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일다상용의 화엄철학을 변증법적 사유로 긍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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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3 년 12 월 [통권 제128호] / / 작성일23-12-04 13:42 / 조회1,592회 / 댓글0건본문
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36 | 모택동 ②
중국 근·현대 사상사는 서양 문명에 대하여 중국 독자의 입장에서 대응해 온 역사이다.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중국을 변혁하려는 근대화 운동은 당시 상황에서 피할 수 없는 조치였다. 서양사상이 시대적인 사조로 대두하게 되자, 전통사상 중에서 주자학에 눌리고 있던 불교가 그 누르던 힘의 약화를 계기로 반발하여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근대에 들어와 대승불교가 발전하고, 특히 유식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 맑시즘의 철학적 배경:과학과 형이상학 논쟁
이러한 분위기에서 불교를 포함한 전통사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여러 논의가 분분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중 하나인 1920년대 ‘과학과 형이상학 논쟁[科玄論爭]’은 과학과 형이상학의 관계를 놓고 당시 지식인들이 과학파와 현학파로 나뉘어 논쟁한 것이다.
현학파는 기본적으로 자유의지적 인생관에 근거해 있고, 과학파는 과학적 인생관에 근거해 있다. 현학파에 따르면, 인생관은 절대 통일될 수 없고 변화하는 것이며 살아 있는 것[活] 자체이다. 그들은 철학과 과학의 영역을 구분하여, 가치 세계는 철학의 영역일 뿐 과학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원론은 철학과 과학의 영역을 구분하여 과학파의 과학만능주의에 대항하는 논리적 기초가 된다.
이에 대하여 과학파는 인생관은 경험으로 환원할 수 있으므로 인과율에 지배받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과학적 방법, 과학적 태도, 과학 정신에 기초한 과학적 인생관을 성립시켜야 함을 주장한다. 과학파는 현학파의 주장이 형이상학이라는 ‘검증불가능한 영역’으로 도망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부정하였다. 우리는 감각 범위 밖에 있는 어떠한 정신 실체나 물질 실체에 대해서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증거를 제시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본체론은 모두 교조에 불과한 것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근대불교는 기본적으로 현학파의 입장을 계승하였다. 불교는 신앙으로써 과학의 증명이 필요하지 않고, 현학파는 ‘본체와 현상이 둘이 아니라는’ 불교의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과학파는 현상이 우주의 본체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에서 현상은 감각에 속한다. 즉 주체의 직접적 감각지 외에 모든 것은 실재성이 없다는 것이다. 과학파의 이러한 ‘실증주의’ 관점과는 상대적으로, 우주 본체는 과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인정함으로써 불교는 기본적으로 현학파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현학파의 입장은 동방문화파를 거쳐 근현대불교, 현대신유학으로 이어졌고, 과학주의를 추종하는 과학파의 입장은 맑스주의가 계승하게 되었다. 맑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추종하면서도 자유주의 서양문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서방문화파와 달랐다. 그리하여 근대시기 중국 사상계는 현학파의 입장을 이은 동방문화파, 과학파의 입장을 계승한 중국적 맑스주의, 자유주의 서화파라는 세 파로 나뉘어 존재하게 되었다.
맑스주의의 불교 비판: 지배 질서의 합리화
과학주의를 계승한 맑스주의는 기본적으로 불교가 ‘형이상학적 관념론’이자 ‘직관주의 인식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고, 이 두 측면을 중심으로 비판하였다. 맑스주의는 유물변증법의 입장에서 불교가 변증법의 역사 발전과 어긋나고, 특히 ‘과학적인 근거가 없이’ 만물의 상호 수용을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일 뿐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의식은 반이성주의와 신비주의로 흐르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관념론은 ‘선험적·선천적·선이지적’인 궤변일 뿐이라는 것이 불교를 포함한 전통철학에 대한 비판이었다. 불교의 인식론은 과학적인 인식론이 아니라 한순간의 깨달음을 말하는 비이성적인 ‘직관’을 중시하므로, 사람마다 다 같이 파악할 수 없는 개인적 편견이나 착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과학파가 형이상학파를 비판하는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맑스주의가 보기에 화엄철학에는 소박한 변증법적 사상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역시 상대주의와 궤변론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였다. 대표적인 맑스주의 철학자 임계유는 『중국철학사』에서, 당대唐代의 봉건제도를 유지하려 한 화엄종 승려는 지주계급이고 결코 변증법을 바로 보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변증법의 근본 원칙은 사물의 모순법칙, 즉 대립하는 부분의 통일법칙이다. 그에 반하여 화엄철학은 상호관계와 상호제약, 부분과 전체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엄철학은 변증법의 핵심을 비껴 나가 모순이나 대립하는 부분의 투쟁을 인정하지 않으며, 평정과 조화의 관점에서 추상적으로 사물의 관계를 말한다. 그 결과 선악이나 시비를 포함한 모든 것이 원만무애하게 평화공존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 지주와 농민, 황족과 평민은 모두 우주 관계의 그물에서 빠뜨릴 수 없는 그물코가 된다.
맑스주의가 보기에, 화엄종을 위시한 불교의 목적은 객관세계를 관념론적으로 해하여 객관세계의 물질성을 부인하는 데 있다. 화엄철학은 개별과 전체의 관계를 ‘일다상용一多相用’이라는 관념론적 관점으로 설명함으로써 개별과 일반의 차별을 혼합시키려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상대주의에 근거하여 현실의 지배 질서를 합리화하는 사상일 뿐, 결코 역사 발전을 통해 만인의 평등을 추구하는 변증법적 사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맑스주의의 화엄철학 비판의 핵심이다.
모택동의 화엄철학 긍정: 일다상용의 변증법
모택동毛澤東(1893~1976)은 화엄종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임계유 편 『중국철학사』에 나오는 화엄종 분석에 대한 언급이다. 「모택동철학비주집毛澤東哲學批注集」(1988)의 「화엄종의 상대주의와 궤변론」 챕터에서 모택동은 화엄종의 ‘일다상용一多相用’ 교리의 관점을 분석하고, 화엄철학을 긍정하였다.
화엄종의 교판은 종명이 지시하듯 『대방광불화엄경』에 최고의 진리가 담긴 것으로 믿는다. 『화엄경』은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체험적 진리를 그대로 설법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화엄종 교리는 『화엄경』의 법계法界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법계에는 두 가지 측면, 즉 초월적 진여의 세계인 이법계理法界와 사실적 현상의 세계인 사법계事法界가 있다고 한다.
화엄교판에 따르면, 소승은 오직 생멸하는 사법계만을 알고, 중관학과 유식학에서는 불생불멸의 이법계만을 안다. 천태종에서는 이법계와 사법계가 아무런 장애 없이 섞이는 ‘이사무애법계’를 알고, 화엄종에 와서야 사事와 사事가 두루 섞여 아무 장애가 없는 ‘사사무애법계’를 안다고 한다. 대부분의 중국 철학자들은 화엄종의 이러한 경지를 중국의 학문적 불교 교리가 도달한 정점이라고 극찬한다.
모택동은 불교가 인식사상 과학적이고 엄밀하다고 긍정적으로 판단하였다. 인류 인식의 발전사에서 볼 때, 화엄철학은 인식사의 한 단계로서 인식을 심화 발전시키는 적극적인 작용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주의는 세계의 모든 구체적인 사물들이 상대적임을 인정하지만, 이러한 상대적인 것들 중에 절대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모택동은 변증법적 유물주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상대를 초월한 그 어떤 존재로 절대를 파악할 위험을 경고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화엄종을 상대주의와 궤변론으로 파악하고 비판하는 맑스주의 학자들에게 반박할 여지를 가졌던 것이다.
모택동의 비판계승론적 시각
근대 사상은 동서문화의 충돌이라는 시대적 산물이다. 근대 사상가들은 내적으로는 과거를 변혁하고, 또 외적으로는 서양을 비판하는 동시에 배워야 하는 모순된 과제를 짊어지고 있었다. 맑시즘과 중국 전통사상을 결합한 중국화된 맑스주의라는 모택동 사상의 출현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맑시즘에서는 종교를 관념적인 유희, 또는 민중의 아편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종교는 객관세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주관적인 마음이 만들어 낸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현실감과 역사성, 사회성을 망각하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모택동은 전통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그가 지향하는 사회주의와 불교는 상이점보다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모택동이 ‘맑스주의의 중국화’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모택동은 불교를 교조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무엇보다 불교가 갖는 ‘평등’ 사상에 주목하였다. 모택동의 선불교에 대한 호감은 봉건주의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근대적 가치인 ‘평등’ 개념 때문이었다. 그는 서양 맑시즘의 근대적 평등 개념과 불교의 근원적인 평등을 동시에 받아들임으로써 혁명의 핵심적인 가치를 담보하려 하였던 것이다. 또한 불교의 ‘주관적 능동성’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험난한 역사 속에서 외부 조건의 제약을 넘어서서 내면의 의지로 이를 타개해가는 자세를 불교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리고 그는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의 상호연관을 말하는 변증법과 불교, 특히 화엄철학의 일다상용一多相用의 연기緣起 사상을 연관시켜 화엄철학을 ‘변증법적 사유’로 평가하였다.
실제로 중국 근대사회의 전반적인 변혁 작업에 불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중국 근대에 불교는 전통사상과 서양사상과의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매개체’였다. 모택동은 당시 중국 사회가 필요로 했던 ‘반봉건·반외세’의 과제를 해결하는 혁명 과정에서 불교 사상을 활용하려 하였던 것이다. 모택동의 이러한 유연한 자세는 전통철학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몇 가지 다른 시각, 즉 전통철학을 최고라고 보는 시각과 철저한 비판에 근거한 철저재건론을 거쳐 마침내 도달한 비판계승론적 시각에 근거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불교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긍정이나 비판이 아니라 ‘비판적인 계승’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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