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백흥암과 운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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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3 년 9 월 [통권 제125호] / / 작성일23-09-04 21:44 / 조회2,343회 / 댓글0건본문
팔공산 은해사 ③
절을 둘러보고 다시 은해교를 지나 일주문 쪽으로 걸어가면 오른쪽에 일암선사一庵禪師(1825?~1830?)의 부도를 비롯한 다수의 부도들과 승탑비, 사적비, 공덕비 등이 있는 부도림浮屠林이 있다(사진1). 영파성규影波聖奎(1728~1812) 대사, 일암선사, 일타日陀(1928~1999) 화상 등의 비들도 있다.
부도와 공덕비가 혼재된 은해사 부도림
선교양종정사이며 화엄대강주로 당대 최고의 명성을 날렸던 영파대사의 비문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이자 후에 영의정까지 지낸 규장각 제학 남공철南公轍(1760~1840) 선생이 1816년에 지었고, 글씨는 진사인 심의경沈宜慶(1783~?) 선생이 썼으며, 비의 전액篆額은 명필인 기원綺園 유한지兪漢芝(1760~1834) 선생이 썼다. 당시에는 중국에서 고대 비석의 탑본들이 조선으로 유입되어 고대의 전서와 예서에 대한 탐구가 활발하였는데, 유한지 선생은 예서에 뛰어났다.
은해사에는 그간에 활동한 고승 대덕들의 진영이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31점에 달한다. 은해사가 화려한 단청을 칠한 당우들이 즐비한 은빛 바다의 난야라고 해도 고승들의 묵언으로 가득한 부도림의 무게를 이길 수는 없으리라. 이들의 모습이 불도의 길을 걸어간 수행자의 자취로 남아 지금도 달빛 아래 아련하게 보이는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여 주고 있다(사진 2).
부도림에는 <은해사사적비>도 함께 서 있는데, 이는 각종의 비를 한자리에 모으다 보니 고승들의 부도와 탑 이외에도 각종 공덕비 등이 함께 모여 있다. 격식에 맞지 않는다. 1943년에 건립한 <은해사사적비>는 김정래金鼎來 선생이 지었고, 계파桂坡 최윤崔潤(1886~1969) 선생이 글씨를 썼으며, 오세창 선생이 전액을 썼다. 최윤 선생은 경주의 최 부잣집 문파汶坡 최준崔浚(1884~1970) 선생의 동생인데, 당시 경주국악원과 문화협회, 경주예술대학를 창립하고 학술과 문화계에서 큰 역할을 하였고, 서예에서도 뛰어났다.
아무튼 지금과 같은 부도림은 격식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바로 잡아야 한다. 따로 분리하여 다시 조성하지 않으면 현재의 부도림을 비림碑林으로 이름을 고치고 그 안에 구역을 나누어 부도와 탑비는 같은 구역에 봉안하고, 나머지 사적비나 공덕비 등은 다른 구역에 배치하는 방법도 있다.
고승이 머물렀던 백흥암
은해사 본찰에서 나와 소나무 우거진 숲길을 올라가면 개울물이 오른쪽에서 흐르다가 어느새 왼쪽으로 옮겨가 있기도 한다. 고즈넉한 좁은 산길을 오르다 보면 산중에 자리한 백흥암에 이른다. 백흥암은 원래 백지사栢旨寺였는데, 인종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이 되면서 은해사와 함께 왕실의 보호를 받기에 이르렀다.
천교天敎대사가 지금의 장소에 은해사를 중창했을 때 백지사도 백흥암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 백흥암은 큰 화재를 입어 전각이 대부분 사라졌고, 그 이후에 보화루, 천왕문, 영산전 등이 지어졌다. 1750년에 법당의 아미타후불탱화가 조성되었다. 양종정사兩宗正事 해암홍린海庵洪璘 대사, 전암승홍轉菴勝洪 대사, 운악성의雲岳性義 선사, 도봉유문道峰有聞 선사 등 많은 고승들이 머물렀던 난야다. 현재는 외부인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비구니 스님들이 정진하는 수행도량으로 되어 있다.
백흥암에 이르러 처음 마주하는 보화루寶華樓를 지나 절 앞마당으로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불전이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極樂殿이다. 보화루가 안양루인 셈이다. ‘보화루寶華樓’와 ‘극락전極樂殿’의 현판은 모두 기성쾌선대사가 쓴 것인데, 극락전의 현판은(사진 3) 1745년(영조 21)에 썼다. 장엄하고 법도가 엄정하면서도 기상이 넘치는 쾌활한 글씨다. 기성대사는 서산西山(1520~1604) 대사의 법맥을 이은 6세손으로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에서도 뛰어나 많은 유학자들과도 교유를 하였고, 서예에서도 당대의 명필이었다. 백흥암에 있는 ‘법화경판각法華經板閣’ 의 현판과 동화사의 대웅전 현판(사진 4)도 그가 썼다. 기성대사비는 칠곡에 있는 고찰 송림사松林寺에 있다.
극락전은 임진왜란의 병화가 지나간 뒤인 1643년에 다시 세운 정면과 측면 모두 3칸으로 된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이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수미단須彌壇이 있고, 그 위에 목조로 된 아미타불상과 관세음보살상, 대세지보살상을 봉안하고 있고, 그 뒤에는 1750년경에 아미타삼존을 그린 탱화가 있다. 1643년에 5단으로 조성된 수미단은 약 35가지 종류에 달하는 동식물을 정교하게 새겨놓은 것으로 조선시대 수미단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엄한 대표적인 것이다.
영파대사는 백흥암에도 주석하며 글씨에서도 뛰어나 많은 현판을 남겼다. 그는 백흥암에 ‘진영각眞影閣’, ‘거조암居祖庵’, ‘열선당說禪堂’, ‘화엄실華嚴室’, ‘심검당尋劍堂’, ‘명부전冥府殿’ 등의 현판을 남겼다. 영파대사는 대제학과 예조판서를 지낸 백하白下 윤순尹淳(1680~1741) 선생 문하에서 서법을 공부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 선생에게서 서법을 익히기도 했다. 정통 첩파帖派의 글씨이다. 동화사의 ‘대적광전大寂光殿’의 현판도 영파대사가 썼다. 불교와 유교의 전적에서도 당대 제일이고 글씨와 문장에서도 최고의 경지에 있었으니 그 시절 두 대사가 이끌고 가던 은해사의 명성은 익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내놓으라고 하는 당대의 문인과 묵객들은 모두 은해사로 발걸음을 향했던 것이다.
극락전과 앞마당을 같이 쓰고 있는 진영각(사진 6)에는 ‘시홀방장十忽方丈’이라고 쓴 현액과 함께 영파대사가 쓴 ‘화엄실華嚴室’의 현판이 있고, 주련은 추사선생이 소동파蘇東坡(1037~1101) 선생의 ‘석각화유마송石恪畵維摩頌’이라는 글에서 취하여 쓴 것이다. 심검당에는 영파대사가 쓴 ‘심검당尋劍堂’의 현판이 지금도 그대로 걸려 있다. 옛날에는 백흥암에 추사 선생이 예서로 쓴 ‘산해숭심山海崇深’의 현판도 걸려 있었는데 현재는 은해사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극락전과 영산전 등에는 장삼을 두르고 선 니승들의 염불소리와 목탁소리만이 나른한 낮의 적막을 깨고 있다. 보화루에 기대어 목탁소리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나무아미타불〜’을 마음속으로 따라하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무엇을 염원하고 있는 것일까? 미타정토에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것일까? 정토에 다시 태어나려면 현세에서 열심히 수행하여야 하는데 현세에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며 살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일까? 현판에 글씨를 남겨 놓은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떠난 지 오래다. 미타정토로 갔을까? ‘나무아미타불〜’
최고의 화승 신겸화상의 벽화와 단청
1800년대 초기에 조성된 극락전의 벽화와 단청은 당시 최고의 화승畵僧인 신겸信謙 화상의 주도하에 통도사, 해인사, 석남사의 화승들도 동참하여 그린 것으로 아미타후불탱화, 지장탱화, 감로탱화, 현왕탱화 등은 불교미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극락전의 공포栱包와 공포 사이에 있는 외부의 포벽包壁과 내부의 내목도리 상부 나무벽에는 26점의 나한을 그린 벽화가 있는데, 나한들마다 다양한 표정과 동작을 하고 있는 생생한 모습이다. 이러한 그림은 나한도와 달리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극락전을 장식하는 그림이다.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과 16나한들을 봉안하였는데, 석가모니불상 옆에는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협시보살로 모셔져 있다. 1897년에는 석가모니후불탱화와 나한탱화도 봉안하였다. 은해사에는 불화가 많이 조성되어 봉안되었는데 당시 이곳에는 각 암자에 화승들이 있었고 이들의 불사활동이 활발하였다. 백흥암의 전각들은 중창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고찰의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다. 비구님 스님들의 세심한 정성과 노력에 의해 절이 파헤쳐지지 않고 잘 유지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유학자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운부암
백흥암에서 나와 산 위로 난 산길을 따라 한참이나 올라가면 그 유명한 운부암에 다다른다. 지금은 운부암에 이르면 크고 작은 영지를 만들어 놓고 이름도 맞지 않은 작은 불이문不二門도 서 있다. 원래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 중기까지 운부사雲浮寺로 불렸다. 17~18세기에 운부암에는 많은 고승 대덕들이 주석하여 명성이 높았고, 그래서 경향 각지에서 이곳으로 찾아오는 유학자들의 발걸음도 잦아 시도 많이 남겨 놓았다.
조선시대 전기 태종과 세종 연간에 활동한 대학자인 태재泰齋 류방선柳方善(1388~1443) 선생은 여러 학자들과 금강산을 유람하기도 하고 모함을 받아 고향인 영천으로 유배를 오기도 했는데, 팔공산을 유산遊山하며 은해사와 산내 암자들에 들러 시도 여럿 남겼다. 그 중 <운부사雲浮寺>라는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 당시에는 절이 방치되어 허술했던 것 같다.
혼자 운부사를 찾아드니
선방은 고요하며 머물 만큼은 되어 보이고
골짜기 깊어 오가는 수레와 말이 드무니
중은 늙어가지만 세월은 더디 가는 것 같다.
대나무 그림자는 빈 걸상에 침노하고
솔바람은 엷은 옷 속으로 불어오나니
산신령은 응당 만사를 원하게 알지니
절집 짓는 일은 필경 시기에 맞게 이루어지리라.
독방운부사 獨訪雲浮寺
선방정가의 禪房靜可依
곡심거마소 谷深車馬少
승로세년지 僧老歲年遲
죽영침허탑 竹影侵虛榻
송풍투박의 松風透薄衣
산령응불매 山靈應不昧
결사회여기 結社會如期
영파대사는 1788년부터 운부암에 주석하며 많은 중창 불사를 하는데 앞장섰다. 은해사에는 다른 절과 달리 동갑의 승려들이 갑계甲契를 결성하여 스스로 재원을 조달하고 불사를 지속적으로 해나갔는데 대사는 이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부도림에는 이런 갑계에 관한 비도 여럿 있다. 영파대사는 화엄학의 대강백으로 선과 염불에도 득의한 최고의 선지식이었다. 그는 은해사뿐만 아니라 해남 대흥사大興寺에서도 강백으로 활동하여 대흥사 13대강사大講師에도 포함되어 있다.
혼허화상이 지은 <운부암중건기>에 의하면, 1860년(철종 11)에 화재로 모든 당우가 잿더미가 되었고, 1862년에 원통전圓通殿과 보화루寶華樓를 중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작은 불이문으로 들어가면 오르막 경사로 보화루(사진 9)로 가는 돌계단이 있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보화루가 앞에 서 있는데, 현재의 이 건물은 1900년에 중건한 것이다. 그 옛날부터 보화루에는 큰 북인 법고法鼓를 매달아 놓았는데, ‘보화루寶華樓’ 현판은 1900년에 해관海觀 유한익劉漢翼(1844~1923)이 쓴 것이다.
보화루를 지나 중정으로 들어가면 금당金堂인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한 간단 소박한 격조있는 원통전을 마주하게 되고, 좌우에 있는 심검당尋劒堂과 우의당禹儀堂의 요사가 눈에 들어온다. 1862년에 중건된 원통전에는 금동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 전기 불교조각으로서 특징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원통전(사진 10), 즉 관음전을 마주보고 있는 문루도 보화루라고 지었는데, 은해사에는 모든 문루의 이름이 보화루라고 되어 있다. ‘원통전圓通殿’의 현판과 심검당에 걸려 있는 ‘운부난야雲浮蘭若’의 현판(사진 11), 대덕의 진영을 모셔놓은 ‘우의당禹儀堂’의 현판(사진 12)은 모두 조선시대 말 우의정을 지낸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1087~1877) 선생이 쓴 것이다.
북마하연 남운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 선생의 손자인 박규수 선생은 1854년 2월에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영남지역을 다닐 때 운부암에 오래 머문 적이 있는데, 이 당시 운부암에는 추사선생과 교유한 시승詩僧들도 주석하고 있어 교유의 인연도 생겼다. 환재선생은 20년 선배인 추사선생과도 교유가 깊었다. 1863년에 박규수 선생은 이 3개의 현판을 썼는데, 글씨를 쓴 연유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아마도 그 전에 운부암에 머물렀던 시절의 인연으로 스님들 중 누군가 환재선생에게 부탁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격변하는 국제정세의 변화도 모른 채 조선이 깊이 잠들어 있고 세도정치가 막장을 달리며 나라를 망쳐가고 있을 때, 시대의 선각자였던 박규수선생은 조정에서 개혁의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역부족만 절감하였다. 그는 오경석吳慶錫(1831~1879) 선생, 유홍기劉鴻基(1831~?) 선생, 이동인李東仁(?~1881) 화상과 함께 뜻을 모으고 지금의 서울 안국동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는 자기 집에 북촌의 젊은 자제들을 모아 미래를 도모하였으니, 여기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서재필徐載弼 등과 같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들이 배출되었다.
이들이 목숨 걸고 거사한 정변이 성공하여 국정을 개혁하고 근대국가로 나아갔더라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조선이 멸망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안타깝고 안타깝다. 나는 이동인 화상에 대해서는 신봉승辛奉承(1933~2016) 선생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선생은 나중에 3권에 달하는 이동인에 대한 책을 남기고 이승과 하직하였다. 나는 생전에 선생의 집필실을 자주 찾아 역사에 관한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
운부암은 일본식민지시대까지도 조선에서 유명한 수행처로 이름이 났다. 그래서 북쪽에는 금강산金剛山의 마하연摩訶衍 선원이 최고이고, 남쪽에는 운부암 선원이 최고의 수행도량이라고 하여 ‘북마하연 남운부’라는 말도 생겼다. 마하연은 산스크리트어 마하야나mahā~yāna를 음역한 것이고 의역을 하면 대승大乘이다.
근래에 와서도 불교계의 기라성 같은 고승 대덕들이 수행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25세에 범어사 동산東山(1890~1965) 화상을 은사로 하여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여러 곳을 다니며 참선 수행을 하던 성철性徹 화상도 28세 때인 1939년에 운부암에서 하안거夏安居를 지내고 이듬해 동안거冬安居도 이곳에서 지냈다.
당시 운부암에는 나중에 종정宗正이 되는 동산화상이 조실로 주석하고 있었다. 동산화상은 주시경周時經 선생에게서 신학문을 배우고, 경성총독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용성龍城(1864~1940) 화상을 만나 범어사로 출가하였다. 오경석 선생의 아들인 오세창吳世昌(1864~1953) 선생이 동산화상의 고모부가 된다. 청사晴斯 안광석安光碩(1917~2004) 선생도 동산화상의 문하로 출가를 하였고, 오세창 선생 문하에서 서법을 공부하였다.
성철화상은 운부암에서 수행할 때 평생의 도반이 되는 향곡香谷(1912~1978) 선사를 만났다. 동갑인 두 화상은 한국불교를 혁신하고 중흥하는 길에서도 거침없이 동행하게 된다. 그야말로 평생 둘도 없는 도반이었다. 천하의 향곡선사가 길러낸 인물이 종정을 지낸 진제眞際(1934~) 선사이고, 전강田岡(1898~1975) 선사가 길러낸 불세출의 선장이 송담松潭(1927~) 선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하의 도인을 불러 ‘북송담 남진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이전에 사람들은 ‘북전강 남향곡’이라고 먼저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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