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화엄종주 월운당 해룡 대강백의 원적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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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3 년 8 월 [통권 제124호] / / 작성일23-08-04 23:59 / 조회2,699회 / 댓글0건본문
6월 17일 아침 YTN뉴스를 보고 있는데 자막으로 ‘봉선사 조실 월운 큰스님 열반’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와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습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종단에서나 불교 언론기관 어디에서도 ‘큰스님의 열반 소식’은 입력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봉선사 조실 월운 큰스님의 원적
“이제 종단에서나 불교 언론에서도 원택스님은 잊혀지나 보네.” 하는 씁쓰름함에 선암스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선암스님은 월운 대강백 큰스님이 운허耘虛 큰스님의 홍법강원 설립 정신을 계승하여 1966년 설립한 능엄학림(현재 능엄승가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전강을 받은 수제자입니다. “어제 금요일 저녁 무렵에 열반에 드셨습니다.”라는 침울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곧바로 서울에 있는 상좌 일엄스님에게 전화하여 자세한 다비식 일정을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하여 상좌에게 전해받은 내용을 미처 월운 대강백 큰스님의 열반 소식을 접하지 못했을 사부대중을 위해 상세히 적어 보았습니다.
- 엄종주 월운당 해룡 대강백 원적-
봉선사 조실 월운 큰스님께서 세랍 95세, 법랍 74세로 다경실에서 원적에 드셨기에 부고합니다.
• 운악산 봉선사 문도회장
• 빈소 :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 청풍루
• 영결식 : 2023년 6월 21일(수) 오전 11시
• 호상 : 밀운 대종사, 일면 대종사
• 문도대표 : 철안, 인묵
• 장례위원장 : 봉선사 주지 서성초격 스님
월운 대강백 큰스님의 열반 소식을 들으니 그동안 자주 찾아뵙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백련암에서 ‘선림고경총서’를 간행할 때 3년여에 걸쳐서 『종용록從容錄』 상·중·하 3권을 어렵게 어렵게 번역해 주셨던 그 감사함이 뭉클 가슴을 쳤습니다.
마침 장마철이 시작되고 날씨도 오락가락해서 영결식 및 다비식 하루 전날 봉선사 청풍루에 가서 문상을 드리고 비가 안 오면 다음날 행사에도 참석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봉선사에 도착하니 봉선사 선원에서 입승 소임을 맡고 있는 상좌 일견스님이 미리 마중을 나와서 어른스님들을 뵈올 때 안내를 해주니 편하게 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해인사 연화대 헛집 아이디어
봉선사에 문상을 오니 호상으로 밀운 대종사님과 일면 대종사님이 문상 온 빈객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밀운 대종사님께서는 일찍이 봉은사 주지를 하시면서 영암 대종사님의 열반을 맞이하여 그때로서는(1987년) 최고의 다비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였던 기억입니다. 당시 해인사 모든 과외 업무를 맡고 있던 도감 종성스님에게 의논을 하였습니다.
사진 3. 월운 대강백께서 주석하셨던 봉선사 다경실.
“도감스님! 봉은사 주지스님께서 사찰의 모든 업무에 있어서 제일이라는 평을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영암 대종사님의 다비장 준비를 한번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봉선사 다비장에서 짚 화장 준비를 하고 계신다니 한번 가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씀드리고 함께 봉선사 다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다비장에 가보니 벌써 각목으로 삼층탑을 만들어 스리랑카 가사로 덮어 놓았고, 연화대는 직사각형으로 헛집을 지어 내일 법구를 모시고 와서 바로 빈 사각형 속으로 모시면 곧바로 거화를 올릴 수 있도록 짚과 숯으로 봉분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도감스님! 바로 이것입니다. 해인사도 빈 사각형으로 법구를 모실 장소를 미리 만들어 놓고 그 주변을 장작더미로 모든 준비를 미리 마쳐 둔다면 얼마나 간단한 다비식과 다비장이 되겠습니까?”
“원택스님, 우리 정말 잘 와 봤습니다. 법구를 모실 헛집을 지을 생각을 못 하고 온 대중이 바라보는 두 시간여 동안 장작을 쌓고 휘발유 5통을 뿌렸으니…, 이제 그 민망함은 사라지고 깔끔한 다비식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정말 잘 와 봤습니다.”
그 후 해인사에서는 1992년 2월 자운 큰스님 다비식을 시작으로 1993년 11월에 성철 종정 예하의 다비식에 정점을 찍으면서 조계종 다비식 문화가 오늘의 모습으로 정립되어 갔습니다. 밀운 대종사님을 뵙고 “35년 전 영암 대종사님의 다비식에서 헛집이라는 아이디어를 주셨기에 해인사에서 큰스님들의 다비식을 장엄하게 올릴 수 있었습니다.” 하고 큰 절을 올렸습니다.
호상으로 계시는 일면 대종사님도 오랜만에 뵙게 되었습니다. 일면 큰스님은 1959년 해인사에서 명허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가서 포교하다가 “다시 발심하러 왔다.”라고 하며 해인사에서 다시 공양주 생활부터 시작하여 산중의 수행승들에게 큰 신심을 가지게 한 이력을 갖고 계신 큰스님이십니다. 그 후 동국대 불교대학을 졸업했으며, 조계종 포교국장, 사회부장, 중앙종회 수석부의장 등을 역임하셨고, 그러다 건강이 악화되어 간이식이라는 큰 수술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서울 조계사에서 우연히 만나 뵙게 되었는데 정말 건강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 후에도 교육원장, 군종특별교구장, 광동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하셨고, 현재는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직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종용록』 번역을 부탁드리다
일면 대종사님을 뵙고 나오면서 신규탁 교수님의 안내로 월운 큰스님께서 머무시던 다경실을 방문했습니다. 다경실 중앙에는 ‘능엄대도량楞嚴大道場’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 방에는 큰스님의 법구가 모셔져 있고, 그 한 켠 작은 방 책상 위에는 원적 직전까지 보시던 필사본 사기私記와 스탠드, 컴퓨터, 안경 등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긴 세월 저편으로 홀리듯이 끌려 들어갔습니다.
소납은 성철 종정 예하의 지시로 ‘선림고경총서’를 1988년 9월 25일에 1권을 발행하여 1993년 7월 30일 『벽암록』 하권 초판을 발행하며 전 37권을 완간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종용록』은 32권, 33권, 34권으로 월운 대강백 큰스님께서 친히 번역해 주셨습니다.
처음 선서 번역을 기획할 때는 “전국에 강주스님들이 계시니 그 스님들을 찾아뵙고 선어록 번역을 부탁드리면 되겠지.” 하고 간단하게 생각하고 성철 종정 예하께서 선정해 주신 선어록 서목書目을 들고 몇몇 강주스님들을 찾아뵙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일은 영 엉뚱하게 흘러갔습니다.
“우리는 경전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을 으뜸으로 하지 선어록 번역은 우리들 관심사가 아닙니다. 다른 강주스님들도 다를 바가 없을 터이니 찾아다니는 일은 그만두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혹시 번짓수를 잘못 알고 찾아뵈었나 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낭패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식 높은 강주스님들을 더 이상 찾아뵙지 못하고 역경譯經을 하는 분들을 찾고 물어서 선서 번역을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종용록』은 『벽암록』과 함께 선문의 쌍벽을 이루는 책이라 정말 어느 분에게 번역을 의뢰해야 할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고심 끝에 1989년 봄인가에 봉선사로 월운 대강백 큰스님을 찾아뵙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큰스님께서 주신 선어록 목록 중 대부분은 번역자를 찾아 얼추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종용록』만큼은 꼭 스님께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하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월운 큰스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한참 동안 물끄러미 소납을 보시더니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원택스님이 모르나 보네. 내 일만 하여도 시간이 없는데…. 성철 종정께서 마음을 내 하시는 번역 불사인데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하시면서 무척 난감해하셨습니다. 소납은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그래, 종정 큰스님 일이니 내 모른다 할 수는 없고…, 그런데 원택스님, 나하고 약속 하나만 합시다. 원문은 두고 가고 내가 번역을 다했다고 연락할 때까지는 내 방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소납은 마음속으로 번역을 허락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서 “예, 예” 하고 봉선사를 떠나왔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선림고경총서의 목록 중 번역이 끝난 원고들은 윤문과 교정을 거쳐 한 권 한 권 책으로 출간되기 시작했습니다. 월운 큰스님 방에서 물러나온 뒤 2년까지는 큰스님 당부대로 무심히 지냈는데, 2년이 지나고부터는 마음이 슬슬 조여오는 듯했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나고부터는 백련암에서 봉선사를 향해 고두삼배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큰스님과 철석같이 약속을 했는데 전화를 드릴 수도 없고 아는 스님을 통해 문안 인사라도 드려 슬쩍 진행 상황을 알아볼 수도 없고, 궁금한 마음만 꾹꾹 누르고 사는 시간이 힘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번역을 부탁드린 지 3년이 다 되어 가니 “내 시간이 없어서 못 하였네” 하시면 어쩌지 하는 막다른 생각도 슬쩍슬쩍 올라왔습니다. 그래도 꾹 참고 연락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왔습니다.
“원택스님이여, 원고 다 되었으니 봉선사 다녀가게.”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씀을 월운 큰스님께서 직접 전화로 해주시니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화를 받고 한달음에 큰스님을 찾아가 뵈었습니다.
“번역, 번역, 참 많이 해 봤지만 이번 『종용록』 번역은 참으로 힘들었네. 중국의 새로운 사자성어가 많아서 꽤 고생했어. 그래도 무사히 마쳐서 참으로 다행이오.”
월운 큰스님의 자상한 말씀에 묵묵히 기다려 온 마음에 큰 위로를 받은 듯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고, 큰스님께는 마음을 다해 깊은 감사의 삼배를 드렸습니다.
『종용록』은 상·중·하 3권으로 1993년 5월 25일에 출간하였는데, 성철 종정 예하께서 그해 11월 4일에 열반에 드셨으니, 종정 예하 생전에 ‘선림고경총서’ 37권의 완간을 보시고 열반에 드셔서 참으로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성철 종정 예하께서 열반에 드셨을 때도 월운 대강백 큰스님께서 보내 주신 끝없는 성의에 소납뿐만 아니라 문도 전체가 큰 감사를 드리고 살았는데, 오늘 세월이 흘러 이렇게 홀연히 원적에 드시니 그 고귀한 모습에 더욱 가슴이 저며왔습니다.
맑은 바람으로 다시 오소서
며칠 전 하남 정심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정심사 다락에 보관해 둔 상자들을 옮기다 보니 장경각 원고들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예전에 선림고경총서 교정 작업을 한 사람이 있어서 며칠 동안 정심사에 보관되어 있던 자료들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사람 손을 타지 않는 곳에 오랫동안 보관되어 온 상자들을 열어보니 40여 년 전 선림고경총서 출간을 위해 애쓴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빛바랜 초역 원고, 윤문 및 교정지, 편집용 대지 등 선림고경총서의 역사가 한눈에 다 드러났습니다.
그곳에서 월운 대강백 큰스님께서 육필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종용록』 원고 뭉치가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월운 대강백 큰스님의 정성이 그대로 묻어나서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6월 21일 영결식 때 배포된 팜플렛의 역주·강화에도 ‘『종용록』(전 3책, 1993. 5)’이 들어 있어서 다시 한번 월운 대강백 큰스님의 정성에 감동하였습니다.
‘선림고경총서’를 간행하면서 번역하는 데 여러 분의 도움을 받았지만 번역자 개인에게 양해를 얻어 ‘백련선서간행회’로 번역자의 이름을 대신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월운 대강백 큰스님의 열반으로 『종용록』 역자의 이름을 밝히면서, 큰스님 덕으로 ‘선림고경총서’ 37권이 수준 높은 번역서로 대접받게 되었음을 새삼 감동스럽게 생각합니다.
역경보살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역경 원력으로 한평생을 다하신 월운 대강백 큰스님의 영전에 삼가 삼배를 올리며 운악산 맑은 바람으로 다시 오셔서 시들어 가는 불전 번역 불사에 새 불을 지펴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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