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출가와 재가를 넘나든 학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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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3 년 6 월 [통권 제122호] / / 작성일23-06-05 09:36 / 조회2,200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30 | 이영무
이영무李英茂(1921∼1999)는 승려로서 한국불교 연구에 매진한 학자이다. 10대에 출가한 후 재가승이자 대학교수로 활동하다가 정년 퇴임 후 다시 출가한 보기 드문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원효와 태고보우 등에 관한 학술적 연구뿐 아니라 불교의 실천 수행과 포교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북대에서 석사를 한 후 조선대와 건국대의 교수를 역임했다. 또 태고종의 총무원장과 승정까지 지내는 등 출가와 재가를 넘나든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한학자 집안에 태어나 10대에 출가
그는 1921년 음력 3월 5일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조곡리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한학을 연마하고 사서삼경과 제자백가를 두루 읽었다. 10대 중반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임제종 계열의 중학교를 다녔고, 1937년에 돌아와 함경남도 석왕사에서 출가했다. 이때 향림香林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뛰어난 한문 실력 덕분에 강원에서 사집과를 건너뛰고 바로 사교과를 배웠다고 한다.
1942년 강원에서 대교과까지 마친 후 참선 공부에 전념하여 금강산 마하연과 오대산 상원사의 선원에서 각각 설석우, 방한암의 지도를 받았다. 이처럼 이영무는 선과 교를 두루 섭렵한 불교계의 신진 기예로 성장했다. 1943년 하안거를 마칠 때 상원사 조실 방한암은 그의 재능과 한학 실력을 인정하면서 ‘흐르는 물이 한 곳에 머물면 탁해지고 썩게 되므로 세속에 나가 더 공부하여 불법을 펼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 이듬해에 상경한 그는 일단 봉은사에서 강사를 하며 지냈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한 그는 학업을 계속해 나갈 결심을 하고 1946년에 새로 문을 연 동국대 사학과의 1기생으로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불교가 한국사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에 사학 연구가 곧 불교 연구라고 여겼다고 한다. 동국대 재학 시절 서울 성동중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에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1950년 봄 동국대를 졸업했고 얼마 후 6·25 전쟁이 터지자 대구로 내려갔다. 1953년에는 대구 능인고등학교의 사회생활과 교사가 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그는 한국불교 연구를 시작했고 1957년 경북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0년에는 광주 조선대 사학과의 교수로 부임했고, 1964년 조선대 국사연구원 원장, 1965년 동국역경원 역경위원을 역임했다. 1968년에는 서울의 건국대 사학과로 자리를 옮겨서 1987년 정년 때까지 동양사 전공 교수로 재직했다. 건국대에서는 인문과학연구소 소장, 동아리인 불교학생회의 지도교수를 맡았다. 나아가 대학생불교연합회의 지도법사를 했고, 불교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한문과 경전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한국의 불교사상, 특히 신라의 원효와 고려의 태고보우 등에 대한 학술연구에도 전력을 다했다.
한편 그는 1970년에 대처 측이 대한불교조계종에서 나와 새로 만든 한국불교태고종에서도 활동했다. 다음해 5월 서울 광화문 인근의 법륜사에서 태고종의 초대 종정이었던 박대륜을 법사로 하여 그 법맥을 이어받고 운제雲霽라는 법호를 받았다. 태고종의 법규위원회 위원, 중앙종회 의원, 종무위원 등으로 활동한 그는 태고종에서 『태고보우국사 법어집』(1973)을 펴낼 때 참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재가승의 정체성을 지켜오던 그는 1987년 정년퇴임 후에 삭발하고 태고종에서 다시 재출가를 했다.
1988년에는 태고종 총무원장과 종립대학 동방불교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또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 이사와 불교방송 이사를 맡기도 했다. 1991년에는 태고종 승정이 되어 1999년 입적할 때까지 직을 수행했다. 1992년에는 태고총림 선암사 승가대학의 초대 학장을 겸직했는데, 이는 인재 양성을 위한 그의 교육적 관심 때문이었다.
이영무는 개인 사찰인 강원도 원주의 자원사를 정리하고 1992년 충북 영동에 왕산사를 조성했다. 그리고 1996년에는 원효사상 연구의 심화와 확산을 위해 원효연구원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이후 왕산사를 처분하여 원효연구원의 기금을 만든 뒤에 만년에는 경기도 청평의 대성사에 머물면서 후학을 가르치는 한편 염불선 수행에 전념했다고 한다. 1999년 4월 16일 세수 78세, 법랍 62세로 입적했다.
원효와 태고보우에 대한 해석의 지평
이영무는 50년 가까운 세월을 역사학과 불교학을 연구하면서 많은 논저를 남겼는데, 저서로는 『태고보우 국사의 인물과 사상太古普愚國師の人物と思想』(1977), 『한국의 불교사상』(1987)이 대표적이다. 그는 한문 실력이 출중하여 『대지도론』, 『(원효) 열반경 종요』, 『(원효) 보살계본지범요기』, 『원효전집』, 『태고국사 법어집』 등 불교 관련 역서 외에도 『동문선』, 『동사강목』, 『동국여지승람』, 『동국문헌비고』 등 한국의 주요 고전, 그리고 『사마천 사기』, 한시와 선시까지 폭넓게 번역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원효대사의 인물과 사상」, 「원효대사 저 《판비량론》에 대한 고찰」, 「원효대사의 정토사상- 《유심안락도》를 중심으로」, 「원효사상의 현대적 조명」, 「보조국사 지눌의 인물과 사상- 한국불교의 종조론을 중심으로」, 「한국불교사에 있어서의 태고보우 국사의 지위- 한국불교의 종조론을 중심으로」, 「태고보우의 법통과 문손」, 「김시습의 인물과 사상」, 「연담 사기를 통해 본 조선시대의 화엄학」, 「한국불교사상 한용운의 위치- 『조선불교유신론』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원효, 태고보우뿐 아니라 보조지눌, 김시습, 연담유일, 만해 한용운까지 다양한 인물과 사상을 다루고 있다.
이영무는 원효 연구에 큰 비중을 두었는데 원효를 한국 불교사상뿐 아니라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했다. 그는 원효 사상의 핵심으로 화쟁 회통과 일심을 꼽으면서 이는 시대와 민족,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또 원효 사상에서 평등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며, 나와 남이 다르지 않은 자타 평등, 남자와 여자의 평등, 중생과 부처의 평등을 들었다. 그는 화합과 평등을 추구하는 원효의 사상이야말로 대립과 불평등에서 기인하는 세상의 모순과 갈등에 대한 해결방안이 될 수 있다고 높이 샀다. 이러한 맥락에서 「원효 사상에 나타난 인권론」(1985)에서는 원효가 인간을 가장 훌륭한 존재로 보는 인본주의 이론을 제시하고 인권운동의 실천에 앞장섰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는 원효뿐 아니라 고려 말 원나라에 가서 임제종 선풍과 법맥을 이어온 태고보우에도 주목했다. 보우는 조선시대 불교 법통에서 종조의 위상으로 받들어진 인물이었다. 태고법통은 1620년대 중반부터 청허휴정의 제자 편양언기에 의해 제기되어 불교계의 공론으로 자리 잡았다. 그 요지는 태고보우가 전수한 임제종의 정통 법맥이 휴정으로 전해졌다는 것으로, 이러한 인식은 조선 후기 불교계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종조론을 중심으로 본 태고보우의 지위에 관한 이영무의 논문(1977)은 법통 문제를 다룬 선구적 연구로서 주목된다. 그는 여기서 중국의 임제종 법통보다는 고려 말 불교계를 포섭하려 했던 보우의 원융 정책과 통불교의 추구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이영무가 태고법통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불교 정화와 종조 논쟁의 가열, 조계종과 태고종의 분리라는 당시 불교계의 혼란상이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태고법통은 근·현대기에도 그 역사적 권위를 잃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신라의 도의가 한국 선종의 개조라는 주장이 나왔고 1950년대의 불교 정화과정에서 태고와 보조 종조론이 맞부딪히기도 했다. 그 결과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하면서 종조 도의, 보조지눌의 중천, 중흥조 태고보우라는 복합적 역사 인식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대처 측이 1970년 조계종에서 갈라져 나와 태고종을 세우면서 단독으로 태고보우를 종조로 내세웠다. 법통에 대한 이영무의 인식은 이러한 시대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그는 태고보우가 한국불교의 중흥적 중시조로서 높은 위상을 갖는다고 보았다.
이영무는 재가승으로 걸어온 자신의 이력 때문인지 환속이나 대처의 경험이 있는 원효, 김시습, 한용운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리고 재가자인 유마거사가 주인공인 『유마경』을 해설한 『유마경 강설』(1989)을 펴내기도 했다. 이처럼 출세간과 세속의 경계를 넘나드는 승속불이僧俗不二의 길을 학문 연구에 녹여내려 한 것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복잡다단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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