳐 있으면서 극락전을 마주하고 있다. 가람배치의 기본구조가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가운루의 다리를 건너오면 우화루를 만나게 되고, 그 우화루를 옆으로 돌아 들어가면 극락전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까지 중건되거나 신축되어 온 전체 가람배치나 절의 공간적 환경을 보면, 이 극락전이 원래 고운사의 주불전으로 기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과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사진 11. 김성근 글씨, 「고운대암」 현판.

 

만덕당의 왼쪽 뒤편으로는 오래된 2층 누각과 무설전, 열반당이 있고, 낙서헌에서 오른쪽으로 좀 높은 곳으로 나오면 담장이 둘러진 고운대암孤雲大菴이 있다. 고운대암의 현판은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1835〜1919) 선생이 쓴 것이다. 고운대암의 마루에서 내려서면 좁은 마당에 석주화대石柱火臺가 서 있는데, 이는 원래 옛 대웅전 앞에 있던 것을 현재의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대웅보전 앞으로 옮겨 놓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일제 식민지 시기에 고운사는 항일운동과 계몽운동에 적극 나섰는데, 을사조약(1905) 이후 경북 지역에 불교를 중심으로 학교 설립 운동이 번져 1922년에는 만우화상이 고운사에 보명학교와 안동 지방학림을 개설하였고, 1923년에는 고운사와 안동면이 공동운영하는 보광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고운사가 독자적으로 운영한 명진서숙도 있었다. 1933년에는 용흥학원을 설립하였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정종섭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