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귀축미영을 외치는 군사훈련 받으며 공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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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 2023 년 2 월 [통권 제118호] / / 작성일23-02-03 10:49 / 조회2,669회 / 댓글0건본문
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6 |인환스님 ②
네 살에 한문 공부 시작
▶ 스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궁금합니다.
내가 공부를 시작한 것은 네 살 딱 되던 때부터입니다. 그 할아버지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밖에 출입하실 때는 반드시 갓을 단정히 쓰고 두루마기를 입으셨어요. 키가 꽤 크세요. 하얀 수염 기르셔서 아주 엄전하신 분이었어요. 그러면서도 둘째 손자인 나를 대단히 귀여워하셨지요. 교육에 각별히 신경을 쓰셨어요. 네 살 딱 되니까 나를 불러서는 “너, 이제 네 살이 됐으니 지금부터 공부를 시작해야 된다.”고 하셨어요. 나는 맘대로 뛰어놀던 시절이었는데 무슨 공부를 해야 되나 했더니 접책으로 된 『천자문』 책을 내주시면서 “이제부터 할아버지한테 배워야 된다. 매일 오후 두 시에 책을 가지고 꼭 할아버지 방에 오너라.” 하셨어요.
그날 배운 것은 꼭 다 배워서 그 이튿날 와서 틀림없이 외워 바쳐야 앞으로 나아가지, 제대로 못하면 벌을 받아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튿날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가운데 앉은책상 하나 놓고 마주앉아서 옛날식으로 할아버지가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하면 병아리 어미 쫓듯이 외웠지요. 그래 가지고 처음에는 한 쪽이니까 그게 사사 십육, 열여섯 자가 될 거예요. 그걸 배우고 나서 “내일까지 달달 제대로 외워 오너라.” 하시고. 그 이튿날 가서는 앞에서 책 덮고 어제 배운 거 그대로 외우고, 그 뜻이 뭔지도 모른 채 배운 대로 풀이하고요. 그렇게 해서 이제 합격점이 되면 “음~ 됐다.” 하셨지요.
할아버지가 앉은 한쪽에는 대나무 회초리 하나, 한쪽에는 작은 접시에 눈깔사탕이 있었어요. 그때 눈깔사탕이라고 그랬지요. “외워봐라.” 그러시면 잘잘잘 외우면 “됐다.”하고는 그날 배울 거 일러주시고, 나갈 때 “옛다.” 하고는 눈깔사탕 하나 주셨지요. 그때는 지금처럼 이렇게 과자 종류가 흔하지 않고 많지 않을 때였지요. 그 눈깔사탕 하나면 어렸을 때는 하늘을 딴 거 같이 기분 좋았지요. 저녁 먹을 때까지 그게 살살 녹을 때까지 물고 장난하고 놀고 그랬어요.
할아버지의 회초리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집에 있는데 밖에서 꽹과리에 장구소리가 울리고 뭔지 모르지만 동네 축제가 있었어요. 놀이패들이 오고 사람들이 줄줄이 따르고 애들은 마냥 좋아 따라다니거든요.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요? 달려나가 신나게 따라다니다가 저녁때가 훨씬 지나 어두워져서 돌아왔지요.
허기진 김에 허겁지겁 밥을 많이 먹었지요. 그러고 나니까 졸리잖아요. 그대로 잤지요. 공부는 뒷전이었지요. 다음 날 공부 시간에 제대로 못 외우고 더듬거릴 수밖에요. 할아버지께서 종아리를 걷게 했어요. 그날 꽤 아프게 맞았지요. 딱, 딱, 딱 세 번 때리시는데, 그때에 엄살을 부렸다가는 더 맞기 쉬워요. 그래서 이를 악물고 참았지요. 회초리를 내려놓으시더니, “오늘은 공부 못 한다. 가서 이것 모두 외워 가지고 내일 와서 다시 배운다.”고 하셨어요. 천자문 뗄 때까지 딱 한 번 그런 일이 있었어요.
▶ 할아버지가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우셨군요?
자애로우시지만 엄격한 가르침을 소학교 들어갈 때까지 한 4년 동안 받았어요. 말하자면 할아버지가 서당의 독선생인 셈이지요. 4년 동안 『천자문』, 그다음에 『동몽선습』, 『명심보감』, 그다음에 『소학』 등을 배웠어요. 소학교 들어갈 무렵에는 『논어』, 『맹자』 등 스스로 읽을 정도가 되었어요.
학교 가서 신식 공부하게 되니까 할아버지께 배우는 한문 공부는 이렇게 끝났지요. 그 무렵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할아버지께 한학漢學의 기초를 제대로 철저하게 배운 것이 그 후에 내가 절에 들어와서 강원에서 경전을 보거나 전통적인 이력을 공부할 때 큰 도움이 되었어요. 대학원 공부할 때나 나중에 일본에 유학 가서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용동소학교 시절
원산에 우리 한국 사람들 사는 지역에 유명한 소학교가 둘이 있었어요, 하나가 명석소학교이고, 내가 다닌 학교는 용동소학교였어요. 학교는 남산이라고 하는 2~3백미터 되는 산기슭에 있는데 학생들도 꽤 많았어요. 1940년인가, 소학교 때는 지금처럼 어른들이 애써서 공부시키는 풍조가 없었어요.
학교에서 오후 서너 시에 끝나면 으레 책가방 들쳐업고 뒷산에 올라가 어둡기 전까지 산을 뛰어다니며 자유롭게 놀았습니다. 흔히 식자들 말 가운데 아이디어를 잘 내고 큰일을 하고 꿈을 키우고 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자연 속에서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성장한 덕분이라고들 하지요.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그때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것을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 일제강점기 시절의 신식 교육은 어떤 것이었나요?
아침 9시 공부 시작하기 전에, 8시 반쯤에 조회를 합니다. 운동장에 전교생 모이고 선생님들이 앞에 서고, 교장이 단상에 올라가 일장 훈시를 합니다. 일본인 교장인데 어깨에 힘을 넣고 말이 많았어요. 시간이 좀 지나면 발이 차갑게 얼고, 어휴~ 가끔씩 동상이 걸리기도 했지요. 교실에는 쇠로 만든 난로 놓고 거기에 장작을 때거나 아니면 석탄을 때서 난방을 했지요. 집에서 벤또(도시락)를 들고 와 그 난로에다가 층층이 올리지요. 점심 때 그 도시락 까먹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요. 서로 네 꺼, 내 꺼 바꿔 가면서 그렇게 지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남아 있는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는 일본강점기이니까 신문에 일본 천황 사진이 흔하게 나왔거든요. 선생님들이 “너희들 집에 온 신문에 천황이 나온 사진을 아무데나 버리지 말고 꼭 오려서 학교에 가져오너라.”고 했어요. 오려서 가지고 가면 모아 가지고 따로 모시고, 그런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또 ‘황국신민의 선서’라는 것이 있었어요. 뭘 할 때마다 외웠지요. 전쟁 말기에 가서는 하는 짓이 점점 크레이지crazy해 졌어요. 우리 민족성을 다 일본식으로 바꾸라고도 했지요. 심지어 시골에서 원산장에 오는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나 아녀자들까지 길에서 잡아 세우고는 황국신민의 선서라는 것을 외우라고 하더구만요. 외우면 장에 들여보내고 못 외우면 못 가게, 그런 짓까지 했단 말이죠.
태평양전쟁 중 귀축미영 구호를 외치며 공부
▶ 태평양전쟁 중에 중학교를 다니셨군요?
1944년도에 (구제) 원산상업학교에 입학했어요. 아버지도 여기 출신이고, 형도 여기 출신인데 내가 삼대로 또 여기 들어갔어요. 학생들은 우리 조선 사람이 3분의 2 정도이고, 나머지가 일본 학생이었어요. 그때는 일본이 전쟁 말기에 접어들었던 시기라 공부를 하면서도 군사훈련을 받았어요. 카키색 군복을 입고 모자도 쓰고 각반에 군화까지 신었어요. 1학년 때 영어를 배우는데 미국과 영국을 귀축鬼畜, 말하자면 귀신이나 축생 같은 놈들이라며 “귀축미영鬼畜米英!”이라는 구호를 외치도록 했어요.
1945년 광복되기 직전, 7~8개월 전에 전쟁이 점점 막바지에 이를 때입니다. 일본 본토에 B-29라고 하는 폭격기가 동경이고 어디고 막 폭탄을 내려 가지고 쑥대밭이 되었다고 했어요. 머지않아 한반도에도 비행기가 와 가지고 폭탄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어요.
일본은 그때 속으로는 망해 들어가면서도 겉으로는 결사항쟁을 했어요. 그것들이 일본 열도에 상륙하기만 하면, 그때 인구가 1억이라고 그랬거든요. 1억이 전부 무기 하나씩, 대나무 죽창으로 그 상륙하는 미군 하나씩 죽이겠다 이겁니다. 그때 일본과 미국은 군사력이 크게 차이 났는데도 말이지요. 미국은 온갖 비행기, 군함 가지고 나중에 원자폭탄까지 투하했지요. 일본은 석유와 군사물자가 모자라서 죽을 지경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학생들을 그런 식으로 훈련시켰지요. 안 받을 수가 없단 말이요.
그러다가 해방되기 7~8개월 전에 도시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지방 시골로 이주시켰어요. ‘소개疏開’라고 해요. 그래서 많은 집들이 시골로 갔어요. 우리 집은 부친이 영화관 경영만 한 것이 아니라 원산 시내에 큰 목재소를 운영했어요. 목재를 사 오기도 하고, 주로 산판이라고, 산중에서 나오는 나무를 전부 들여와 제재해서 팔았지요.
▶ 부친이 극장운영과 제재소를 운영하셨군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학생을 전부 근로동원 시켜서 산중에 가서 일주일 내지 열흘씩 있으면서 소나무를 베도록 시켰어요. 배 만드는 조선용으로 쓴다는 명목으로 몇 백 년씩 내려오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베어서 가지고 나갔어요. 또 벌목하고 남은 등걸까지 파내게 해서는 진액을 뽑아 정제해서 항공기 기름으로 쓴다는 거예요. 참 망할 운명이지요.
서방은 진진찰찰塵塵刹刹 석유를 써가며 수백 대의 비행기를 띄우는데, 일본은 기껏 어린 학생들 동원시켰어요. 종일 캐야 이런 나무 등걸 하나 캘까 말까인데. 나무 하나에 개미떼처럼 모여서 연장이래야 괭이하고 삽밖에 더 있나요. 힘들게 파내면 나중에 트럭에 싣고 갔어요. 그렇게 전쟁 말기에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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