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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실참실오, 성철선의 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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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3 년 12 월 [통권 제128호]  /     /  작성일23-12-04 15:44  /   조회1,96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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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학교의 교수불자회 회원들과 철야정진법회를 다녀왔다. 마음까지 씻어줄 것 같은 청량한 가을 공기 속에서 저녁과 새벽 예불에 참여하고, 108배도 하고, 참선도 하고, 또 스님의 법문도 들었다. 그리고 다과회라 할까 아니면 토론회라 할까 각자가 불교에 대해 느끼는 소회와 궁금증을 서로 교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중 주된 주제가 “꼭 참선을 해야 깨닫느냐?”는 것이었다. 이 토론에 참여하면서 느끼게 된 것은 교수님들이 불교의 깨달음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로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뛰어난 선지식이 나타나 명쾌하게 법을 설해 주기만 한다면 바로 깨달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깨달음에 대한 간절함

 

물론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없지 않다. 선종의 역사가 스승의 한마디에 바로 깨닫는 사건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육조스님은 “홍인스님의 회상에서 한 번의 가르침을 듣고 말끝에 바로 깨달아 진여본성을 단번에 보게 되었다.” 아마 그 가르침은 “머무는 바 없이 그 생각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금강경』의 바로 그 구절이거나 그것과 관련된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 직후 전법가사가 일개 행자였던 혜능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스님들이 일종의 추격단을 꾸려 육조스님을 뒤쫓는다.

 

사진 1. 오조사 오조홍인 진신전. 

 

그중 걸음이 빨랐던-아마 도를 구하는 마음도 간절했으리라-혜명상좌가 대유령에서 육조스님을 따라잡는다. 그리고 육조스님의 한마디 말끝에 바로 깨닫는다.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이때 어떤 것이 그대의 본래 면목인가?” 혜명상좌가 이 말끝에 바로 깨닫는다. 선의 역사에 기록된 빛나는 장면들은 거의 이와 같다. 그러니까 말끝에 깨닫는 이 일이야말로 선의 근본이다. 뛰어난 선지식이 나타나 명쾌하게 법을 설해 준다면 바로 깨달을 수 있다는 생각이 틀렸다고만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 전제가 하나 있다. 당사자에게 쌓인 간절함의 총량이다. 육조스님은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멀고 먼 여정을 걸어 스승을 찾아갔다. 깨달음에 대한 간절함이 없었다면 그 시대의 정서상 홀어머니를 혼자 두고 고향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가르침을 듣지도 못하고 8개월간 방아만 찧게 되었으니 육조스님의 간절함은 거의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한다. 혜명상좌는 어땠을까? 그는 속세에서 장군이었다. 그리하여 출가 이후에도 임전무퇴,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참선에 임하였다. 그 과정에서 간절함이 커지고 깊어갔음은 자명한 일이다. 만약 누군가 이렇게 알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는 이미 가장 충실한 참선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바람으로 채워진 풍선과 같다. 한숨만 더 불어넣어도 풍선이 터질 찰나가 되면 그것을 터뜨리는 시절 인연이 찾아온다. 그것은 육조스님이나 혜명상좌가 그랬던 것처럼 스승의 한마디 말일 수 있다. 그렇지만 만발한 복숭아꽃일 수도 있고, 대나무에 기왓장 부딪치는 소리일 수도 있다. 지나가는 바람일 수도 있다. 경허스님에게는 그것이 “콧구멍 없는 소”에 대한 질문이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간절함의 총량이다. 그 총량이 충분하면 풍선은 어떻게든 터지게 마련인 것이다.

 

이처럼 까맣게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찰나와 순간을 채우는 것이 참선이다. 이 간절함은 생사를 피할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일어난다.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없을까를 묻는 문제의식에서 일어난다. 왕궁의 성벽을 넘어 황야로 나아간 부처님이 그랬고, 달마스님 앞에서 한 팔을 잘라 바친 혜가스님이 그랬다. “유한하고 상대적인 삶을 넘어 영원하고 절대적인 삶을 살 수는 없을까?”를 물었던 성철스님이 그랬다. 이것이 진짜 참선이다. 그러니까 참선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알 수 없는 이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가의 문제다.

 

사진 2. 초전법륜과 5비구.

 

우리는 생사의 특급 태풍 속에 펄럭이고 있다는 점에서 부처님과 같은 간절함을 일으킬 이유가 충분하다. 그런데 대부분은 불법 인연이 박약한지라 사회적 부귀영화와 명예와 쾌락의 추구에 빠져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장 먼저 우리 삶의 본질이 고통이라는 점을 바로 보는 데서 출발하는 치유의 길, 즉 사성제의 가르침을 펼쳤다. 그러니까 삶의 본질이 고통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성스러운 깨달음의 길을 걷는 출발점이 된다. 그래서 이것을 “고통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라고 부르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가르침을 받아 삶의 본질이 고통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한다면 그것만 가지고도 이미 성인의 길에 들어섰다고 보아야 한다.

 

『구사론』의 네 가지 닦음

 

그런데 고통의 진리성에 대한 인식이 자발적이지 못하거나 충분히 깊지 못하다면 규범화된 수행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참선이나 염불, 다라니 독송 등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실천하되 필사의 마음으로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를 덮고 있는 무지의 껍질에 균열이라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절을 해도 죽을 것처럼 해야 한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3천배를 요구했다. 무릎이 박살 날 것 같고, 손가락 발가락의 마디들이 부러질 것 같은 지경에서도 그것이 남을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염불을 해도 다라니를 해도 생각이 떨어져 나가 주체로서의 나도 없고 대상으로서의 부처도 없는 자리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서 다라니 중에서도 길고 어려운 ‘대불정능엄신주’를 염송하도록 했다.

 

참선은 말할 것도 없다. 성철선에서는 통과해야 할 3단계 관문이 있다. 분별의식이 사라져 좌선을 하거나 움직이거나 간에 화두가 변함이 없게 되었다고 해도(동정일여) 아직 멀었다. 꿈속에 화두가 한결같아도(몽중일여) 아직 멀었다. 꿈조차 없는 잠 속에서 화두가 한결같아도(숙면일여) 도달점은 아니다. 아직 한 겹 뚫고 지나야 할 관문이 더 남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자세로 참선에 임해야 그 한결같음을 성취하고 앞으로 나아가 관문들을 뚫고 지나 우주법계 이대로 대광명인 차원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

 

가장 우선적으로 그 실천이 매일, 매 순간 실천되는 것이라야 한다. 1년 365일, 100년 36,500일 끊어짐 없이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구사론』에서는 이것을 네 가지로 나누어 말하기도 한다. 복덕과 지혜가 완전무결해질 때까지 닦아야 한다. 이것을 ‘남김 없는 닦음[無餘修]’이라고 부른다. 설사 그 닦음이 3아승지겁을 지난다 해도 게으름 없이 닦아야 한다. 이것을 ‘오랜 시간의 닦음[長時修]’라고 부른다. 한 찰나, 한 순간이라도 끊어짐 없이 닦아야 한다. 한 폭의 천과 같이 쭉 이어지는 닦음이라야 한다. 이것을 ‘끊어짐 없는 닦음[無間修]’이라 한다. 자기의 성취를 자랑하는 일 없이 오로지 진리에 맡기는 마음으로 닦아야 한다. 이것을 ‘진리를 존중하는 닦음[尊重修]’이라고 부른다. 

 

사진 3. 곤륜산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흐르는 황하.

 

분별의 딱지들로 이루어진 껍질을 깨는 일 역시 그래야 한다. 남김없이, 오랜 시간을 두고, 끊어짐 없이, 자아의 깃대를 꺾고 진리에 귀순하는 마음으로 스스로의 껍질을 깨야 한다. 이렇게 거듭하여 스스로의 껍질을 깨는 일이므로 우리는 구경각을 ‘깨침’이라고 부른다. 이 순간 모든 분별이 사라져 과거·현재·미래가 지금의 한 찰나에 융합한다. 동서남북의 분별이 사라져 지금의 이 한 지점에 귀속된다. 이러한 ‘깨침’의 상황을 성철스님은 “황하의 물 거꾸로 흘러 곤륜산 정상에 이르고,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대지는 꺼졌다[黃河西流崑崙頂 日月無光大地沈].”고 표현했다. 만유인력의 질서가 무너져 뒤죽박죽이 된 것 같은 풍경이다. 이것은 분별이 사라져 만사만물이 평등불이하게 드러난 현장의 묘사에 해당한다.

 

한편 이렇게 분별의 틀이 완전히 깨진 ‘깨침’의 자리에서 보면 허투루 지나치던 일상 속의 만사만물이 있는 이대로 부처의 드러남임을 알게 된다. 새삼스러운 알아차림이 일어난다. 그래서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새삼스러운 알아차림, 즉 ‘깨달음’으로 되살아난 풍경을 성철스님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했고, “문득 한 번 웃고 고개 돌려 서니, 푸른 산은 여전히 흰 구름 속에 있다[遽然一笑回首立, 靑山依舊白雲中].”라고도 했다.

이러한 ‘깨침’ 혹은 ‘깨달음’은 앎과 이해의 차원을 벗어나 있다. 아니 앎과 이해의 마지막 찌꺼기를 떨어내는 것이 ‘깨침’이고, 그리하여 앎과 이해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진정한 앎에 도달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해야 한다.

 

참선과 깨달음을 불법에 대한 바른 이해로 대체하고자 하는 시도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특히 더해진 것 같다. 심지어 불교는 철학이지 종교가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보게 된다. 학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직접 수행에 임하고 있는 출가수행자들 중에도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알고 이해하는 일만 가지고는 사람이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문지해를 내려놓는 실천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경전을 결집하는 현장에서 아난존자가 축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난존자가 부처님의 말씀은 잘 기억하고 있지만 진짜 법은 모르기 때문에 결집에 참석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쫓겨난 아난존자는 최고의 분발심을 내어 좌선과 경행을 하며 진리와 상응하는 자리에 이르고자 한다. 그때 아난존자는 깊은 수행을 하다가 너무 피곤하여 잠시 눕고자 하여 몸을 눕히려 했는데, 그 순간 머리가 목침에 닿기도 전에 환하게 깨닫게 된다.

 

아난존자의 축출과 깨달음은 여러 율장에도 그 기록이 두루 전한다. 역사적으로 그러한 사건이 분명히 있었다는 말이 된다. 아난존자의 축출사건은 참선과 불교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특히 중요하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당시 아난존자가 실천한 좌선과 경행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원래 아난존자의 문제점은 다문지해에 있었고 그래서 결집장에서 쫓겨났다. 그렇다면 그 쫓겨난 뒤의 수행은 다문지해를 내려놓는 실천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라야 한다. 특히 머리가 목침에 닿기 전에 환하게 깨달았다고 하는데 그 1초가 될까 말까 하는 시간은 참선수행을 이끌던 최소의 의도마저 사라진 순간이었다. 무심의 극치였던 것이다.

 

요컨대 참선은 언어도단, 비사량처의 무심을 바르게 실천하는 실참과 구경의 무심을 실경계로 체험하는 실오 이외의 군더더기를 모두 쳐내는 일 그 자체다. 만약 참선하는 현장에 책과 지식을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겨우 덜어낸 언어와 생각을 다시 쌓는 일이 된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화두를 받아 참선하는 수행자들에게 자상하고 친절한 법문을 베풀었지만, 책을 보고 화두를 정한 수행자에 대해서는 거의 적대적일 정도로 냉랭했다. 그것이 실참실수로 나아갈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 사정이 『성철스님 화두참선법』에 실린 수행자들과의 대화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성철스님은 책보고 화두하는 위험성을 들어 여러 방면으로 꾸짖은 뒤 결론격으로 이렇게 말한다. 

 

“네가 책을 보고 했든지 사람에게 배웠든지 그런 건 안 묻는다 했잖아. 사람에게 배우는 게 좋은데 그건 그만두고, 네가 지금 무無 자를 한다 하니, 내가 한번 물어 보고 싶은 건 조주가 어째서 무라 했는지, 그걸 한번 대답해 보라 이 말이야. 알겠어?…그건 네가 분명히 모르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걸 분명히 모르니, 모르면 알아야 될 게 아니겠어? 그러니 ‘조주가 어째서 무라 했는가? 어째서 무라 했는가?’ 그것만 계속 하란 말이야. 그럼 대강 알겠어?”

 

“조주가 어째서 무라 했는가?” 그것은 생각으로 알 수 없다. 책을 봐도 알 수 없다. 혹시 안다 해도 그것은 추측이고 억지해석이지 조주의 마음을 환하게 본 자리가 아니다. 그러니 스스로 완전히 깨질 때까지, 그리하여 스쳐 지나가던 만사만물이 모두 입을 열어 불법을 설하는 깨달음이 올 때까지 화두만을 계속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이 간화선의 실참실오를 주장하면서 거듭 전하고자 하는 소식이 이것이다. 그것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가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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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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