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의 장인을 찾아서]
차 한 사발이 곧 참선의 시작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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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리 / 2024 년 1 월 [통권 제129호] / / 작성일24-01-05 11:13 / 조회1,874회 / 댓글0건본문
혜우전통차제다교육원장 혜우스님
김세리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초빙교수
도시를 벗어나 산사의 사찰을 방문하게 되면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진다. 천천히 사찰의 경내 주변을 돌아보자면 오래되어 닳은 디딤돌도 잘생겨 보이고, 연신 졸졸거리며 흐르는 약숫물 소리도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사철 푸르게 자리하고 있는 차나무는 따뜻한 남쪽의 사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늦가을에 피어나는 작고 흰 꽃의 황금 수술이 유난히 화사해 보인다. 봄이 되면 차나무에 새싹이 올라오게 되는데, 여섯 번째 절기인 곡우穀雨를 전후하여 이 어린잎으로 녹차를 만들면 우전雨前이라 하여 귀하게 여긴다.
불교와 선차문화禪茶文化
사찰에서 차茶는 부처님께 올리는 신성한 음료요, 수행자들의 심신을 맑게 하는 동반자이다. 물론 차가 가지고 있는 약성으로 체했을 때나 감기 기운이 있을 때는 상비약으로도 사용되었다.
불교 안에서 차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당대唐代에는 선불교 일환으로 끽다喫茶라 하여 선승들이 차를 마셨다. 끽다문화는 지식인과 관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자연스럽게 다도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차 마시는 문화는 매일 식사하는 일처럼 일상화되어 ‘다반사茶飯事’라 하였고, 이후 송대의 선종 사찰에서는 다회茶會와 찻자리가 자주 열렸다.
송宋의 자각종색慈覺宗賾 선사의 『선원청규禪苑淸規』에는 차를 대접하는 다탕茶湯의 의례가 기록되어 있으며, 모든 행사의식에서 차의례를 진행하였다. 의례의 차는 좀 더 형식을 갖추도록 하였다. 몸을 단정히 하였고, 서로 간에 읍揖(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들어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공손히 구부렸다가 몸을 펴면서 손을 내리는 예禮)하고 차를 마셨다. 서두르지 않으며 공경스러운 자세로 손님을 대하고, 손님은 손님의 예를 다하였다. 차는 끽다의 일상은 물론 의례와 수행에서 늘 함께 하였으며, 정중함과 정성을 기본으로 하였다.
차를 마시는 다도茶道가 선禪의 생활, 선의 경지와 같다고 하여 다선일여茶禪一如, 선다일여禪茶一如 혹은 다선일미茶禪一味, 선다일미禪茶一味라는 표현을 쓴다. 정성스럽게 마련된 차를 위해 물을 끓이고, 우려내어 한 잔의 차에 최대한 집중하여 마시는 전 과정이 선과 같은 차원에 있다는 뜻이다. 고려시대의 문인이자 유명한 차인인 이규보李奎報(1169〜1241)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차 한 사발은 곧 참선의 시작이라네[一甌卽是參禪始].”라고 한 다시茶詩의 문구에서도 다선일여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설잠雪岑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차의 대가로 한국 차문화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차나무를 직접 키우고, 차를 만들어 지인들과 나누는 것을 즐겼고, 돌샘의 물을 길어 작설雀舌과 용봉단차龍鳳團茶 마시는 것을 마음의 위로로 삼으며 살았다. 그리고 차를 통하여 초탈의 경지에 이르는 모습을 보인다.
장안사長安寺
松檜陰中古道場 소나무 전나무 우거진 옛 도량에
我來剝啄叩禪房 내가 와서 똑똑 선방을 두드리네.
老僧入定白雲鎖 늙은 중은 선정에 들고 흰 구름만 잠겼는데
野鶴移棲清韻長 들판 학 옮겨와 깃드니 맑은 운치 그지없네.
曉日升時金殿耀 새벽 해 떠오를 때 금빛 전각 빛나고
茶烟颺處蟄龍翔 차 달이는 연기 날리는 곳에 숨은 용 날아오르네.
自從遊歷淸閑境 맑고 한적한 경계 두루 유람하면서
榮辱到頭渾兩忘 영과 욕 끝내 모두 잊어버렸네.
『매월당전집』 권10 김시습
한 잔의 차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디서 자란 어떤 차나무인지 또 누가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향미의 차가 탄생하게 된다. 차의 명산지 지리산 자락 피아골에는 불심과 공생의 마음을 담아 차를 만드는 혜우스님이 계신다. 우리 차를 어떻게 만들고 마셔야 하는지 말씀을 들어보았다.
피아골 연곡사 아래 약 1.2km 지점에 ‘혜우 전통 덖음차 제다교육원’이 자리하고 있다. 2005년경 섬진강변에서 개원하였고, 2013년에 이곳으로 이전하였으니 교육원을 유지한 지 어느덧 20여 년이 지났다. 차와의 인연은 훨씬 더 이전이었고, 차를 만들기로 마음먹게 된 것은 1980년대 후반의 어느 봄날이었다. 다구와 차를 들고 빈 암자로 들어갔다. 관음전 뒤뜰에서 차를 한 잔 우려 마시며 봄 풍경을 감상하고 있노라니 무척이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어디선가 짚풀을 물어와 처마밑에 집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바삐 오가기를 수십, 수백 차례가 되었을까. 새는 자기의 터전을 완성하였다.
“새들은 스스로 집을 짓고 사는구나!” 하는 깨달음과 동시에 스님의 승복이며 다구와 책 등 사용하는 모든 것들 중에 스스로 손수 만든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에 자괴감이 들었다. 그것이 차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로는 전력을 다하여 차 만들기에 열중하게 되었다. 제다製茶에 관련된 고문헌을 연구하고 차의 본질을 찾아가는 일에 매진하였다. 차가 약으로 사용되는 이치에 따라 한의서도 함께 보게 되었다.
“우리 녹차의 제다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은 맑은 차로 잘 익혀 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덜 익힌 차는 풋내가 나고 몸 안에서도 강하게 작용하고, 반면 너무 많이 익히게 되면 구수함을 넘어 탄맛에 거슬리게 됩니다. 밥을 짓는 것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쉽지요. 밥이 설익으면 생쌀맛이 나면서 식감도 좋지 않죠.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불편하지요. 반대로 잘 지은 밥은 일단 구미가 당기는 맛 있는 냄새가 나고 윤이 돌며, 단맛이 좋고 속이 든든하고 소화도 잘 되지요. 과하게 지은 밥은 누른 냄새, 탄내가 나기도 하죠. 먹을 수는 있지만 좋은 밥은 아니죠. 녹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적당하게 잘 익혀 낸 차는 좋은 향미를 가지고 목 넘김이 부드러워요. 속도 편안하고 몸도 따듯하게 합니다.”
덜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중도中道의 지점을 찾아 차의 제맛을 내는 일은 하루아침에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여러 차례 차를 덖는 것은 그 과정마다 차가 변화하는 과정을 잘 읽어 내 적확한 기술을 적용해야 한다. 덖는다는 것은 본래 가지고 있는 생엽의 수분을 이용해 찻잎을 잘 익히는 것을 뜻한다. 처음 덖을 때는 찻잎의 산화효소 작용을 정지시키는 것이 주목적이다.
첫 덖음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잎이 부분적으로 불그스름하거나 갈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불 온도의 조절이 중요하고 고열로 발생하는 수증기로 덖는 손이 무척이나 뜨겁지만 차의 충분한 익힘이 우선이기에 차와 함께 익는 손은 함부로 차솥에서 뺄 수 없다. 자칫하면 찻잎이 타기 때문이다. 손으로 가야금 줄을 뜯고 튕겨야 하는 연주자가 처음 입문할 때 손가락 끝에 물집이 생기고, 피가 나고, 굳은살이 베기는 과정이 여러 차례 필요하듯, 차를 만드는 일에도 손이 고온의 열기에 익숙해지기까지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첫 번째 덖음이 찻잎의 익힘에 중점을 둔다면 두 번째 덖음은 성미 변화와 차의 맛과 향을 상승시키는 데 목적을 둔다. 덖음 사이에는 비비는 유념작업과 찻잎의 온도를 떨어뜨리는 시간 모두 적당해야 다음 과정으로 넘어갈 수 있다. 어느 한 과정 덜하지도 과하지도 않아야 한다.
제다 교육의 한 길
혜우스님께서 제다교육원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차 만드는 방법을 많은 농민들과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차를 만들고 싶어 하는 농민들이 차를 배우기 위해서는 이름난 제다인의 작업장에서 일을 도우며 곁눈으로 배우는 식이었다. 차 만드는 제다 과정을 체계적으로 교육받고 싶었으나 그런 시스템이 없었다. 찻잎을 따고 익히는 법을 알게 되더라도 최종적인 마무리 방법이나 노하우는 공개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하거나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 만드는 법을 저마다의 비법으로 삼아 그 기본 기술을 아무도 가르쳐주려 하지 않을 때, 혜우스님은 교육원을 통해 기술과 비법을 농민들에게 아낌없이 알려주고 함께 하고자 하였다. 시작은 수행 기간 중 딱 5년의 시간만 떼어 기술을 전파하고자 했으나 배움과 가르침의 인연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직접 만나기 어려운 이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2006년에는 저서 『다반사』를 출간했다. 차밭 구성하는 것에서부터 제다 과정를 통해 덖음차를 완성하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하여, 실전 제다법 안내서라는 평가를 받았다. 『알고 보면 쉬운 차』, 『첫눈에 반한 차이야기』는 차에 대한 본질적이 이야기와 상식을 더하여 대중들이 차를 쉽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은 책이다.
또한 잘 만든 차는 찻물에 따라 향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물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다. 스님은 개암사 원효방, 두륜산 대흥사, 오대산 상원사, 제주 유수암 등 직접 물 좋은 전국 사찰을 다니며 기록한 『찻물기행』도 출간하였다. 모두 차에 대한 열정과 그것을 대중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고 결과물이다.
혜우스님은 문화의 전파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한다. 문화에 따라 그 사회의 사유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가는 중요하다. 특히 차문화는 불교문화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입지를 가진다. 대중에게 자연스럽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매개체요 포교체이다. 일반인들에게 사찰은 근엄한 곳이라서 문턱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맑은 차맛을 볼 수 있는 정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좀 더 친밀한 마음으로 자주 찾을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 될 것이다.
불가의 차는 대중과 함께 하는 문화이고, 그 맥을 이어가는 일은 숙명과 같은 일이다. 혜우스님은 맑고 건강한 차를 만드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으며, 돌아오는 봄에도 차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알려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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