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말을 잊어야 비로소 뜻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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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4 년 2 월 [통권 제130호] / / 작성일24-02-05 09:37 / 조회3,346회 / 댓글0건본문
중국선 이야기 37 | 조동종 ③
조동종을 건립한 동산양개洞山良价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 장기간에 걸쳐서 제방을 행각하였던 까닭에 다양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이른바 ‘문살수좌問殺首座’라는 공안公案으로 유명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질문으로 수좌를 죽게 한 양개
선사가 늑담泐潭에서 초수좌初首座가 대중에게 설법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말하기를, “크게 기이하고, 크게 기이하도다! 불계佛界와 도계道界가 부사의不思議하다.”라고 하였다. 선사는 마침내 묻기를, “도계나 불계라고 하는 것은 묻지 않겠지만 다만 도계와 불계라고 말하는 이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자 초수좌는 오래도록 대답이 없었다. 선사가 “어찌 빨리 말하지 않는가?”라고 다그치자 초수좌는 “따지면 얻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사가 “말하라는 것도 답하지 못하면서 어찌 따지면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가?”라고 하자 초수좌는 여전히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선사는 “불佛과 도道는 모두 명언名言일 뿐이다. 어째서 가르침을 이끌어 답하지 못하는가?”라고 하였다. 초수좌는 “가르침에서는 무어라고 말합니까?”라고 물었다. 선사는 “뜻을 얻으면 말을 잊음[得意忘言]이다.”라고 하였다. 초수좌는 “오히려 가르침의 뜻을 마음에 두어 병을 만듭니다.”라고 하자, 선사는 “도계, 불계라고 말하는 병은 얼마나 되는가?”라고 물었다. 초수좌는 다시 대답이 없었다. 다음날 초수좌가 홀연히 천화遷化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선사를 ‘질문하여 수좌를 죽게 한 양개[問殺首座价]’라고 칭하였다.(주1)
이 일화는 『경덕전등록』 권15, 『조당집』 권6에 실린 양개의 전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경덕전등록』에서는 “크게 기이하고, 크게 기이하도다! 불계와 도계가 부사의하구나.”라는 것이 초상좌初上座의 시중示衆이라고 하고,(주2) 『조당집』에서는 초수좌가 아니라 정政상좌라고 한다.3) 이로부터 양개의 면밀綿密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를 분석하자면, 양개가 말한 ‘득의망언得意忘言’의 의미로부터 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득의망언은 왕필王弼이 새롭게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한 조위曹魏를 위하여 통치이념인 현학玄學을 건립하면서 출현한 인식방법론이다. 이와 관련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지만, 왕필의 득의망언은 바로 언부진의言不盡意를 바탕으로 제창한 것이다. 즉, 형식적인 명언名言으로는 절대로 성인聖人의 참다운 의意를 파악할 수 없다는 언부진의의 입장에서 최종적으로 득의망언을 도출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득의한 이후에 망언이라고 해석하지만, 오히려 망언이 득의의 전제조건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더욱 중시해야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하여 형식을 부수는 망언이 선행되어야 참다운 성인의 본의本意를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초수좌가 “불계와 도계가 부사의하다.”라고 찬탄한 것을 양개는 철저하게 명언에 천착하고 있는 것으로 본 것이고, 그렇게 찬탄하는 주체는 누구인가를 질타한 것이다. 또한 득의망언이라고 한 것을 두고 초수좌가 병이라고 하자 양개는 도리어 불계, 도계에 천착하고 있는 그대의 병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물었고, 그에 답하지 못한 초수좌는 결국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쳐 홀연히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윤회전생의 병과 불병不病의 본체本體
그런데 위의 문답에서도 병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과 같이 양개는 병과 관련된 선화禪話를 여러 차례 언급하는데, 『조당집』에 실린 전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다.
묻기를, “무엇이 병病입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잠시 연기緣起하는 것이 병이다.”라고 하였고, 다시 “무엇이 약藥입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상속相續되지 않음이 약이다.”라고 하였다.(주4)
묻기를,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부처 병[佛病]이 가장 고치기 어렵다’라고 했는데, 부처가 병입니까? 부처에 병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부처가 병이다.”라고 하였다. 승려가 “부처가 어떤 사람에게 병이 됩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그에게 병이 된다.”라고 하였다. 승려가 “부처가 또한 그를 알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그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승려가 “그를 알지도 못하는데 어찌 그에게 병이 됩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너는 아직도 ‘그의 가풍에 누累가 된다’라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라고 하였다.(주5)
앞의 인용문에서는 연기緣起하여 발생한 중생들의 존재 자체, 즉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끊임없이 상속되어 윤회하는 것을 병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속을 받지 않는 그 어떤 것을 약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의로부터 병과 약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두 번째 인용문에서는 그렇게 윤회를 끊고 열반에 도달하는 가르침에 천착하고 있음을 불병佛病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임제가 “너희들이 만약 부처를 구한다면 바로 부처라는 마구니[佛魔]에게 포섭당하고, 너희들이 만약 조사를 구하면 조사라는 마구니[祖魔]에게 묶이게 된다.”(주6)라는 견해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일본의 혜인이 교정한 『균주동산오본선사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실려 있다.
선사가 병든 승려를 문병하자, 승려는 “화풍火風이 흩어질 때는 어떠합니까?”라고 말하였고, 선사는 “올 때는 무일물無一物이요, 가는 것 또한 그것을 따라 맡긴다.”라고 하였다. 승려가 “늙고 병들면 어찌합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모름지기 병들지 않음[不病]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승려가 “어떤 것이 병들지 않은 것입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깨달으면 조금의 거리도 없고, 깨닫지 못하면 산등성이처럼 멀어진다.”라고 하였다.(주7)
본래 불교에서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병에 걸린다는 사대부조四大不調를 병인病因으로 설정한다. 그에 화풍火風이 흩어질 때, 즉 늙어서 사대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병들면 어찌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불병不病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불병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위의 인용문에서는 무일물無一物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해명의 실마리를 『서주동산양개선사어록』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선사가 태수좌泰首座와 함께 동지冬至의 과자를 먹고 있다가 묻기를, “어떤 하나의 물건[一物]이 있어 위로는 하늘을 떠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세우는데, 검기가 옻칠과 같다. 항상 움직이는 작용[動用] 가운데 있지만, 움직이는 가운데서도 거두지 못한다.”라고 하고 다시 말하기를, “어디에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태수좌는 “허물은 움직이는 작용에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선사는 시자를 불러 과자상을 치우게 하였다.(주8)
여기에서 언급하는 ‘일물一物’은 명확하게 우주의 본체本體, 바로 진여본체眞如本體를 가리키고 있음은 의심할 바가 아니다. 이 본체는 바로 하늘과 땅을 유지하며,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기세간器世間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바로 ‘동용動用’이라고 하겠으며, 그로 인하여 만물이 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물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명확하게 반야의 소상파집掃相破執의 원칙에 배치背馳된다. 이는 반야에서 실상實相을 설정하면서 실상의 상태는 바로 무상無相이라고 하여 실상무상을 논하는 논리와 상당히 유사하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본체의 일물을 논하면서 무일물無一物을 제창하고 있다고 하겠다. 양개가 일물을 물었을 때는 당연히 무일물의 대답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태수좌는 동용에 허물이 있다고 하니, 그대로 시자를 불러 과자상을 치워 버렸다고 하겠다.
양개가 설정하는 불병이나 일물, 무일물 등은 사실상 모두 본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설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불병과 일물, 무일물 등에 천착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망집妄執이 되는 것은 또한 자명한 도리이다. 앞에서 언급한 ‘문살수좌’에서도 초수좌가 말한 불계와 도계는 당연히 부사의하다. 그러나 그에 천착한다면 결코 부사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망집으로 전락하고 만다.
『서주동산양개선사어록』에는 양개가 입적하기 직전에 나눈 것으로 추정되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실려 있다.
승려가 “화상이 병들었는데[違和], 또한 병들지 않는 자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있다.”라고 하였다. “병들지 않는 자는 또한 화상을 간호합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노승은 그와 연분이 있다[有分]고 본다.”라고 하였다. “화상은 어떻게 그를 보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선사는 “노승이 봤을 때는 병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주9)
이로부터 입적에 이르는 노환이 걸렸을 때도 역시 불병을 논하고 있다. 이러한 문답 이후에 양개는 다시 승려들에게 묻기를, “이 몸뚱아리[殼漏子]를 벗어나면, 어떤 곳에서 나와 서로 만나겠는가?”라고 하자 대중들은 답이 없었다.(주10) 그러자 양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보였다.
학인은 항하의 모래처럼 많으나 깨달은 이 하나 없으니
남의 혀끝에서 길을 찾는데 허물이 있구나.
형체를 잊고 종적을 없애려 하겠으나
부지런히 노력하여 공空 속을 걸어라.
學者恒沙無一悟 過在尋他舌頭路
欲得忘形泯蹤跡 努力段勤空裏步
이러한 게송을 남기고 양개는 대중들을 위하여 우치재를 지내고 입적하였다. 양개는 자신이 운암과 헤어지기 전에 물었던 “백 년 후 홀연히 어떤 사람이 선사의 참모습을 찾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라는 것과 유사한 질문을 대중들에게 던졌지만 아무도 답하지 않았고, 그 답답한 심경을 입적게入寂偈에 담았다고도 짐작할 수 있다.
<각주>
(주1) [明]語風圓信, 郭凝之編集, 『瑞州洞山良价禪師語錄』(大正藏47, 521a), “師在泐潭, 見初首座, 有語云: 也大奇, 也大奇! 佛界, 道界不思議. 師遂問云: 佛界, 道界卽不問, 祇如說佛界, 道界底是甚麽人? 初良久無對. 師云: 何不速道? 初云: 爭卽不得. 師云: 道也未曾道, 說甚麽爭卽不得? 初無對. 師云: 佛之與道, 俱是名言. 何不引敎? 初云: 敎道甚麽? 師云: 得意忘言. 初云: 猶將敎意向心頭作病在. 師云: 說佛界道界底病大小? 初又無對. 次日忽遷化. 時稱師爲問殺首座价.” [日本]慧印校, 『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大正藏47, 508c).
(주2) [宋]贊寧, 『景德傳燈錄』 卷15(大正藏51, 322a), “師在泐潭見初上座示衆云: 也大奇也大奇佛界道界不思議.”
(주3) 靜, 筠編, 『祖堂集』 卷6(補遺編25, 421b), “師到氻潭, 見政上座謂衆說話云: 也太奇, 也大奇! 道界不可思議, 佛界不可思議.”
(주4) 앞의 책(補遺編25, 418b), “問: 如何是病? 師曰: 瞥起是病. 進曰: 如何是藥? 師曰: 不續是藥.”
(주5) 앞의 책(補遺編25, 424b), “問: 古人有言佛病最難治, 佛是病? 佛有病? 師曰: 佛是病. 僧曰: 佛與什摩人爲病? 師曰: 與渠爲病. 僧曰: 佛還識渠也無? 師曰: 不識渠. 僧曰: 旣不識渠, 爭得與他爲病? 師曰: 你還聞道, 帶累他門風.”
(주6) [唐]慧然集,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大正藏47, 499c), “爾若求佛, 卽被佛魔攝; 爾若求祖, 卽被祖魔縛.”
(주7) [日本]慧印校訂, 『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大正藏47, 511a), “師看病僧, 僧云: 火風離散時如何? 師曰: 來時無一物, 去亦任從伊. 云: 爭奈羸瘵何? 師曰: 須知有不病者. 云: 如何是不病者? 師曰: 悟則無分寸, 不悟則隔山坡.”
(주8) [明]語風圓信, 郭凝之編集, 『瑞州洞山良价禪師語錄』(大正藏47, 523a), “師與泰首座, 冬節喫菓子次, 乃問: 有一物. 上拄天, 下拄地, 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 且道: 過在甚麽處? 泰云: 過在動用中. 師喚侍者, 掇退菓卓.”, [日本]慧印校訂, 『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大正藏47, 511a).
(주9) 앞의 책(大正藏47, 526b), “僧問: 和尙違和, 還有不病者也無? 師曰: 有. 曰: 不病者還看和尙否? 師曰: 老僧看他有分. 曰: 未審和尙如何看他? 師曰: 老僧看時, 不見有病.”, [日本]慧印校訂, 『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大正藏47, 515a).
(주10) 앞의 책. “師又曰: 離此殼漏子向什麽處與吾相見? 衆無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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