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한국철학의 주체적 길을 모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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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3 년 3 월 [통권 제119호] / / 작성일23-03-03 10:28 / 조회2,250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27 | 박종홍
박종홍朴鍾鴻(1903∼1976)은 한국철학 연구의 길을 개척한 철학자이다. 서울대에 한국철학사 강의를 처음 개설한 한국철학의 대가였을 뿐 아니라, 보통학교부터 대학까지 다양한 교육기관을 두루 거치며 교편을 잡은 교육자였다. 그는 이황과 이이를 비롯한 조선의 유학자와 유학 사상을 주로 연구했고, 개설서를 통해 한국철학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면모는 국수적 민족주의와 조국 근대화 논리를 결합한 「국민교육헌장」의 기초위원으로서 헌장 제정에 일익을 담당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불교에도 큰 관심을 가져서 한국 사상의 주요 흐름의 하나인 불교의 고유성에 주목한 바 있다.
박종홍의 생애와 학문
열암洌巖 박종홍은 대한제국 때인 1903년 7월 1일 평양에서 태어나 어릴 때 가학으로 한학을 익히고 1920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8세 때 멀리 전라남도 보성의 보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고, 1922년에는 대구의 수창보통학교로 옮겼다. 또 같은 해에 천도교에서 펴내는 잡지 『개벽』에 한국 미술사와 관련한 글을 연재했고, 1924년에는 철학에 관한 그의 첫 연구라 할 수 있는 「퇴계의 교육사상」을 발표했다. 1926년에는 고등보통학교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대구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대구고등보통학교는 앞서 1916년에 다카하시 도루高橋亨가 교장으로 부임했던 학교이다. 다카하시는 당시 영남지역의 고문헌을 집중적으로 조사·수집했는데, 그는 의병장 집안에 『퇴계집』이 있는 것을 보고 조선 유학을 연구하기로 뜻을 세웠다. 다카하시는 1926년에 정식으로 개교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교수가 되었고 조선 사상사와 문학사 등을 강의했다. 경성제대는 일제 강점기 때 국내 유일의 대학으로서 교수진은 일본인이었고 학생도 대부분이 일본인으로 한국인의 수는 매우 적었다. 인문학계에서는 국문학의 이숭녕李崇寧, 이희승李熙昇, 사학의 신석호申奭鎬, 유홍렬劉洪烈, 그리고 철학에서는 고형곤高亨坤 등이 대표적인 경성제대 출신자이다.
다카하시 도루의 영향이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박종홍은 1929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칸트로 상징되는 독일 관념론 철학과 하이데거의 실존철학 등을 공부했다. 1933년에는 ‘철학하는 것의 출발점’에 관한 논문을 썼고, 이듬해 졸업 후에 조교로 근무했다. 당시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박종홍은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강사를 거쳐 1937년에 교수가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후 1946년에는 새로 개교한 서울대로 자리를 옮겨 철학과에 재직했다. 그는 학문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면서 ‘모든 학문의 방법을 확립하는 기초적 이론’인 논리학에 관심을 기울여 헤겔의 변증법 논리, 분석 철학 등에 관한 체계적 정리를 시도했다. 또 한국철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한편, 1955년 9월부터 1년간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 가 있으면서 과학철학을 비롯한 현대철학의 최신 연구 동향을 접할 수 있었다. 1960년에는 「부정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편 그는 한국철학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 등을 지냈고, 1968년 정년퇴직 후에는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 등을 거쳤으며, 1976년 3월 17일에 별세했다.
박종홍은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 한국 철학의 방향에 대해 많은 고민과 새로운 모색을 했다. 저술로 『일반논리학』(1948)과 『인식논리학』(1953), 『철학개론강의』(1953)와 『철학개설』(1954), 『철학적 모색』(1959) 및 『지성과 모색』(1967), 『한국의 사상적 방향』(1968) 등을 남겼고, 불교와 관련한 연구서로는 『한국사상사- 불교편』(1972)을 냈다. 또 『변증법적 논리』와 『한국사상사- 유학편』은 사후에 유고집으로 나왔다.
박종홍은 한국의 전통적 사유를 근대적 시각의 철학의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유교와 불교 등의 개념과 사상을 서양의 철학 용어로 풀어쓰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전통에 대한 근대적 해석과 주체성의 강조는 해방 후 그가 살았던 시대의 과제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와 근대화론이 들끓어 오르던 시대 분위기에 경도되어 학문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고 지나친 미화와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들 수 있는 위험성도 있었다.
박종홍이 『중용』의 중화中和 개념을 중시하며 치우치지 않는 바른 상태를 추구한 것마저도 현실 순응적 태도로 비판받은 것은 그러한 시대적 함의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불교의 철학적 해석과 원효의 재조명
박종홍은 「한국사상 연구에 관한 서론적인 구상」(1958)에서 한국철학을 탐구하고 학문적으로 성립시켜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한국의 유학과 불교에 대해 발굴을 기다리는 보물과 같다고 비유하며 그 안에서 사상적 독자성을 찾으려 했다. 특히 “불교의 영향을 떠나서 한국사상을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서양사상을 기독교와의 관련을 무시하고 생각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하여, 불교를 한국철학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했다. 또 불교철학이라는 명칭을 내세우면서 한국의 불교사상에서 서양 철학적 요소를 발견하려 했고, 한국의 사유 전통에 어떠한 철학적 특색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박종홍이 『한국사상사- 불교편』에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꼽은 이는 고구려의 승랑, 신라의 원측과 원효, 고려의 의천과 지눌이었다. 먼저 삼론학의 이론적 선구자인 승랑의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를 서양의 변증법으로 해석했고, 이를 변증법적 인식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수준 높은 철학으로 평가했다. 또 현장의 제자로서 독특한 유식사상을 펼친 원측의 교학에서 훗설의 현상학을 연상시키는 내용을 발견했다. 그는 원측이 의식에 대해 치밀하게 분석한 점을 들면서 현상학의 본질 직관보다 뛰어나다고 보았다.
나아가 승랑의 중관사상과 원측의 유식사상을 화쟁의 논리로 종합한 이가 바로 원효이며, 모든 정과 반의 모순과 다툼을 하나로 화해시킨 것이 원효의 사상이라고 단언했다. 그가 의천의 사상에서 주목한 것도 의천이 원효의 화쟁 사상을 다시금 재발견하고 교관敎觀의 병행을 추구한 점이었다. 지눌의 경우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현상학의 개념인 본질 직관과 연결시키면서 정적인 관조에 그치는 본질 직관에 비해 더 근본적인 인식이라고 추켜세웠다.
『한국사상사- 불교편』에서는 ‘화쟁의 논리’라는 장을 별도로 두어 원효 사상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여기서는 원효 사상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강조하며 철학적 특징을 검토했는데, 불교 사상사적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석가모니 당시는 몇 가지 견해와 입장만 존재하여 그 속에서 진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여러 상이한 이론과 해석이 등장하게 되고,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다투게 됨에 따라 교리적 반목이 심해졌다. 이런 갈등과 분쟁 속에서 원효의 사상이 등장함으로써 모든 논쟁이 중재되고 다양한 견해가 통합되기에 이르렀다.”고 높이 평가했다.
박종홍은 원효의 화쟁 논리야말로 화합을 강조함으로써 한국불교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보았다. 또 화쟁 사상을 이견과 분열을 극복하는 화합의 동력이자 공통의 선이 존중되는 새로운 도덕 원리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방법론적 차원에서 내적·외적 방향만 추구하는 서양철학보다 뛰어난 것으로 위치지었다. 원효는 일제 강점기부터 불교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고 화쟁을 비롯한 원효의 사상은 최남선이 통불교론을 주창할 때 주요 근거로 쓰기도 했다. 그렇지만 서양철학을 의미하는 철학 분야에서 원효를 재발견하고 새롭게 조명하게 된 데에는 박종홍의 역할이 컸다.
박종홍은 서양철학과 한국의 전통 사상을 융합하여 현대의 한국사상을 정립하고자 했다. 그는 외래 사상을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내면적 자각과 민족적 주체성이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전통 사상의 전승과 외래 사상의 섭취가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야만 현대 한국의 새로운 사상을 창출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 점에서 그의 선구적 혜안과 학문적 기여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만 당시의 시대 분위기에서 그의 주장은 철학이라는 학문적 울타리에 머물지 않고 민족의 주체성과 국민 총화를 전면에 내건 국가 이데올로기로 전용될 소지가 있었다. 이미 제국주의 일본에서 화엄의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을 천황과 신민의 관계로 비정하거나 야마토大和의 화和를 조화와 화합의 국민정신으로 이해하는 등 철학을 정치에 활용한 사례와 유사하게, 국민교육헌장의 제정 등 현실 속에 투영된 그의 철학적 실천은 찬반의 극단적 평가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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