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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심리학의 만남]
성性의 불교심리 치료적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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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조  /  2023 년 9 월 [통권 제125호]  /     /  작성일23-09-04 22:12  /   조회2,17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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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까지 심의식心意識의 기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심心은 저장하는 기능, 의意와 식識이 세트가 되어서 지속적으로 업을 산출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기능 외에도 마음이 원래 가지고 있는 특징 자체가 기능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마음의 원래의 특징을 성性이라고 한다. 심의식이 동의어라고 할지라도 그 기능의 차이 때문에 이들을 구분하였듯이, 마음의 기능에 성性이라는 기능을 추가한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마음을 심의식心意識으로 구분하여 보았지만 필자는 여기에 성性을 더하고자 한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마음의 원래의 특징을 기능으로 하는 성性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성性의 의미 

 

심의식은 초기불교에서부터 마음의 기능으로 역할을 한다면, 성性은 대승불교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성은 마음의 원래의 특징을 말한다. 성으로 분류될 수 있는 마음의 특징은 다양한 용어로 나타낼 수 있다. 심의식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서 다른 기능을 하듯이, 성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라도 다르게 표현된다면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무아無我를 원래의 의미에서 보면 ‘아我’는 아트만의 ‘아’이다. 붓다가 말하는 무아는 자아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통적 맥락의 우파니샤드적인 아트만이 없다는 의미이다. 인도 전통철학의 대명사인 아트만을 부정함으로써 붓다는 혁명적인 사상적 기치를 내건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아트만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부정하는 것으로 무아의 의미가 확장될 수 있다. 아트만의 가장 큰 특징은 고정 불변하는 실체성(substantiality)이다.

 

인도 전통철학에서는 아트만을 실재한다고 본 것이고, 붓다는 실체적인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실체(substance)와 실재(reality)의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관점에 따라서 실체가 실재이기도 하고, 실체가 비실재가 되기도 한다. 우파니샤드적 관점에서 실체적인 ‘아’는 실재이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실체적인 ‘아’는 비실재이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비실체적인 법法이 실재이다.

 

무아는 존재론적 관점, 인식론적 관점, 인간론적 관점 등 모든 관점에 적용된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존재를 의미하는 법法의 가장 큰 특징은 생멸성, 비실체성, 무아성이다. 인식론, 인간론에서도 온처계蘊處界는 모두 무아 즉 비실체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음 또한 비실체적이고 무아이다. 무아의 관점은 마음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에 적용되는 특징이다. 이후에 등장하는 마음의 특징에 관한 불교의 용어들은 이를 기반으로 각각의 기능적 특징을 가지고 등장한다.

 

공空은 무아의 다른 표현이다. 공은 초기경전부터 등장하는 용어이지만, 대승경전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무아가 ‘아’를 부정한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는 반면, 공은 부정의 모토를 감추고 있다. 그러기에 공은 부정어가 없는 긍정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공은 원래 비어있는 이미지를 형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이 가지고 있는 어감으로 인해서 공허, 허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공은 모든 존재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한 글자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공은 마음에도 적용이 된다. 공은 마음의 비실체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오온개공五蘊皆空’에서 마음을 포함한 인간 전체, 존재 전체의 비실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무아, 공이 부정적인 어감을 가지고 있다면 실상實相이라는 용어는 존재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모든 존재의 비실체성이 실상實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실상은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비실체성이 모든 존재의 실제 모습, 리얼리티(reality)라는 것이다. 이러한 실상은 그러한 것이고, 그러그러한 것이고, 참으로 그러한 것이다. 여如, 여여如如, 진여眞如이다. 비실체적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할 수 없으므로 ‘그러하다’는 표현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마음도 역시 그러한 것으로 비실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지智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지이다. 오식, 육식, 칠식, 팔식 각각이 비실체적인 성소작지, 묘관찰지, 평등성지, 대원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식이 변해서 지를 얻는 것은 실체성에서 비실체성으로의 구체적인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법계法界는 마음의 특징을 법의 특징으로 본 것이다. 법의 원래의 특징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세계인 법계가 마음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특징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법계가 가지고 있는 생멸성이 마음의 비실체성을 대변한다. 지智가 앎의 측면에서 비실체성을 대변하고 있다면, 법계法界는 세계의 측면에서 비실체성을 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무자성無自性, 자성自性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초기 중관불교에서 자성은 실체성을 의미하고, 이러한 자성이 없다는 것, 즉 무자성이 중관불교의 모토가 되었다. 하지만 중기 중관불교에서는 무자성이 자성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실체성이 없는 것이 원래의 성질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자성을 실체성으로 해석할지, 원래의 성질로 해석할지에 따라서 반대의 의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긍정적인 표현으로는 불성佛性이 있다. 불성은 부처의 성질,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인도불교보다는 중국불교에서 만개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의 가능성으로 가장 먼저 제시되는 것이 부처의 마음이다. 부처의 마음이 원래의 마음이고, 이 마음이 단지 번뇌에 의해서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마음의 특징에는 의인적인 표현이 없다. 첫 의인적 표현으로 부처가 등장한다. 부처의 마음이 곧 무아, 공, 실상, 여여, 무자성, 자성의 마음인 것이다.

 

사진 1. 『단경』을 통해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를 설파한 혜능대사.

 

선종에서는 불성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네 안에’ 있는 부처의 가능성을 실현하라는 것이다. 이는 불성사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측면이 있다. 『단경』에서 혜능이 가장 심한 꾸지람을 내리는 부분이 있다. 신회가 자기 안에서 불성을 찾지 않고 밖에서 불성을 찾는 것을 보고서 혜능은 『단경』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을 한다. 이때의 자성은 자불성自佛性의 줄임말로 네 안에 있는 불성, 즉 네 안에 있는 원래의 성질을 찾으라는 것이다. 불성도 밖에 있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단경』에서 자성을 찾으라고 할 때, 자성은 ‘너의’ 원래의 성질을 찾으라는 것이다. 자성自性, 자불성自佛性, 본래면목本來面目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아무리 불성이라고 할지라도, 밖에서 불성을 찾을 때는 가차 없이 거부한다. 타불성이 아니라 자불성이라는 의미로 자성을 이야기한다. 부처는 외래적인 존재가 아니라 내재적인 존재로 나아가게 된다. 

 

마음이 가진 원래의 특징을 의미하는 성性은 하나의 의미를 가지지만,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된다. 아트만과 관련해서는 무아를 사용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로는 공을 사용하고, 이러한 무아가 원래의 모습이라는 의미에서 실상, 여여가 사용되고, 인지적으로는 지를 사용하고, 세계적으로는 법계를 사용하고, 의인적으로는 불성을 사용한다. 고정불변의 자성이 없다는 의미로 무자성, 이러한 무자성이 원래의 특징이라는 의미로 자성을 번갈아 사용한다. 불성을 자신 안에서 구한다는 의미로는 자불성, 자성을 사용한다. 이들 모두 마음의 원래 특징을 드러내지만 그 맥락에 따라서 다양한 용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불교심리치료적 함의

 

심의식心意識이 마음에서 업의 생산, 저장, 교환기능을 드러낸다면, 성은 마음의 원래의 기능을 드러낸다. 마음의 원래 기능이면서 마음의 원래 특징이기도 하다. 마음의 원래의 특징, 기능을 드러내고 있기에 심리치료적 함의는 분명하다. 마음의 원래의 기능으로 돌아가는 것이 심리치료의 목표가 되고, 이를 위한 다양한 방법론이 심리치료의 기제가 될 것이다.

 

심의식心意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업이 존재한다. 이러한 업이 마음의 원래의 기능, 특징에 부합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심의식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업이 비실체적이라면, 이들은 성性에 부합하는 것이 된다. 반면 이러한 업들이 실체적이라면, 이들은 성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고, 이로 인해서 괴로움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다양한 업은 심心·심소心所의 구분에서 보면 심소에 해당한다. 이러한 심소가 심의 본래적 특징을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가 문제가 된다. 이 구분은 붓다 자신도 가장 어려운 구분이라고 할 정도로 어렵다. 그러나 마음과 마음작용의 구분으로 인해서 불교의 모든 치유의 가능성이 등장하게 된다. 마음작용의 특징이 마음의 특징과 부합하면 되는 것이고 마음도, 마음 작용도 비실체적이면 되는 것이다. 무아이고, 공이고, 실상이고, 여여이고, 지이고, 법계이고, 불성이고, 자성이면 되는 것이다.

 

마음의 원래적 특징에 반하는 마음작용의 실체적 특징을 번뇌라고 한다. 성性에서의 심리치료적 함의는 ‘번뇌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모든 수행법은 번뇌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법이 다양한 것은 번뇌의 종류가 많다는 것이고, 수행법을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는 것은 번뇌에 대한 태도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제시하는 지관止觀에서 선불교에서 제시하는 정혜定慧까지, 대치법에서 염불에 이르는 모든 수행법이 번뇌를 다스리는 것에 중점을 맞추고 있다.

 

서구심리학에서는 인지, 정서, 행동, 동기, 성격 나아가서는 의식, 무의식에 따라서 심리치료법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반면 불교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구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들 전체에 대한 치료법은 번뇌를 다스리는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번뇌는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실체성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실체성에 대해서 인지적으로 무지한 것이 치痴이고, 이러한 실체성으로 인해서 정서적으로 끄달리는 것이 탐진貪瞋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탐진치라는 근본번뇌를 다스리는 것에서 세부적인 번뇌를 다스리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여기에서 지관의 방법이 대표적이라면, 이와는 다른 방법으로 일체 번뇌를 없애는 방법에 따른 분류가 제시되고 있다. 봄으로써, 단속함으로써, 수용함으로써, 감내함으로써, 피함으로써, 버림으로써, 수행으로써 없애는 번뇌들이 있다. 다르게는 대치법으로 번뇌를 없애는 방법이 있고, 또한 전식득지의 방법이 있다. 칠식의 ‘아’ 중심의 번뇌를 없애고, 팔식에 새로운 명언종자를 심는 것으로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다. 초기, 부파, 유식불교는 이처럼 마음의 작용인 번뇌를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마음 자체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에 중점을 두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방법론에서는 번뇌를 객진번뇌라고 부른다. 마음을 중점으로 두고 있기에 번뇌는 객客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마음의 원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작용의 비실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중관불교에서는 타인이 실체성을 주장하는 경우 항상 비실체성을 드러내는 방법을 제시한다. 언어 자체의 한계로 인해서 비실체성을 단독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실체성을 논파하는 방식으로 항상 비실체성을 드러낸다. 

 

선불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언어에 의지하지 않고, 당하當下에서 비실체성을 드러낸다. 그 대표적인 방법론으로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를 볼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이 없고, 상이 없고, 머무는 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염이무념念而無念, 상이무상相而無相, 주이무주住而無住 즉 생각을 하면서도 생각하는 바가 없고, 상이 있으면서도 상이 없고, 머물면서도 머무는 바가 없는 것이 된다. 즉 생각을 할지라도 실체적인 생각이 없고, 상을 지으면서도 실체적인 상이 없고, 머물면서도 실체적인 머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무심無心 즉 심이무심心而無心이 된다. 마음을 쓰면서도 마음씀이 없는 것, 즉 마음을 쓰더라도 실체적으로 쓰지 않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선종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비실체성을 일관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사진 2. 덕이본 『육조단경』.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性이 함축하고 있는 심리치료는 심소, 특히 번뇌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려 있다. 번뇌를 제거하는 방법에 있어서 번뇌를 다양한 방법으로 제거를 할 것인지, 번뇌의 비실체성을 강조하면서 마음의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둘 것인지의 두 가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경우라도 마음의 비실체성이라는 성性에 기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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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조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ㆍ석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석ㆍ박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불교상담학전공 지도교수. 한국불교상담학회 부회장, 슈퍼바이저. 한국불교학회 부회장. 저역서로 『불교심리학연구』, 『불교의 언어관』, 『불교심리학사전』 등이 있다.
heecho12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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