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빛의 말씀]
화두 참구의 원칙과 올바른 참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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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3 년 9 월 [통권 제125호] / / 작성일23-09-04 22:45 / 조회3,019회 / 댓글0건본문
화두는 우리 공부하는 수좌들의 생명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많이 봤으나 화두를 제대로 들고 있는지는 한번 되돌아볼 일입니다.
참선하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우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화두를 만들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두는 반드시 스승에게 지도받아 참구하라
“요새 뭐 선지식이 있기나 하나? 예전 조사스님들이 제일이지. 책 보고 하는 것이 제일이야.”
이러면서 예전 조사스님 어록이니 책이니 하며, 권위가 서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책을 의지해서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책을 의지해서 화두를 정한 것이지 책을 의지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책을 보다가 뭔가 의심이 났다든지 그러면 그것을 화두로 만들어서 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화두라는 것은 반드시 스승에게 배워서 해야지, 맘대로 책을 보고 한다든지 뭘 보고 생각한다든지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맘대로 하다가 잘 안 되는 때가 오면 병이 나는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병이 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첫째는, 화두는 스승에게서 배워서 해야지 맘대로 선택하면 안 됩니다.
한 가지 화두에 몰두하고 이것저것 바꾸지 말라
화두를 배우면 그 화두를 그대로 오래 계속해야 될 텐데 이 화두 하다가 좀 안 되면 저 화두 좀 배워서 저 화두하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안 됩니다. 하나 하다가 잘 안 되니까 또 하나 더 배워서 하면 잘될까 싶어서 배워 해보지만, 해보면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은데 나중에는 헛일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화두를 몇 가지를 배워 이것 조금 해보다 저것 조금 해보다 그러는데 그러면 죽도 밥도 아닌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둘째는, 하나를 배우면 좀 그대로 계속해야지 이리저리 화두를 변경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화두의 뜻을 이리저리 해석하지 말라
화두는 글자 자체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니 글자에만 빠져서는 안 됩니다. 화두는 암호밀령暗號密令이므로 글자 너머에 있는 뜻을 알아야 합니다.
선종에서 유명한 화두 100칙에 송頌을 붙인 운문종의 설두雪竇(980~1052)스님이 공부하러 다닐 때, 어느 절에서 한 도반道伴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즉 ‘뜰 앞의 잣나무’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문득 보니 심부름하는 행자行者가 빙긋이 웃고 있었습니다. 손님이 간 후에 불렀습니다.
“이놈아, 스님들 법담하는데 왜 웃어?”
“허허, 눈멀었습니다. 정전백수자는 그런 것이 아니니,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러고는 이런 게송을 읊었습니다.
흰 토끼가 몸을 비켜 옛 길을 가니
눈 푸른 매가 언뜻 보고 토끼를 낚아 가네.
뒤쫓아온 사냥개는 이것을 모르고
공연히 나무만 안고 빙빙 도는도다.
‘뜰 앞의 잣나무’라 할 때 그 뜻은 비유하자면 ‘토끼’에 있지 잣나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 눈 뜬 매는 토끼를 잡아가 버리고 멍텅구리 개는 ‘잣나무’라고 하니 나무만 안고 빙빙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무 밑에 가서 천년 만년 돌아봐야 그 뜻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금 전에 말했듯이 ‘화두는 암호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생각나는 대로 이리저리 해석할 수 없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두의 문자에 현혹되지 말라
화두에 대해 또 좋은 법문이 있습니다. 불감혜근佛鑑慧懃(1059~1117) 스님의 법문입니다.
오색비단 구름 위에 신선이 나타나서
손에 든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
누구나 빨리 신선의 얼굴을 볼 것이요
신선의 손에 든 부채는 보지 말아라.
신선이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빨간 부채로 낯을 가렸습니다. 신선을 보기는 봐야겠는데, 낯 가리는 부채를 봤다고 신선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화두에 대해서는 모든 법문이 다 이렇습니다. ‘정전백수자’니 ‘삼서근’이니 ‘조주무자趙州無字’니 하는 것은 다 손에 든 부채입니다. 눈에 드러난 것은 부채일 뿐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신선 본 사람이 아닙니다. 빨간 부채를 보고서 신선 보았다고 하면 그 말을 믿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뭐꼬 화두를 참구할 때 조심할 점
‘이뭐꼬’ 화두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대부분 ‘이뭐꼬’ 화두를 든다고 하면 그저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는데,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으면, “이것이 무엇인고?” 하면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앉아 있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이러다 보면 한 곳에만 마음을 두고 그 고요함에 빠져버리는 폐단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뭐꼬’라는 화두 자체가 경계가 되어 “내가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병폐가 따라붙습니다.
또 어떤 경우가 있는가 하면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하기도 하는데, 이러면 그저 보고 듣고 하는 경계를 따라서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서 마음이 산만해지는 병폐가 또 생깁니다.
그래서 ‘이뭐꼬’를 할 때는 이 병폐 저 병폐를 없애기 위해 예전 조사스님들은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니, 그러면 이것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야 들여다볼 수도 없고 경계에 따라서 이리저리 따라갈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한 20년 ‘이뭐꼬’ 화두하다가 포기하는 사람도 더러 봤습니다. 자꾸만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은 무엇인고, 하고 따라다니다 보니 마음이 산만해지고 결국 안 되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이냐?” 하더라도 ‘이것’만 바로 알면 마음이나 물건이나 부처도 무엇인지 바로 알 수가 있는데,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병폐를 얻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뭐꼬’ 하다가 막히는 사람이 찾아오면 ‘이뭐꼬’를 아주 버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병폐가 깊이 든 사람에게는 아예 버리라고 하고 완전히 다른 화두를 가르쳐 주지만, 화두 좀 들었다 싶은 사람에게는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알려주면 좀 달라지곤 합니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화두도 그렇습니다.
“부모한테 몸 받기 전에는 과연 내가 뭐였던가?” 그렇게 하는데 그냥 “뭐였던가?” 이러는 것보다 “부모한테 몸 받기 전에 어떤 것이 나의 본래 면목인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예전 조사스님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어떤 것이 나의 본래면목인가[如何是 余本來面目]?” 이렇게 하셨습니다.
육조스님도 도명道明스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 바로 이러한 때에 어떤 것이 너의 본래면목인가?”
이때에도 ‘본래면목’을 묻는 것이 아니라 ‘여하시’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어떤 것이’를 묻는 것입니다. 내가 뭐였는가를 자꾸 생각하다 보면 소였는가, 개였는가, 하는 그런 생각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뭐였던가?”에 집중하지 말고 “어떤 것이 나의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인가?” 하면서 ‘어떤 것’이라고 하는, 이 ‘여하시如何是’를 기억해야 합니다.
대나무 소리에 깨달은 향엄선사
예전에 향엄香嚴(?~898)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본래 백장百丈(749~814) 스님 제자였습니다. 백장스님이 입적하시고 나서 같은 백장스님 제자인 위산潙山(771~853) 스님한테 가 있는데, 향엄스님의 총명함과 말재주에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그런데 위산스님이 가만히 보니 아무것도 공부가 없는데도 그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향엄스님을 불렀습니다.
“네가 총명이 제일이고 변재辯才가 제일이어서 천하제일인데, 내가 물으면 대답 못 하는 게 뭐 있겠는가? 그래도 내가 한 가지 물을 테니 이걸 한번 대답해 봐라.” 하고는 본래면목을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너의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냐?”
향엄스님이 다른 것은 다 물어도 대답을 했는데 이 질문에서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막혀버렸습니다. 향엄스님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위산스님이나 나나 사람은 똑같은데 위산스님은 큰스님 되어서 큰소리 탕탕 치니, 나는 이제 어디 가서 굶어 죽을지라도 다시는 선방 밥 안 먹고 어디 토굴에 들어앉아 화두나 얼른 해서 공부를 성취해서 나오리라.”
그러고는 도망치듯 나와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책을 전부 다 찾아봤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어떤 것이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인가?”에 대한 답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불을 지르고는 남양혜충南陽慧忠(?∼775) 국사가 계시던 유적지에 갔습니다. 혜충 국사는 40년 동안이나 산중에서 안 나온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본을 따르기 위해서 그곳에 가서 공부하는데, 하루는 풀도 뽑고 마당을 치우다가 던진 기와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향엄격죽香嚴擊竹’, 향엄스님이 대나무 소리를 듣고 깨쳤다고 합니다.
부모미생전 화두를 공부할 때는 “부모 몸 받기 전에는 나는 뭐였던가?” 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어떤 것이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인가?” 이렇게 해야 합니다.
무자 화두를 들 때 주의할 점
화두 이야기 하면 조주스님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無]”고 한 ‘무자無字’ 화두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흔히 “무자無字, 없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하면서 의심을 하는데, 무자 화두할 때는 그냥 “무자無字, 없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러지 말고, “조주스님이 없다[無]고 했는데 어째서 없다[無]고 했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화두의 근본정신입니다.
무자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들을 하는데, 그중에 흔한 이야기가 “모든 것에는 불성이 다 있는데 조주스님은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했는가?” 하면 의심 나기가 쉽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하면 상대적인 유무有無의 수준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이것이 있다 없다, 불성이 있는 것이 전부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부처님은 불성이 있다 하셨는데 왜 조주스님은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나, 하는 유무 상대의 개념이 세워집니다.
하지만 조주 무자에 대해서 예전부터 스님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무有無의 무無도 아니고 진무眞無의 무無도 아니다.”
있다·없다의 없음도 아니고 참 없음의 없음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는데 조주스님은 왜 개에게는 없다 그랬는가?” 이러면 화두가 깨져 버립니다. “어째서 없다[無]고 했는가?” 이렇게 할 때 “있음과 없음[有無]의 없음[無]이 아니다!” 이러면 이 화두가 깨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유무有無를 떠나서, 조주스님이 분명히 없다고 했는데 어째서 없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조주가 없다고 한 이유를 모르니, 어떻게 했든지 “어째서 없다고 했는가?” “어째서 없다고 했는가?” 그렇게 자꾸 해 나가야지, 그 없다[無]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서 자꾸 분석하면 안 됩니다.
너무 조급하거나 너무 느긋하지 않게
그런데 화두를 참구하다 보면, 화두를 아주 조급하게 밀면 좀 되는 것 같고 허술하게 밀면 안 되는 것 같고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성질 급한 사람은 마음이 조급해지고, 이러다 보면 나중에는 공부가 문제가 아니라 머리가 아픈 병도 생겨서 아무 것도 안 되고 맙니다. 거문고 줄을 너무 조이면 팽팽해서 제 소리가 안 나는 법이고, 또 너무 풀면 느슨해서 소리가 안 나는 법입니다. 그러니 너무 급하게도 하지 말고 너무 느리게도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조주가 어째서 무라 했는가?” 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잘 안 된다고 자꾸 어째서, 어째서, 하면서 성급하게 하다 보면 상기병上氣病이 생겨서 고생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서두르다 병 생긴다고 너무 느슨하게 하면 자꾸 마음이 가라앉아 공부가 안 되고 맙니다. 그러니 너무 급하게도 하지 말고 너무 느리게도 하지 말고 거문고 줄 고르듯이 “어째서 없다[無]고 했는가?”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화두 참구는 생각하고 의심하는 것이지 외우는 게 아닙니다. 너무 급하게도 생각하지 말고 너무 느리게도 생각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좀 어렵긴 하지만 자꾸 해 보면 요령이 생깁니다. 화두는 외우는 것이 아니고 어째서 없다[無]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 『성철스님 화두참선법』(장경각, 2016)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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