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대관령 성황신이 된 통효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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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 2024 년 5 월 [통권 제133호] / / 작성일24-05-04 21:51 / 조회1,392회 / 댓글0건본문
한국선 이야기 5 | 남종선 전래와 나말여초 구산선문의 형성 ③
당 무종의 회창법난을 계기로 귀국하여 9세기 후반 신라 땅에 본격적으로 혜능의 남종선을 정착시킨 것은 성주산문의 개산조 낭혜무염과 사굴산문의 개산조 통효범일通曉梵日(810~889) 그리고 가지산문을 실질적으로 연 보조체징普照體澄(804~880)이다. 서당지장의 법을 전해온 도의와 홍척이 활동하던 9세기 전반기가 남종선 전래의 초창기라면 무염과 범일의 활동 시기는 남종선(조사선)의 정착기라 말할 수 있다.
마조의 제자인 염관제안鹽官齊安과 석두의 제자인 약산유엄藥山惟儼으로부터 동시에 인가받았고, 열반 후에는 대관령의 성황신으로 민중들의 추앙을 받았던 특이하고 신비에 쌓인 인물이 바로 사굴산문을 개산한 범일(혹, 품일品日)이다. 범일과 관련한 사료로는 『조당집』 권17 「명주 굴산 고 통효대사」조와 일연의 『삼국유사』 권3 「낙산 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조와 천책의 『선문보장록』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범일의 제자인 낭원개청朗圓開淸과 낭공행적朗空行寂의 비문을 통해 범일의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다.
출가와 입당 구법의 꿈
‘사굴산’이란 기사굴산으로 곧 ‘영취산’을 말한다. 강릉시 구정면 학산 2리에 위치한 굴산사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가 우뚝 서 있고, 범일의 것으로 추정되는 승탑과 석불좌상 등이 남아 있다. 당시 굴산사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를 짐작하게 한다.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지만 전성기에는 사찰 당우의 반경이 300m에 이르렀고 승려 수도 2백여 명이었으며, 쌀 씻은 뜨물이 동해까지 흘렀다고 전한다.
『조당집』에 의하면 범일의 할아버지는 지금의 강릉 지방에 해당하는 명주의 도독을 지낸 김술원金述元이며, 어머니 역시 이 지방의 명문가인 문文(支)씨 후손이다. 범일은 강릉의 명문 호족 집안 출신으로 태양을 머리 위로 받드는 태몽을 꾸고 13개월 만에 낳았다고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를 받았으며, 이후 831년(흥덕왕 6) 2월에 흥덕왕의 왕자 김의종金義琮과 함께 당나라로 갔다.
범일이 당나라로 구법을 떠났던 이 시기 승려들 사이에는 화엄 교학에서 당나라에 유행하고 있던 선사상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이미 10년 전 서당지장의 법을 받고서 도의가 귀국하여 설악산 진전사에 머물고 있었으며, 실상산문의 홍척과 쌍계산의 혜소가 막 귀국하였을 때였다. 무염과 혜철, 현욱, 도윤 등은 당나라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서당지장, 마곡보철, 장경회해 등을 찾아 선법을 배우고 있었다.
당나라에서 구법 활동
범일이 당나라에 머문 기간은 831년(836년으로 봄)에서 847년까지 16년이다. 이 기간 당나라는 문종과 무종이 재위하고 있었고, 신라는 흥덕왕에 이어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그리고 문성왕으로 이어지며 왕위쟁탈전이 일어났던 혼란의 시기였다. 범일은 당나라 땅에서 당 무종이 폐불을 단행하였던 회창 년간(841~847)을 온몸으로 겪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범일은 혜능의 돈오성불頓悟成佛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더불어 이러한 남종선을 신라 땅에 전파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혜능의 남종선을 본격적으로 중국 땅에 뿌리 내린 두 인물은 강서의 마조도일과 호남의 석두희천이다. 수많은 선사들이 마조와 석두를 찾아 강서와 호남을 찾았고, 단하천연과 같은 선사처럼 마조와 석두 모두에게 인가를 받은 선사들도 많았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범일은 마조와 석두로부터 인가를 받은 선지식들을 두루 참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조의 제자인 염관과 석두의 제자인 약산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조당집』에는 범일이 염관과 약산으로부터 인가받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먼저 마조의 제자 염관을 만나는 장면부터 보자. 여러 선지식을 참문參問한 끝에 범일은 드디어 염관대사를 만났다.
묻는다 : 어디 왔는가?
답한다 : 동국에서 왔습니다.
묻는다 : 수로로 왔는가, 육로로 왔는가?
답한다 : 어느 길도 밟지 않았습니다.
묻는다 : 두 길을 다 밟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답한다 : 해와 달과 동서에 무슨 걸림이 있겠습니까?
이에 대사(염관)께서는 “실로 동방의 보살이로다.”라며 칭찬했다. 이어 선사(범일)가 물었다.
묻는다 : 어떻게 해야 부처를 이룹니까?
답한다 : 도는 닦을 필요가 없나니 그저 더럽히지만 말라. 부처란 견해도 보살이란 견해도 짓지 말아라. 평상심이 곧 도이니라.
이 말에 범일은 활짝 깨닫고 6년 동안 염관을 정성껏 모셨다. 당 무종 재위시 염관의 문하에는 무종에 이어 황제에 오른 선종宣宗이 숨어 지냈다고 하니, 범일과 선종이 서로 만났을 가능성 또한 생각해 볼 수 있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또 “평상심이 곧 도이다.”라는 말은 마조선의 핵심 사상이니 범일이 염관을 통해 마조선의 정맥을 전수한 것이다.
842년(회창 2) 염관이 열반에 들자 범일은 다시 석두의 수제자인 약산을 찾아가게 된다. 약산을 만나 나눈 두 사람의 문답이 『조당집』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묻는다 :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원하는가?
답한다 : 강서성(염관제안 선사의 주석처)에서 화상을 뵙고자 왔습니다.
묻는다 : 여기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찾아왔는가?
답한다 : 화상께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시면 저는 뵙지도 못할 겁니다.
이에 약산은 “대단히 기특하구나! 기특하구나! 밖에서 들어온 맑은 바람이 사람을 얼게 만드는구나.”라며 감탄했다.
조사선에서는 ‘깨달음’이라는 무일물無一物의 경지 자체에 매달려 안주하려는 또 하나의 ‘집착’을 낙공落空이라 하여 철저하게 물리친다. 궁극적인 깨달음은 열반에 안주하고자 하는 낙공을 벗어나 열반까지도 다 털어 낸 절대공絶對空에 이르러야 한다. 범일은 이러한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유엄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길도 없는데 어떻게 나를 찾아왔느냐는 약산의 물음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도를 물은 것으로, 범일의 선기를 테스트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범일은 약산이란 존재마저 부정함으로써 약산의 의도를 보기 좋게 간파해 버렸던 것이다. 이어 범일은 법난의 와중에서도 6조 혜능의 탑을 예배하고서 귀국길에 오른다.
사굴산문의 개산과 교화
847년 8월에 경주에 돌아온 범일은 한동안 백달산에서 좌선을 하면서 머물고 있었다. 851년 명주 도독인 김순식이 굴산사에 와서 머물기를 간청하여 범일은 드디어 굴산사에서 본격적으로 선법을 펼치기 시작한다. 궁예가 태봉국을 건국할 때 큰 힘이 되었던 인물이 바로 김순식이다. 이러한 김순식이 범일을 굴산사로 모신 것은 범일의 가계가 강릉 지방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사굴산문을 연 범일은 열반에 들 때까지 굴산사를 떠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경문왕·헌강왕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국사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은 측천무후의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않았던 혜능의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조당집』에는 한 제자가 조사의 뜻을 묻자 범일은 “부처의 계단을 밟지 말고, 남을 따라 깨달으려 하지 말라.”고 대답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범일의 선사상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는 말이다.
범일의 법맥을 이은 대표적인 제자로는 개청開淸, 행적行寂 등 10대 제자가 있었다. 이중 행적은 범일의 법맥을 이은 뒤 870년(경문왕 10)에 당나라에 가서 석두계의 석상경저의 선법을 다시 이었으며, 885년(헌강왕 11)에 귀국하여 이때부터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그로부터 신종信宗, 주해周解, 임업林儼, 양경讓景 등 500여 명의 제자가 배출되어 사굴산문의 선풍을 크게 떨쳤다. 개청의 경우는 당초 『화엄경』을 공부하였으나 뒤에 범일에게서 선법을 전수 받아 강릉 보현산 지장선원地藏禪院에 머물면서 수백 명의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신경神境, 총정聰靜, 명연明然 등을 들 수 있다.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의 문제
천책天頙이 지은 『선문보장록』에는 무염의 ‘무설토론無舌土論’과 더불어 범일의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 ‘선교대변문’에 실려 있다. 진귀조사가 설산에 계시면서 총목방에서 석가를 기다리다가 조사심인을 전하여 조사선이 전래되었다는 진귀조사설은 조사선의 기원을 밝히고 있는 내용으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전해지고 있다. 『선문보장록』에는 진성여왕이 선과 교의 뜻에 대하여 범일에게 묻자 이에 대하여 진귀조사설을 설하고서 이 같은 조사선 사상이 무염이 설한 『능가경』이나 도윤이 공부한 『화엄경』보다 우수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천책은 이러한 내용의 출처를 『해동칠대록』에 두고 있는데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또 『삼국유사』에는 범일이 낙산사에 전각을 짓고 돌로 만든 정취보살상을 봉안한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최치원의 『지증대사비문』에는 “덕이 두터워 중생들의 아버지가 되고 임금의 스승이 될 만한 인물”로 범일을 언급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들은 범일의 영향이 신라 땅에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들이다.
사굴산문의 전승
고려시대에 들어 크게 활약한 산문은 가지산문, 사굴산문, 희양산문의 세 산문이었다. 그중 사굴산문은 가장 두드러진 산문이다.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하여 보더라도 사굴산문 출신의 승려들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고승으로는 예종 때의 혜소慧炤를 들 수 있다. 그는 사굴산문 소속으로 송나라에 가서 정인淨因의 법을 받아 귀국한 뒤 광명사廣明寺와 순천의 정혜사定慧寺(현 송광사)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1070~1159)과 지인之印은 이 문파를 크게 진흥시켰다. 탄연은 진주의 단속사斷俗寺에서 선풍을 크게 떨쳤고, 예종의 왕자였던 지인은 선법 외에도 교관敎觀과 시문詩文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특히 고려 중기에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일으켜 한국의 선을 크게 중흥시킨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도 사굴산문 출신이다. 지눌 이후 송광사에서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惠諶(1178~1244)을 비롯하여 16국사가 출현하여 고려 후기 불교계를 주도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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