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전쟁 중에 시작한 가행정진과 일생에 걸친 108배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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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 2023 년 7 월 [통권 제123호] / / 작성일23-07-04 09:53 / 조회2,155회 / 댓글0건본문
인환스님 ⑦
▶ 스님께서 출가할 당시 삭발문화는 어땠습니까?
선암사 법당 앞에 스님들이 세숫대야에 더운물 떠 놓고 서로 깎아주는 거예요. 노장님들은 시봉이나 젊은 스님들이 깎아드려요. 40명이라도 서로 깎아주면 시간 얼마 안 걸려요. 삭발하러 나오라는 전갈을 기대하고 있었지요. 내다보니, 거의 끝나고 스님들 모두 들어가셨네요. 마침 이곳에 온 범어사 스님이 삭도削刀를 다듬고 있었어요. 스님들은 대부분 삭도를 가지고 다녔어요. 삭도는 꽹과리나 징 깨진 조각을 숫돌에다 잘 갈면 번쩍번쩍 빛나는 칼이 됩니다. 이 삭도를 처음 보면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무서워 보입니다.
이때다 하고 그 객스님 앞에 세숫대야를 놓고 머리를 들이댔어요. 선암사 스님이라면 삭발 허락을 받았느냐고 묻기라도 할텐데, 이 스님은 당연히 깎는 줄 알고 삭삭 밀어 주네요.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삭발했지요. 서투른 사람이 삭도를 사용하면 머리에 상처를 많이 냅니다. 후에 행자들끼리 서로 깎아줄 때마다 상처가 나서 몇 군데씩 피가 나고 그랬어요. 6개월쯤 지나야 손에 익어집니다.
58년간 이어진 매일 108배 참회의 시작
이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젊은이 셋이 절 마당에서 떠들어대는 거요. 나와 김지견 행자가 야단을 치자 그들도 대꾸를 했고 드디어 싸움이 벌어졌어요. 싸움하는 소리에 대중들이 마당으로 나오자 젊은이들은 달아났어요. 공양하시던 석암스님도 보셨지요. 저녁예불 마치자 석암스님께서 나를 불러요. 나는 저만치서 삼배하고 꿇어앉았지요.
그랬더니 스님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더니 “그래 너, 무슨 생각으로 절에 들어왔느냐?” 하셔요. 나는 뭐라 뭐라 대답을 했어요, 지금 생각은 안 나지만 말이요. 노장님이 아무 소리도 안 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참선하는 자세로 계셔요. 2시간 째 꿇어앉아 있으니까 그런 지옥이 없어요. 참 지금도 그때 끔찍스러운 생각이 나요. 9시에 잠자리에 들라는 상경 종소리가 울렸어요.
그제서야 노장님이 천천히 몸을 흔드시더니 입을 떼시더라고요.
“스님이 되어 부처님 제자로 제대로 지내려면 제일 먼저 할 일이 있다. 독에 더러운 물건들을 집어넣었다가 새로운 물건을 넣으려면 더럽고 추한 것들 퍼내야 하지. 참회해야 한다. 내일 아침부터 예불 끝나고 108참회 절을 해라. 세속에서 익혀 온 습을 없애는 일이 되느니라.”
이때부터 시작한 나의 108배는 78세까지 했어요. 어디를 가든지 새벽에는 반드시 예불하고 능엄주하고 108배하고 참선합니다.
스승 없이 수계하다
후원에 행자들이 다섯 명이 있는데, 그럭저럭 스승이 정해졌어요. 작은 행자인 나는 아직 스승이 정해지지 않았어요. 노장님 몇 가운데 원경스님이라고 계셨어요. “노장님, 상좌 하나 들이시죠.” 그랬더니 대뜸 “나 안 할라요. 제일 못난이 상좌 하라니~.” 라고 하셨대요. 이렇게 원경스님이 대놓고 안 할라요 하시니, 다시 권할 수도 없고 해서 그렇게 대중공사를 끝냈다는구만요.
1953년 2월 28일 신도들이 미리 다섯 행자들을 위해 가사 장삼을 해오고 발우까지 마련해서 법당에 갖다 놨어요. 네 사람은 각자 스승이 정해졌고 법명도 받았습니다. 아, 다섯 번째인 내 순서가 되자 “그래 너는?” 하시더라고요. 석암스님은 다 아시면서 그러시더라구요. 나는 “예, 스님, 저는 스님 못 정했습니다. 그래서 법명도 못 받았습니다.”.
그 말을 들으시더니 법상에 앉아서 눈을 한 번 껌뻑 하시고는, “너는 ‘인환’이라고 해라.” 이렇게 계를 받았어요. 아직 은사스님도 못 정하고 남이 계를 받는데 덤으로 계 받은 택이라. 석암스님 계신 데 쫓아가서 법명의 뜻을 여쭈었어요. 그랬더니, 대강 이런 말씀이에요.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고, 발심이 중요한데, 그 기본이 뭐냐. 세속의 일들은 꿈과 같아서 생겼다, 없어졌다가, 허망하고도 무상한 것이야. ‘인환印幻’. 도장 ‘인印’ 자고, 변화할 ‘환幻’ 자, 꼭두각시 ‘환’이라고 그러지요. 이 세상은 ‘환’과 같다. 『금강경』에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고 그랬잖아요. 스님 노릇 제대로 하고 부처님 제자 노릇 바로 하게 된다 그래서 ‘인환’이라고 했다는 말씀이셨어요.
성도절 7일 철야 가행정진 동참
절에 들어간 지 반년 쯤 된 음력 11월 말에 대중들을 모두 불렀어요. 행자 둘도 참석했습니다. 선암사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석암스님이 말씀하셨어요. “모레가 섣달 초하루인데, 12월 8일 성도재일까지 선방에서는 해마다 7일 동안 용맹정진을 한다. 이 기간에는 한잠도 자지 않고 정진한다. 체력이 약하거나 병이 있거나 이런 이들은 견디기가 어렵다. 그런 분들은 제대로 용맹정진할 형편이 못 되니, 미리 대중 앞에 말하고 빠지도록 한다. 빠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 아니오. 용맹정진을 하려면 이를 뒷받침하는 인력이 있어야 돼. 공양주, 채공으로부터 원주까지 많은 일이 있어. 이렇게 뒷받침하면서 가행정진加行精進하면 되지.”
▶ 전쟁 중에도 용맹정진을 하셨군요?
당시 전쟁 하에서 스님들이 진짜로 목숨 걸고 참선 정진하는 모습에 우리는 큰 감화를 받았었거든요. 우리도 그 시늉을 낸다고, 일하는 짬짬이 한 시간이나 두 시간 기회가 날 때마다 후원에서 둘이 마주 앉아서 정진했어요. 그러니 스님의 말씀에 귀가 번쩍 뜨이더라고요. 앞뒤 뭐 헤아릴 생각도 없이 용맹정진이 어떻다고 하는 것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조건 하겠다고 했지요.
음력 12월 초하룻날 새벽예불 모시고 나서 4시쯤부터 큰방에 모여 7일간 용맹정진을 시작했습니다. 행자들도 말석에 좌복을 놓고 앉았어요. 입구 정문에는 석암스님이, 다음에 지월스님, 그리고 서옹스님, 이런 기라성 같은 대선지식들 앞에 우리가 마주 보고 앉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후원에서 빠지니까 석암스님은 용맹정진에 참가하지 못하시고 보살들 데리고 공양하는 일을 맡게 됐지요.
참으로 꿈같은 일이지요. 큰방에 가서 모든 대중들과 용맹정진을 하게 됐으니, 오히려 마음은 즐겁고 가슴이 뛰는 거예요. 이틀까지는 젊은 기운에 힘차게 ‘이 뭣고’라는 화두를 들고 정진했습니다. 지금도 그 추억이 가장 기억에 남고 자랑스러운 한 토막입니다. 이 용맹정진은 일상의 정진하고는 달라요. 평소에는 벽을 바라보고 쭉 둘러앉습니다.
그런데 용맹정진은 벽을 등지고, 서로 마주 보고 앉아서 합니다. 그래 하룻밤이 지나고 이틀째 되니까 우리보다 선배로 선방에 들어온 스님들 가운데는 벌써 잠에 못 이겨 졸기 시작합니다. 이때 장군죽비將軍竹篦라는 경책을 들고 있다가 조는 어깨를 탁하고 내리칩니다. 그러면 잠을 깨고 합장합니다. 양쪽 어깨에 딱딱딱 칩니다. 우리는 행자라서 그 장군죽비를 못 잡아 봤지요. 스님들 24명이 모두 번갈아 가면서 1시간씩 24시간 돌아가면서 죽비를 들지요. 이틀쯤 되면 졸음을 견디기 어려워요.
▶ 아무리 젊은 혈기라도 쏟아지는 졸음을 참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죽비 소리가 여러 차례 들리기 시작합니다. 자주 받으면 양 어깨가 벌겋게 부어오릅니다. 그리고 화두가 어디 갔는지도 몰라요. 달아났던 화두를 끄집어 와서 또 들고 했어요. 사흘이 되니까 졸음에 장사가 없어요. 잠을 수마睡魔라고 한다지만, 문 앞에 지옥의 반월산半月山이 있는데 그 고통만한 게 없더라구요.
그러나 어른 스님들은 끄떡없어요. 사흘, 나흘 되어도 진짜 변함없어요. 지월스님은 나흘째 되던 날 밤 1시나 2시 쯤 됐을 거야. 몸을 전혀 흔들지 않으시더라고. 그래 아! 저 입승스님도 조는가 보다. 몸이 전혀 움직임이 없고 숨소리가 아주 고르더라고요. 분명 지월스님은 잠들어 있는 상태예요. 그러나 한 20~30분 지나면 다시 또 정신 차려서 정진하시더군요. 평소에 오랫동안 정진력을 기른 분들은 우리와는 다르구나 그랬어요. 죽비치고 50분 앉았다가, 다시 죽비 소리에 따라 10분 쉽니다. 추울 때니까 밖에는 못 나가고 벽을 따라 방안을 빙빙 돕니다.
천천히 경행하면서 몸을 풉니다. 다시 죽비 치면 정진을 시작합니다. 나흘째 되던 때쯤인가 죽비 맡은 종두스님이 해우소에 앉아 일 보는 그 자세로 자고 있는 거예요. 하하하 닷새째 되는 날이 밤 1~2시 무렵인데 어디서 난데없이 쾅! 하고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진동했어요.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웬일인가 주위를 살폈더니, 세상에 내가 졸다가 뒤로 나자빠진 거예요. 뒷머리가 장판 바닥에 꽈당! 한 거지요. 나한테는 대포가 터진 소리였어요. 이때부터 오히려 성성惺惺하게 화두를 들면서 정진했어요. 그때가 아마 고비였나 봐요. 이후 이틀 동안 7일 마칠 때까지 잘 견뎌냈어요.
음력 12월 8일 성도재일 새벽 3시에 큰법당에 올라가서 예불을 모시고 나서 그 다음에는 자유시간입니다. 하루 종일 잠자도 돼요. 젊은 스님들은 뒷방에 가서 저녁까지 코가 삐뚫어지도록 자는데, 큰스님들은 보통의 일상과 똑같으신 겁니다. 다 같이 7일 안 자고 용맹정진을 했지만 큰스님들은 평소 때처럼 하루 네 번씩 8시간을 정진하지요. 역시 저분들은 참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용맹정진 기간이 끝나고 행자 둘이 다시 앉았을 때, 이전하고는 전혀 다르더라구요. 두 시간, 세 시간 앉아 좌선해도 끄떡없어요.
스승을 정하다
나는 스승을 정하지는 못했지만, 수계는 한 셈입니다. 한 달쯤 후 점심공양하고 나서 뒷설거지 하고 있는데 가사 장삼 입고 큰방으로 오라는 전갈을 주더라구요. 큰방 뒷문으로 들어갔더니 다른 스님들도 계시고요, 석암스님이 어떤 노장님하고 얘기하다가 나를 보더니, “너, 이 노장님에게 삼배 올려라.” 하셨어요. 시키는 대로 오체투지 삼배를 했더니, “이 어른이 이제부터 너의 스승 되실 분이다.” 그렇게 은사 스님을 만났어요.
▶ 스승으로 맞이한 스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원허당圓虛堂 효선孝璇 대선사입니다. 원허스님은 1889년생이신데 속성은 최씨로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하셔서 20세 조금 넘어 금강산에서 출가를 했어요. 금강산 표훈사였어요. 일제강점기에 이 절의 주지를 오래 한 분이 관허貫虛 천일天日선사이셨는데, 대선지식이셨어요. 원허스님은 그 분의 제자예요.
원허스님은 20세에 출가하여 석왕사에서 경전 공부를 하셨어요. 표훈사 마하연선방에서도 정진하셨지요. 이후 38세에 표훈사 주지가 되어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살림을 맡으셨어요. 그 당시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아 많은 스님들이 대처했는데 독신으로 걸망 짊어지고 선방을 다니면서 정진하던 참선 수좌들이 한 5백명 쯤 된다고 합니다. 대처스님들은 아마 8, 9천 명 됐을 거요. 그 소수의 수좌들이 선방을 옮겨 다니면서 안거를 하지요. 동안거에 수좌들은 슬슬 걸망지고 남쪽의 대구 동화사 혹은 지리산 산중으로 갑니다. 여름에는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서 안변 석왕사, 귀주사歸州寺 혹은 묘향산으로 갑니다.
당시 수좌치고 마하연선방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인정 못 받는다고 했어요. 그 수좌들은 표훈사의 주지 원허스님을 꼭 찾아가서 인사를 드려요. 스님께서는 정진하는 수좌들이야말로 한국불교의 기둥이니 꼭 보호하고 후원해야 된다고 생각하셨대요. 그때마다 꼭 차비, 금일봉을 후하게 드렸지요.
1945년에 광복이 되었지만 북한 정권에서는 사회의 지도층이나 지주들을 반동계급으로 몰아붙였어요. 절에도 주지급에 있던 사람들은 다 반동계급입니다. 도저히 남아 있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예요. 그래서 나도 피난 온 거고요. 원허스님은 1947년 경 38선을 넘었대요. 스님은 겨울 안거를 청풍당 선원에서 지내고 음력 3월에 선암사로 오셨어요. 그보다 앞서 해방 전 석암스님이 표훈사 마하연선방에서 우리 노장스님을 뵌 일이 있었다고 해요.
원허스님이 표훈사에 계실 때야 상좌들이 여럿 있었지만 월남하신 뒤에는 없었지요. 그래서 후원에서 일하는 나를 불러 가사장삼 입도록 하여 큰방으로 오라 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덤으로 계는 받고, 한 달 후에 비로소 원허 노장님을 만나 상좌가 됐어요. 나는 선암사에 그대로 남아서 5년 가까이 있었어요. 노장님은 그해 여름을 지나 강원도 낙산사로 가셨어요. 당시 휴전이 됐으니까 조만간 남북이 소통해서 표훈사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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