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석 그늘 아래 ]
길(출가)은 다시 길로 이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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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스님 / 2024 년 1 월 [통권 제129호] / / 작성일24-01-05 13:33 / 조회1,946회 / 댓글0건본문
원영스님(하남 정심사 회주)
백련암에 출가하기 위해 온 때가 내 나이 29세 되던 해, 6월쯤인 것 같다. 백련암으로 올라오던 걸음을 ‘백련암’이라는 현판이 있는 건물 앞 문턱에서 멈추고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돌계단이 층층을 이루며 저 아래까지 쭈욱 연이어 있었다. 문득 이런 의문이 솟아나왔다. “나는 지금 여기 무엇을 하러 오는가?” 스스로 답했다. “공부하러 온다.” 그리고 문턱을 넘어서 백련암 안으로 들어갔다.
며칠 후 삼천배를 마치고, 삭발을 하고, 새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님들이 사용하는 큰방에 들어갔다. 밤 9시면 종소리를 듣고 잠들고, 새벽 3시면 그 종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낮에 공양간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도 계속 이 생각이 맴돌았다. “나는 지금 여기 뭣하러 왔는가.” 약 일주일쯤 지나 큰스님께서 문득 저를 보시고서 말씀하셨다. “여기 왜 왔는지 궁금하지? 스님은 공부하는 사람이다. 부지런히 해라.” “예!” 이 대화가 있은 후 모든 생각들이 멀어졌다. 마음이 맑은 하늘 같았고, 간혹 일어나는 기억들은 하늘의 구름 같았다. 그렇게 백련암의 행자 생활은 시작되었다.
공양주 소임과 성철 큰스님의 밥상
내가 맡은 첫 소임은 공양주였다.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이라 매우 힘들었다. 내가 짓는 이 밥을 먹고 스님들은 수행 잘 하고 보살들은 기도 잘 하라는 바람으로 했다. 특히 제사 지낸 후에 남은 음식이 많으면 그 관리가 무척 어려웠다. 백련암에 전깃불은 있었지만 냉장고가 없었다.
하루 세 번 공양을 짓고 함께 운력하는 시간 이외의 개별시간에는 매일 500배 절을 하였고, 또 『부처님의 생애』와 『불교개요』를 읽었고, 『아함경』, 『열반경』, 『화엄경』 등의 해설서를 읽었다. 6개월이 지나 사미계 수계를 했다. 이제 김 행자가 아니고 원영스님이 된 것이다.
소임이 바뀌었다. 큰스님의 공양만 짓는 시찬 소임을 맡았다. 별도의 독립된 공간에서 큰스님의 공양상을 마련하는 것이다. 메뉴는 항상 일정하여 현미밥, 야채국, 콩조림, 사과, 쑥갓 등 야채들이다. 간장, 된장, 소금이 들어가지 않는 공양이다. 항상 일정한 양을 맞추기 위해 눈금 저울을 사용하였다. 큰스님께서 부산으로 나가실 때는 현미밥솥 등 공양도구 일체를 싸 가지고 갔다. 저녁마다 표고버섯 물을 달여 드리면 꿀차를 만들어 잡수셨다. 열반하실 때까지 이 메뉴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출가 후 2년 쯤 되어 봉암사로 가서 해제 동안의 결제에 참석했고, 되돌아와서 곧바로 해인사 선방에 들어갔다. 여름 한 철을 지내고 또 해제·결제를 하기 위해 칠불암으로 출발하는데, 해인사 입구 매표소에서 전갈을 받았다. 백련암으로 전화를 하니 큰스님께서 부산으로 가게 되었으니 시찬은 함께 가라는 것이다.
그 다음해 여름을 또 해인사 선방에서 지내고, 해제 날 다시 칠불암으로 출발했다. 매표소를 지나고, 버스를 타고, 또 바꾸어 타고 하여 칠불암 마당에 도착했다. 이미 전갈이 와 있었다. 큰스님께서 팔을 다쳐서 부산으로 갔으니 곧바로 오라는 것이다. 마당에서 물 한 바가지를 마시고 타고 올라온 그 차로 곧바로 내려왔다. 버스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니 한밤중이었다. 큰스님께서 회복하시어 백련암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수년간 계속 백련암에서 시봉했다.
큰스님의 시자 시절의 영상 기록
부산에서 돌아온 이후 소임이 바뀌어 시자를 하게 되었다. 큰스님 방과 대중 방 사이에 있는 4평쯤 되는 방을 앞뒤로 나누어서 뒤쪽은 원주실이고 앞쪽은 시자실이다. 큰스님 방에서 가장 가까운데 가끔 큰스님이 나오시면서 문을 열어 보시면 혼자 누워 있다가도 얼른 일어났다. 이럴 때면 큰스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스님 방 청소도 하고 방에 군불도 지펴 드리는 것이 소임이였다. 스님들이나 신도들에게 큰스님의 화두를 대신 전해 주기도 했다.
신도들이 3천배 절을 하러 오면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절을 모두 마치고 나면 큰스님께 안내했다. 절을 다 하고서도 큰스님을 만나지 못하고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이분들에게는 왠지 무척 미안했다. 큰스님께서는 절을 모두 마친 사람들에게 언제나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집에 가서도 매일 백팔배 절을 해라.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해 절을 하라고 했다.
간혹 백련암에 와서 큰스님을 만나기만 하면 절실한 일이 해결될 것으로 믿는 사람도 있었다. 혹은 절하는 동안 망상들이 너무도 많이 생겨서 절을 하지 못하는 분도 있었다. 그런 중에도 자꾸 지속하면 마침내 망상이 없어질 텐데. 내가 백련암에 와서 처음 절을 할 때에 내가 그러했다. 큰스님께서 물었다. “절을 하니 어떻더냐?” “생각이 매우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럼 절을 하지 않으면 되겠네.” “예. 이전에는 몰랐습니다.” “앞으로 절을 많이 해라.”
내가 행자가 된 이후 누님이 도반들과 함께 백련암에 절하러 왔다. 누님의 권유로 백련암으로 출가를 했기에 반갑기도 했고, 또 이전처럼 함께 절을 하고 싶었다. 절을 시작하고 얼마 후 원주스님이 와서 말했다. 백련암에서는 행자가 보살님들과 같이 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도법을 신도들에게 가르쳐는 주지만 기도를 신도와 함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80년대 초 한 신도분이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비디오 카메라를 사 주었다.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인데 배터리의 무게가 약 10kg이였다. 큰스님은 이들 새 기계에 대해 무척 흥미를 가지셨다. 원택스님과 번갈아가면서 백련암 마당에서 큰스님의 모습을 비디오 카메라로 찍고는 했다. 일부러 연출을 하면서 찍기도 하고, 겨울에 눈이 오면 찍기도 했다.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법문하시는 모습도 찍었다. 또 백련암을 방문한 대중스님들, 법정스님, 광덕스님의 모습도 찍었다. 훗날 BBS 불교방송국에서 이런 자료들을 편집해서 방송했다.
대학원 진학과 『금강삼매경론』 연구
세월이 많이 지나서 다시 동국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백련암을 떠나 서울 삼정사로 올라왔다. 진학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선문정로』 때문이였다. 큰스님께서 직접 저술한 『선문정로』에서 “참선법이란 곧바로 깨닫는 수행법으로서, 다른 수행법과는 구별되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그 내용이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수행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서로 비교가 가능하고 또 『선문정로』도 바로 이해할 것 같았다. 백련암에서 혼자 여러 책들을 보다가 결국 동국대학교에 진학하기로 작정했다.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책에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지은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선문정로』의 내용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그것조차도 모르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당시 스님들에 대한 종단의 교육으로는 강원교육이 마지막이고 보충교육이나 연수교육이 없었다. 그래서 동국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일종의 연수교육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드렸다. 그리고 영어회화 공부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에 진학하여 스님학생이 되었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입학한 후, 논문 주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지도교수인 김영태 선생님과 의논했다. 당시 나는 《선림고경총서》 번역 작업에 관여하고 있을 때여서 선 문헌에 관련된 것을 택하고 싶었다. 교수님은 원효스님의 『금강삼매경론』에 대한 연구를 해 보라고 했다. 이 책은 아직 연구한 사람이 없고 또 선과도 관련이 크다고 했다. 그러나 선림고경총서 작업 때문에 그 연구는 착수하지도 못했다. 또 교수를 할 마음이 없었기에 크게 성의를 갖지도 않았다.
나중에 미국에서 돌아와서야 비로소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앞부분을 이해했는가 하고 보면 뒷부분과 연결이 되지 않고, 또 뒷부분은 앞부분과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런 속에 결국 이해한 것만으로 논문을 제출해서 학위를 받았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학교를 열심히 다닌 것을 인정하여 학위를 준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스스로는 학문 자체에 대해서 정직해야 한다는 마음이 항상 있었다.
학위를 받은 이후 미국을 오가면서도 항상 『금강삼매경론』을 지니고 다녔다. 틈틈이 생각하고 꾸준히 생각했다. 이리하여 이십 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야 약간은 이해가 되는 듯하다. 『선문정로』에서 말하고 있는 여래선과 조사선의 차이 또는 돈오와 점수 등에 대해 큰스님께 여쭈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큰스님은 계시지 않는다. 애닯고 애달프다.
하남 정심사 창건 인연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한 첫해는 정릉에 있는 삼정사에서 생활했다. 사형인 주지 삼밀스님이 특별히 배려해 주어서 새벽예불만 참석하고는 종일 학교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초파일 연등을 만드는 시기에도 매일 학교에 갔다.
학교에는 채식 식당이 없어서 당근이나 오이를 싸 가지고 다녔다. 이전에도 삼정사에는 사형 스님들이 공부하러 와서 기거를 했다. 주지스님의 마음 씀이 넉넉해서 일반 학생들도 자주 와서 기거했다.
삼정사에 오는 신도님 중, 아주 오래전부터 큰스님의 가르침만을 믿고 신행생활을 해 온 백련화 보살님이 말했다. “큰스님 계실 때 큰스님의 처소를 서울에 만들어 두세요. 그래야 훗날 안 계실 때 스님들이 머물고 공부도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보살님이 소개하는 곳을 원택스님과 함께 가서 보았다. 지금의 정심사 자리이다. 이곳은 그린벨트 지역이라서 건축과 생활에 관련해서 제약이 많다고 했다. 위치가 괜찮아서 그 자리를 정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에서 백련암으로 기도 다니던 보살님들이 중심이 되고 여러 신도분들이 합심하여 이곳에 작은 집을 지었다. 내가 이곳에 생활하면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듬해 부처님을 모셨고, 큰스님께서는 정심사正心寺라고 이름을 지어 주셨다. 광덕스님을 초청해서 점안식을 했다.
이후 원택스님과 함께 가끔 광덕스님께 인사를 갔다. 한번은 『선문촬요』의 편집자에 관해 물어보았다. 광덕스님께서 범어사에 계시면서 출판한 『선문촬요』에는 경허스님이 편집자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경허스님 생전에 『선문촬요』를 편집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스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이렇게 좋은 책을 편집할 수 있는 분은 경허스님뿐이라는 생각에서 당신이 직접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훗날 다른 연구에서는 서산스님이 편집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제 정심사를 운영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절에서 행하는 예불과 제사 등 모든 활동은 백련암과 똑같이 했다. 신도들은 모두 백련암 다니는 분들이였다. 백련암의 서울분원과 같은 곳이었다. 처음으로 마을에 사는 젊은 보살님이 왔다. 불광사 청년부에 다니는데 소문을 듣고 왔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대대로 이 마을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동네에서도 가끔 오는 사람이 생겼다. 동네 분들이 나무를 옮겨와서 절에 심어주었다. 어린이 학교를 열었지만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또 정심사 운영에서 특히 어려운 점은 예불이었다. 백련암 예불은 신도들이 일상으로 행하기에는 예불 자체가 어려웠다. 또 종단의 예불과도 달라서 새 신도들이 익히기 어려웠다. 이 점을 극복하고 보완하기 위해 월운스님과 동주스님을 찾아가서 자문을 받아 두 가지 형식을 함께 수록한 예불집을 새로 만들었다. 이후 몇 차례 변화를 거쳐서 지금 사용하고 있는 예불집을 편집했다. 새벽예불은 백련암 예불 형식인 오정례와 능엄주 독송을 하고, 사시예불은 종단 예불 형식인 삼보통청을 한다. 특히 사시예불에서는 축원을 한다. 저녁에는 백팔참회를 한다. 그리고 아비라기도는 백련암에 가서 함께 했다. 정안사에서는 백련암에 가지 못해서 독자적으로 하는 분들도 있었다.
또 제사 형식에도 어려움과 변화가 컸다. 큰스님께서는 종정이 되신 이후에도 한동안 이전처럼 신도들의 제사에 참석하셨다. 영단에 영가의 위패를 모시고 전경만을 독경했다. 영단에 제사상을 마련하지 않았다.
정심사에서도 이런 형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창건하고서 약 1년 후부터 신도들의 요청이 있어서 결국 영단에 제사상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독경은 오랫동안 전경 독경만 하다가 대적광전을 낙성하고서 종단의 시식 형식을 더하게 되었다.
정심사에서 처음 초파일을 맞이했다. 원암스님 덕분에 마루에 연등을 달 수 있었다. 아직 부처님도 모시지 못하고 사진만을 모시고 법회를 마쳤다. 그래도 우리 절을 갖게 되었다는 마음에 신도들은 모두 기뻐했고 가족들도 많이 왔다.
초파일 법회를 마친 이후 연등 공양금 등을 모두 백련암에 보내려고 했다. 운영은 독립적으로 하지만 이런 큰 법회의 수익금은 모두 백련암에서 관리해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후 원택스님께서 정심사 것은 정심사에서 관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또 정심사 회계를 신도들에게 공개하자고 했다. 공개는 하지만 모든 신도들에게 공개하는 것이 아니고, 신도 대표회의에서만 공개하기로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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