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벽화 이야기]
마음의 소를 찾는 심우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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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 2022 년 11 월 [통권 제115호] / / 작성일22-11-07 10:44 / 조회3,401회 / 댓글0건본문
득우得牛, 소를 얻다
다음은 득우이다. 득우는 수행자가 소[本性]를 잡았지만 아직 길들여지지 않아 소에 채찍질하는 모습이나 고삐를 잡고 소를 다루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화송和頌에서는 “튼튼한 밧줄을 잡고 놓치지 말게[牢把繩頭莫放渠]. 아직도 수많은 나쁜 버릇이 없어지질 않았네[幾多毛病未曾除].”라 하였고, 서序에서도 “완고한 마음이 아직도 드세고 야성이 그냥 그대로 남아 있네[頑心尙勇 野性猶存]. 온순하고 부드럽게 하고자 하거든 반드시 채찍질을 가해야지[欲得純化 必加鞭楚].”라고 한 것이다. 즉 이제 본성을 찾았지만, 아직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더욱 열심히 수련해야 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면 득우 벽화와 함께 게송을 보자.
갈진정신획득거 竭盡精神獲得渠
심강역장졸난제 心强力壯卒難除
유시재도고원상 有時纔到高原上
우입연운심처거 又入煙雲深處居
온 정신 다하여 그 소를 붙잡았지만
힘세고 마음 강해 다스리기 어려워라.
어느 땐 고원 위에 올라갔다가
어느 땐 구름 깊은 곳으로 숨어들고 만다네.
“마침내 자기와 세계를 잊어 일체가 모조리 없어졌을 때 홀연히 나타난 소. 그러나 예부터 젖어 온 기질을 모두 없애기는 어렵구나. 어떤 때는 자기도 없고 부처도 없고 세계도 없는 명백한 곳에 이르고, 어떤 때는 다시 대상이 분분하게 일어나는 곳으로 들어가는구나.”로 게송을 풀이하기도 한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이것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남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자신을 통해서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소는 나의 외부 어디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소는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핵심이었다. 나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곧 소를 찾는 길이었다.
그러면 앞의 ‘채찍’이라는 말의 뜻이 이해될 것이다. 보통은 채찍을 휘두른다면 폭력이 연상된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채찍은 억압의 상징이나 폭력적인 것이 아니다. 그 채찍은 일체를 관觀한다는, 그저 깨어난다는 뜻이다.
벽화로 표현되는 ‘득우’는 그 배경이 다양하게 그려지지만 동자가 소를 묶어 붙드는 모습에 있어서 표현상의 차이는 거의 없다. 송광사 승보전 벽화의 득우(사진 1)는 역동적 자세의 동자가 막 소를 붙잡는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소나무를 배경으로 아스라이 사라지는 산수가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곧 소가 발견된 환희로 가득 차 출렁이고 있음을, 어디에도 참 존재는 숨어 있던 것이 아니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목우牧牛, 소를 기르다
목우는 심우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소를 길들이고 그것을 타고 가되 걸림이 없게 되는 이것은 정신적 편력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다섯 번째인 목우도는 깨달음 뒤에 오는 방심을 더욱 조심해야 함을 비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다섯 번째 목우에 이르러 사실상 수행의 기본 목적은 달성이 된 것이고, 그 이후 제10 입전수수入廛垂手까지는 목우의 자연적인 공용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의 목우자 지눌知訥 스님은 「수심결修心訣」에서 이렇게 자세히 이르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후 모름지기 조찰照察(지혜로 비추어 자신을 살펴봄)을 해야 한다. 망념이 별안간 일어나면 이를 없애고 또 없애 무위에 이르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구경究竟이 이뤄지는 것이다. 천하의 선지식이 깨달은 후에 하는 목우행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이를 벽화로 나타낼 때는 소에 고삐를 물리고 돌아오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예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은해사 대방의 벽화에서 같이 유유히 앉아서 소가 풀을 뜯어 먹는 것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사진 2). 이에 대한 게송을 보자.
편색시시불리신 鞭索時時不離身
공이종보야애진 恐伊縱步惹埃塵
상장목득순화야 相將牧得純和也
기쇄무구자축인 羈鎖無狗自逐人
채찍과 고삐 잠시도 떼어놓지 않음은
제멋대로 걸어서 티끌세계 들어갈까 두려운 것
서로 잘 이끌고 이끌려 온순해지면
고삐 잡지 않아도 제 스스로 사람을 따르리.
이를 다시, “앎은 쉬워도 그렇게 됨은 지극히 어렵구나. 끊임없이 닦고 익히면 마침내 마음과 대상이 일치하여 잡된 것이 하나도 없는 순수함에 도달하나니, 오묘한 경지가 절로 나타나 꽃을 대하면 사람과 소가 함께 꽃이고, 버들을 대하면 사람과 소가 모두 버들이니, 이제는 영원히 나누어질 것 없네.”라고 해설할 수 있다.
채찍은 각성의 상징이다. 그리고 고삐는 언급하였듯이 정진력, 즉 내면의 수양을 뜻한다. 각성과 수양은 새의 양 날개와 같이 정진하는 이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 또한 중요한 것이다. 각성이 없는 수양은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수양만으로는 기계적이고 습관적이 될 뿐이다. 그래서 먼저 각성이라는 채찍이 필요하고, 두 번째로 수양이라는 고삐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훈련이 필요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하나의 수단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여기에서도 빠져나와 그 각성이 자연스러우며 수행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안에서 그저 계속 일어나는 현상이 될 때 그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때에는 고삐를 풀어줘도 주인을 잘 따를 것이다.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여섯 번째 기우귀가에서는 소와 사람이 하나가 되어 본가本家(곧 본래의 성품)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여기에서 말하는 귀가는 귀근歸根, 귀원歸源, 귀진歸眞, 귀일歸一 등과 같은 말로서 원효성사께서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歸一心源]이라 한 것과도 같다 하겠다. 여기서 잠깐 『전등록傳燈錄』 제9권 복주대안福洲大安 선사의 장을 살펴보자.
대안스님이 백장스님 계신 곳에 가서 예를 올리고 물었다. “학인이 부처를 알고자 하는데 어느 것입니까?” 백장스님이 말하기를 “흡사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것 같구나.” 스님이 말했다. “안 뒤에는 어떠합니까?” 백장스님이 말했다. “소를 타고 집에 이르는 것과 같다.” 스님이 물었다. “처음과 마지막에 어떻게 보림保任해야 합니까?” 백장스님이 말했다. “소 먹이는 사람이 채찍을 들고 지켜보아 남의 곡식밭에 들지 않게 하는 것 같느니라.”
이 말을 듣고 스님은 깊은 뜻을 깨달았다.
이를 기우귀가 벽화에서는 길들여진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돌아오는 모습(사진 3)으로 표현한다. 역시 뇌록의 바탕 위에 먹선을 긋고 채색을 하는 예의 방법으로 그려졌다. 근경의 숲 너머로 흰 소를 탄 동자가 피리를 불며 집[本性]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 뒤로 멀리 원경이 펼쳐지면서 화면의 구도를 안정시키고 있다.
기우이려욕환가 騎牛迤麗欲還家
강적성성송만하 羗笛聲聲送晩霞
일박일가무한의 一拍一歌無限意
지음하필고진아 知音何必鼓唇牙
소를 타고 유유히 집으로 향하니
오랑캐 피리 소리 마디마디 저녁노을에 실려 간다.
한 박자 한 가락이 한량없는 뜻이려니
아는 이여, 굳이 무슨 말이 필요하랴.
“등 위에 사람 없는 소, 무릎 아래 소 없는 사람. 이제 유유히 참 근원으로 돌아가니 소박한 가락이 노을과 나란히 가고 물과 하늘이 한 빛깔이다. 노래 한 곡조와 노래 한 가락이 만물의 근원이니 이는 줄 없는 거문고의 비밀스런 곡조일세.”라 다시 이르고 있다.
갈등이나 투쟁이 끝날 무렵 모든 것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둘 모두 하나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이제 굳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방황하면서 헤맨 것도 성장의 일부였다.
이와 같이 이원성이 사라진 경계를 기우귀가는 소와 사람이 하나가 되어 본가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그려 그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또한 기우귀가는 동양회화 일반에도 영향을 주어 많은 화가들이 즐겨 다루는 소재이기도 하다.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는 잊고 사람만 남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본당本堂 외벽에는 팔상도와 십우도가 그려진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팔상도가 가지는 교화적 가르침과 십우도가 일깨우는 자신의 본래면목에 대한 성찰은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요약하여 일컫는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下化衆生]’는 가르침의 시각적 구현이라 하겠다.
심우도의 일곱 번째 벽화인 망우존인(사진 4)은 집에 돌아왔지만 소는 간 데 없고 오직 자기 혼자만 남아 있는 것을 그렸다. 그림과 함께 게송과 해설 등을 살펴보자.
기우이득도가산 騎牛已得到家山
우야공혜인야한 牛也空兮人也閑
홍일삼간유작몽 紅日三竿猶作夢
편승공돈초당간 鞭繩空頓草堂間
소를 타고 이미 고향집에 이르렀으니
소 또한 공하고 사람까지 한가롭네.
붉은 해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꾸는 것 같으니
채찍과 고삐는 초당에 부질없이 놓여 있네.
“잃을 것도 얻음도 없는 고향으로 돌아오니 맑은 바람이 밝은 달을 버리고 밝은 달이 맑은 물을 버리듯, 소는 더 이상 필요 없고 사람 또한 할 일 없네. 아침이 되어 해가 솟아도 여전히 꿈속이다.”라는 의미로 풀어 볼 수 있겠다.
앞의 단계에서 소를 발견하고[見牛], 소를 붙들고[得牛], 소를 잘 길들이고[牧牛],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騎牛歸家]. 그러나 제7단계는 집에 아주 돌아와 버린 단계이다. 그래서 망우존인은 도가망우到家忘牛라고도 불린다. 도가到家란 집에 도달했음을 뜻한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만 소를 찾아 나섰던 일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이제 채찍[각성]과 고삐[수양]는 필요치 않다. 각성과 수양 등의 구분도 물거품같이 사라지고 하나가 된다. 그 하나 됨 속에는 소를 찾았다는 생각 그것마저도 지워진 경계라 하였다.
자성自性을 찾기 위한 여행을 처음 떠날 때는 필요했으나 이제 그것마저도 초월된다. 그래서 일곱 번째 망우존인에 이르러 사람과 소가 별개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라 한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몸과 마음으로 분리시키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만약 몸이 건강하다면 우리는 어떤 육체적인 감각을 느낄 수 없다. 마치 몸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몸의 어딘가가 아프다면 곧 몸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나의 삶이 하나로 화음을 이루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무엇인가 불협화음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스스로 분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모든 박자가 맞아떨어졌을 때, 즉 화음을 이루고 있을 때 모든 구분은 초월되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 “고향집에 이르렀다.”고 한 것이다. 고향집에 이르렀음은 현상적인 삶과 나 자신의 근원이 서로 만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서序에서 법무이법法無二法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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