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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와 불교윤리 ]
지나친 육식과 불편한 채식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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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  2024 년 4 월 [통권 제132호]  /     /  작성일24-04-05 14:01  /   조회1,59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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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스테이와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오늘도 우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고기반찬 한두 가지가 포함된 밥상을 마주 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의 관행적인 식습관으로 미루어 볼 때 내일도 사정은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의 연간 육류소비량이 2022년에 이어 2023년에도 쌀 소비량을 능가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밥보다 고기를 더 많이 먹는다는 통계 숫자는 왠지 신심 깊은 불자들의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밥심이란 말은 어느덧 옛말

 

이달 초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우리나라 국민이 전통적인 의미의 밥보다 고기로 만든 음식을 더 많이 먹는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2023년도 1인당 연간 육류소비량은 60.6kg인데 반해 쌀소비량은 56.4kg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어릴 적 시골에서 본 고봉밥이라고 불리던 밥그릇 모양을 떠올려 본다. 밥만 수북이 담겼을 뿐 반찬은 희멀건 김치나 장독대에서 막 꺼내 온 무장아찌가 고작이었다. 그렇다 보니까 밥심으로라도 고된 농사일을 감당해야만 했을 것이다. 배가 고프면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새참이란 식습관도 생겨나지 않았을까 싶다. 그만큼 쌀과 보리의 사회경제적 의미도 컸다는 말이다.

 

사진 1. 육식의 야만성을 폭로한 제레미 리프킨의 책 『육식의 종말』(시공사, 2008).

 

하지만 현대사회의 바쁜 삶은 농업사회의 밥심이 예전처럼 필요하지 않게 된 모양이다. 먹거리도 다양해지고 고기가 들어간 온갖 종류의 맛있는 음식도 즐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쌀을 비롯한 곡물 소비의 감소와 육류 소비의 증가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문제는 고기 위주의 음식문화가 동물의 생명권에 대한 각성뿐만 아니라 환경오염 및 건강의 위협과 같은 많은 부작용을 동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밥상에 오르는 고기들의 짧은 삶

 

거의 매일 우리들의 밥상에 오르는 음식이 되기 위해 희생당하는 생명체들의 짧은 삶은 그야말로 비참하기 짝이 없다. 아니 끔찍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먹어 왔던 고기반찬을 윤리적으로 문제 삼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우선 나 자신부터 그러한 지적과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한때 약 8년 동안 육식과 거리를 둬본 적이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육식을 거부하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내 몸이 동물성 단백질을 필요로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대적 흐름은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먹거리의 선택, 즉 식습관에서도 윤리적 사고의 적용을 요구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상적 의미의 삶에서 별다른 문제가 없는 사람들도 먹는 음식 때문에 도덕적으로 부주의하거나 무지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음식으로 소비하고 있는 생명체들이 대부분 공장식 축산농장이나 양식장에서 마치 공산품처럼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간접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눈앞에 놓인 고기가 나를 위해 희생되었다는 것을 보지도[不見], 듣지도[不聞], 의심하지도[不疑] 않을 때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삼정육三淨肉의 도덕적 취지도 날이 갈수록 무색해지고 있다. 보지도 않고, 듣지도 못했으며, 굳이 의심할 필요조차 없다는 핑계로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고기를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1) 치킨의 재료인 닭의 경우

A4 용지 하나 크기의 케이지 안에 4〜6 마리 단위로 구겨진 채 집단 사육되는 닭들은 거꾸로 매달린 채 도살 라인을 지나면서 전기가 흐르는 수조에 머리가 처박힌 모습으로 목을 잘리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기충격기가 엉성하게 작동하거나 있으나 마나 한 경우가 많아 대부분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목이 잘리게 된다고 한다.

 

머리 나쁜 사람을 가리켜 새대가리 혹은 닭대가리라고 부르는 것도 반드시 정확한 표현은 아니란 점도 밝혀지고 있다. 병이 든 닭은 스스로 진통제가 든 모이를 골라 먹는다고 한다. 이는 닭들이 진통제가 고통을 없애주고 다시 힘을 북돋우어 준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는 증거다. 얼마나 많은 닭이 산 채로 목숨을 잃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맛있는 치킨이 되기에 앞서 닭들이 겪는 고통은 정말 끔찍하다는 것이다.

 

(2) 삼겹살의 대상이 되는 돼지의 경우

식육용으로 길러지는 돼지의 90% 이상이 콘크리트와 강철로 만든 좁아터진 축사 안에서 평생 동안 갇혀 지낸다. 그래 봤자 고작 몇 달 내지는 십수 개월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들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바깥나들이를 하지 못한다. 또 최대한 빨리 도축할 수 있는 일정 수준 이상의 살코기를 확보하기 위해 강력한 성장 호르몬을 주사하는 것도 농장 주인들의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도축장 인부들의 전언에 의하면 돼지는 아주 영리해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미리 알고 어떻게든 마지막 순간을 모면해 보려고 발버둥 치다가 어느 한순간 체념한 듯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짧고 슬픈 일생을 마감한다고 했다. 오직 삼겹살의 재료가 되기 위한 돼지들의 삶은 너무나 가엾다.

 

(3) 등심과 불고기로 먹히는 소의 경우

공장식 사육장에서 입맛 다시는 인간들의 미각 충족을 위해 살찌움을 당하고 있는 소들의 신세도 닭이나 돼지처럼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배설물로 진흙탕이 된 좁은 우리 속에 갇혀 도축될 날만을 기다리는 소들은 자신들의 슬픈 운명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육도전생의 윤회를 믿고 있는 불자들로서는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고 싶을 것이다. 저들의 삶이 어쩌면 전생의 혹은 다음 생의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도축 현장을 몰래 잠입 취재한 비디오테이프에 의하면 소들은 목이 잘리고 기관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한참이나 몸부림을 치다가 죽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우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비단 소의 경우에만 잔인하게 목이 잘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살아 있는 인간을 참수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끔찍한 장면을 USB에 담아 언론과 인터넷에 유포해 공포심을 극대화한다. 도대체 인간의 야만성은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싶을 정도다.

 

(4) 생선회와 매운탕으로 소비되는 물고기의 경우 

소나 돼지와 달리 물고기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를 반박하는 과학적인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어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말해 물고기도 엄연히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서 깊고 또한 가장 신뢰받는 과학단체 가운데 하나인 영국왕립학회의 학회지인 『영국왕립학회보』는 린 스네든Lynne Sneddon을 비롯한 에딘버러 대학교 로슬린 연구소 팀의 흥미 있는 연구결과를 게재한 바 있다. 

 

사진 2. 영국 런던에 위치한 왕립학회(Royal Society).

 

스네든과 동료 과학자들은 벌의 독과 초산을 야생 무지개송어의 주둥이에 주사하고 그 결과를 관찰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사를 맞은 무지개송어가 갑자기 수조의 바닥에 주둥이를 비벼대고 펄쩍펄쩍 뛰는 듯한 이상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행동은 포유동물이 고통스러울 때 보이는 전형적인 행동이다.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그러한 변화를 보이던 무지개송어에게 모르핀을 주사하자 다시 먹이를 먹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진통제를 투약했을 때 보이는 반응과 똑같은 행동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최종적으로 “물고기는 고통을 느낄 수 있다.”(주1)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생선회와 매운탕에 선뜻 젓가락이 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육식의 포기와 채식의 선택이 정답인가

 

육식을 계속 즐기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서도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들의 삶을 존중하는 윤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은 아마도 실제 고기와 똑같은 맛을 내는 육고기와 생선살을 인공적으로 생산하는 일일 것이다. 최근 들어 이에 대한 유전공학적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고, 초보적인 수준이긴 하나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결과도 잇달아 발표되고 있다.

 

사진 3. 피터 싱어 외, 함규진 옮김,『죽음의 밥상』(산책자, 2008).

 

다만 상용화 단계를 거론하기에는 아직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이에 대해 제인 구달은 궁극적으로 채식주의를 선택하는 길만이 한정된 자원을 이용하면서 살아야 하는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라고 역설한다. 앞에서 봤듯이 고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는 동물과 물고기의 기본적인 생존권만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인간들의 인성과 건강까지 위협받게 됨을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한 가지 도덕적 합의사항에 동의하고 넘어갈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앞으로 동물과 물고기를 대하는 방식을 둘러싼 윤리학적 논의가 어떻게 전개되든지 간에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하나의 자연집단에 불과한 인간 공동체가 현재와 같은 모습 그대로 계속 그들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성찰과 실천의 주문이다. 이런 생명 중심 사고의 원형은 불교의 ‘불살생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음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 4. 제인 구달 외, 김은영 옮김, 『희망의 밥상』(사이언스북스, 2008). 

 

그렇다면 지나친 육식은 줄이고, 다소 불편하더라도 채식은 늘려가는 방향으로 우리의 음식문화를 개선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균형 잡힌 삶의 태도는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적 가치의 구체적 실현에 해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아무려면 우리 불자들은 육식보다는 채식을 더 선호할 것으로 믿는다. 2,500년 전의 가르침이 오늘날의 윤리적 쟁점들에서도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이유다.

 

<각주>

(주1)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죽음의 밥상』(서울:산책자, 2008), 195-196쪽; 제인 구달·게리 매커보이·게일 허드슨 지음, 김은영 옮김, 『희망의 밥상』(서울: 사이언스북스, 2008), 193-216쪽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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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동국대 국민윤리학과 졸업(문학박사). 영국 더럼 대학교 철학과 방문학자 및 동국대 문과대 윤리문화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로 있다. 역저서로는 『불교윤리학 입문』, 『자비결과
주의』, 『불교의 시각에서 본 AI와 로봇 윤리』 등이 있고, 공리주의와 불교윤리의 접점을 모색하는 다수의 논문이 있다.
hnk@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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