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태백산 각화사에서 선풍 진작을 도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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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3 년 9 월 [통권 제125호] / / 작성일23-09-04 22:25 / 조회2,377회 / 댓글0건본문
은암당 고우스님의 수행 이야기 23
고우스님은 한국불교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의미가 깊었던 해인사 선화자 수련법회를 잘 치르고 다시 태백산 각화사로 돌아갔다. 이후 스님은 제방의 여러 선원을 두루 다니시며 참선 정진에 몰두했다.
1993년 무렵 고우스님은 출가 본사인 김천 수도암 선원으로 다시 돌아가서 안거 결제에 들어갔다. 당시 수도암은 해인사 주지를 지냈던 법전스님이 불사를 잘 하고 선원을 건립하여 수행 환경이 좋았기 때문에 수좌들에게 인기 있는 수행 도량이 되었다. 수도암 선원에서 정진하던 어느 날, 뜻밖에 봉암사 소식이 들렸다. 고우스님은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봉암사’라는 말만 들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그만큼 봉암사에 애정이 깊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 가운데 희양산문으로 개산한 봉암사는 일제강점기를 맞아 쇠락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광복 후 1947년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이 주축이 되어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로 봉암사 결사를 단행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쟁으로 결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다행히 1969년에 이르러 고우스님과 수좌 도반들이 뜻을 모아 제2 봉암사 결사를 하면서 수좌들의 수행도량이 되었고, 대한불교조계종 종립 봉암사 태고선원으로 지정되면서 선풍을 되살리는 도량이 되었다. 그런 역사적 사연으로 인해 고우스님은 봉암사를 떠나 제방선원에서 정진하면서도 봉암사의 수행 종풍을 지키는 것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결제 중 봉암사 내홍을 수습하러 나서다
고우스님이 수도암에서 안거 중이던 어느 날, 봉암사에 큰일이 나서 조실 서암스님과 주지가 결제 중에 절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표적인 수좌스님들의 수행도량에서 안거 결제 중이던 봉암사에 사달이 난 것이다. 당시 봉암사 결제 대중과 주지 스님 사이에 불사를 두고 갈등이 일어나 대중이 공사를 열어 주지를 내보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지가 떠나자 조실 서암스님은 이런 대중의 움직임이 못마땅하여 결제 중에 스스로 절을 나가 원적사로 가버리셨다. 그리하여 봉암사는 수좌 대중이 스스로 ‘계엄군’이라고 칭하며 절 운영을 하고 있었다.
한국 선을 상징하고 수좌들의 자부심이라는 봉암사 문제는 일개 사찰의 문제가 아니라 수좌계 전체의 일이었다. 그래서 수도암 결제 대중은 해제를 20일 남짓 앞두고 선납회 대표인 고우스님에게 봉암사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알아보고 오라고 청했다. 이렇게 하여 선납회 대표 고우스님과 도반들이 사태 수습을 위해 봉암사로 갔다. 고우스님은 봉암사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원적사에 머물고 계시던 조실 서암스님을 먼저 찾아뵈었다. 조실스님은 수좌들이 법당을 선방으로 하자고 하는 걸 법당은 법당대로 해야 한다고 하니 주지를 내쫓았다면서 황망해 하셨다.
고우스님은 조실스님의 뜻을 확인하고는 봉암사로 향했다. 다만 결제 중이니 바로 봉암사로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서 선납회 대표 자격으로 들어가도 좋은지 대중에게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봉암사 결제 대중들은 대중공사를 열어서 선납회 대표의 봉암사 방문을 수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우스님은 봉암사로 들어가서 수좌 대표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그때 수좌 대중을 대표하는 분이 입승을 맡고 있던 불산스님이었다. 협상결과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고 봉암사 주지와 봉암사 결제 대중이 모두 봉암사를 떠나기로 합의하고 이 문제를 선납회 구참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이 나서 정리가 되어갔는데 다시 문제가 하나 생겼다. 해산하는 수좌 중에 다음 안거를 신청하는 수좌는 봉암사 재방부를 받아주기로 한 것이 실수였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었다. 그러니 봉암사 결제 수좌 3분의 1이 남아 재방부를 들이게 되었다.
고우스님은 조실 서암스님께 수좌 대표와 협상과정을 다 보고 드리고, 조실스님의 승낙을 얻어 합의를 했다. 문제는 수좌 일부가 다시 봉암사에 남게 되자 조실스님은 고우스님이 수습을 잘못했다고 생각하여 두 분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졌다. 고우스님은 공심으로 결제 중에 나와서 조실스님과 수좌들의 갈등을 중재하여 합의로 원만하게 마무리했는데, 조실스님이 오해하시니 달리 도리가 없었다.
1993년 11월 성철 종정께서 입적하시고 그 뒤를 이어 서암스님이 종정이 되셨다. 그러나 1994년 봄에 갑자기 종단 개혁불사가 일어나 전국승려대회가 열렸고, 당시 총무원장과 같은 입장에 섰던 종정 서암스님이 위태롭게 되었다. 그때 고우스님은 통영에 있었다. 그 와중에 다시 수습에 나설지 말지를 망설였지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망설이지 않았겠지만 봉암사 일을 겪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결국 전국승려대회가 열려 종정 서암스님이 탄핵당하는 조계종 역사에서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그 뒤 노장은 태백산 토굴에서 만행하는 등 초야에서 떠돌다가 시일이 흘러 2001년에 봉암사 수좌들이 다시 조실로 모시게 되었다. 그때 서암스님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고우스님은 그동안의 인연을 정리하고자 병원으로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자 노장은 아무 말 없이 고우스님의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출가 이후 은사처럼 따랐고 누구보다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당대의 선지식 서암스님과의 인연은 그러했다. 아마도 고우스님이 출가 이후 은사보다 더 가까웠던 서암스님과의 인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우스님은 노년에 인생을 살아보니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고 하셨다. 그래서 당신은 신도들이 너무 가까이 오면 일부러 밀어낸다고 하셨다. 서로 관계를 유지하는 방편이었다.
제2의 봉암사 수좌도량 태백산 각화사
봉암사 일을 치르고 고우스님은 제2의 봉암사를 생각하였다. 마침 태백산 각화사가 적격이었다. 봉화 각화사는 백두산에서 내려온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갈라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사이 깊고 큰 산에 둘러싸인 천혜의 수행 도량이다. 근세에 이름난 선지식 중에 각화사를 거쳐가지 않은 분이 없다 할 정도로 수많은 도인이 나온 도량이 각화사다. 고우스님과도 인연이 깊었다. 고우스님은 각화사의 교구본사인 고운사 근일스님에게 부탁해서 각화사를 수좌 정진 도량으로 만들자고 뜻을 함께하여 1991년에 새 주지로 동춘스님을 모셔왔다.
동춘스님은 고우스님의 선배 수좌로 참선하며 불사를 잘 하시는 분이었다. 각화사 주지로 오기 전에 봉암사에서도 불사를 크게 하였고, 각화사 주지를 맡아서도 태백선원의 불사를 하였다. 동춘스님의 불사를 기반으로 고우스님은 태백선원의 청규를 만드는 등 운영을 맡았다. 각화사는 이전부터 뜻 맞는 수좌들이 삼삼오오 자율 정진하던 도량인데, 선원이 지어지면서 시간과 청규를 정해서 선방에서 같이 정진하기 시작했다. 여름에는 14시간, 겨울에는 17시간 가행정진을 했다. 하루 24시간 중 좌선 시간이 14시간~17시간이 되니 보통 수좌들은 오지 못했고 오직 공부에 뜻이 있는 수좌들이 각화사에 모이게 되어 자연 공부 분위기가 갖춰져 갔다.
그렇게 각화사에 정진 열기가 고양될 무렵 고우스님과 수좌 대중은 2002년 동안거부터 결제 해제 없이 15개월 15시간 가행정진 결사에 뜻을 모았다. 각화사의 가행정진 가풍은 1999년 동안거부터 시작되었는데, 3년이 지나 15개월 15시간 가행정진 결사를 시작한 것이다. 이 결사에 방부를 들인 대중은 30명 가까이 되었다. 주지스님 등 소임자들은 15개월 동안 하루도 쉼 없이 정진 대중공양과 외호를 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고우스님은 선원장 소임을 맡았지만, 주로 초하루 보름이나 선원에 대중공양 오는 불자를 위해 소참법문을 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고우스님은 이미 육십이 훌쩍 넘었다. 그때 각화사에 새 주지로 대승사 주지와 선원장을 하던 철산스님이 와서 절은 눈에 띄게 활기차게 되었다.
한 재가거사가 찾아오다
2002년경 세속에는 한·일월드컵 열기가 뜨거웠던 8월 어느 날 고우스님에게 조계종 총무원 기획과장이라는 거사가 찾아왔다. 그 거사는 실상사 도법스님이 추천했다면서 불교와 종단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날카롭게 했다. 거사는 그날 밤 늦게까지 차담을 나누고 서암에서 하룻밤 자고 갔다. 그 뒤 자주 서암을 오게 되었고, 각화사 가행결사 때는 많은 기자들과 같이 와서 깊은 산중 각화사 공부 소식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그 이가 바로 당시 총무원 기획차장 박희승(후일 중효中曉라 법명을 주었다) 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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