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마천루 숲에 자리 잡은 천년 고찰 봉은사
페이지 정보
정종섭 / 2022 년 11 월 [통권 제115호] / / 작성일22-11-07 10:19 / 조회3,008회 / 댓글0건본문
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25 | 봉은사 ①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1천만 정도의 인구가 생활하고 있는 국제적인 도시로 번창하고 있다. 서울의 구역도 조선시대 경기도 땅 일부가 편입해 들어와 600㎢에 달한다. 그런 만큼 서울에는 사찰들이 많이 있다. 오랜 역사의 시간 속에서 유서 깊은 사찰들이 많이 소실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강 건너 저편 피안의 봉은사
서울에서도 가장 중심 지역인 강남지역에는 555m의 롯데월드타워가 높이 솟아 있는 풍경과 함께 해발 75m로 겸손하게 엎드려 있는 수도산修道山 남쪽에 바로 봉은사奉恩寺가 있다. 수도산은 관악산冠岳山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우면산牛眠山을 이루고 다시 매봉산으로 내려와 봉우리를 형성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漢陽 삼각산三角山 아래 도성都城에서 나와 5리쯤 걸어 한강변으로 와서 배를 타고 강 중간에 있는 모래섬인 저자도楮子島를 거쳐 강을 건너야 다다르는 곳이다. 이 저자도는 경치가 빼어나 그 옛날에는 별장도 있었고 기우재를 지내기도 했는데, 1970년대 강남 개발 때 이곳에서 모래와 자갈을 파내어가는 바람에 지금은 강물 속에 잠겨 있다(사진 1).
조선시대에는 두모포豆毛浦 즉 오늘날 동호대교東湖大橋 북단인 옥수동 극동아파트가 있는 일대에 중종中宗(李懌, 1506~1544)은 1517년에 정자를 고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조성하게 했다. 도성 밖에 자리한 이곳은 국가동량지재國家棟梁之材인 젊은 엘리트 관료들을 선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 즉, 왕이 휴가를 주어 독서와 사장학詞章學 등에 전념할 수 있게 한 공간이었다. 왕실의 지원과 우대로 소수 정예 인재를 양성한 이곳은 뒤로는 높은 산이 있고, 앞으로는 대강大江이 흐르는, 한양에서 산수풍광山水風光이 아름다운 곳이기도 했다. 12칸의 정당正堂, 동서의 상방上房, 남쪽 누대樓臺, 8칸의 문회당文會堂, 장서각藏書閣, 물시계를 설치한 누각, 연못과 정자, 3중 계단의 화원, 숙소, 주방, 마구간 등을 갖춘 상당한 규모였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모두 잿더미로 사라졌다.
독서당제도는 성균관成均館 대제학大提學은 반드시 독서당 연찬의 경력이 있어야만 했을 정도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제도였다. 세종 때의 사가독서제에서 시작하여 1773년까지 약 350년 동안 장소를 옮겨다니던 독서당에는 매회 평균 6~7명씩 모두 48차례에 걸쳐 선발한 320명의 인재가 배출되었다. 초기에는 사찰 공간을 활용하다가 동호에 제대로 모습을 갖추었는데, 결국 화마 속으로 사라졌다. 그 이후 다시 새 공간을 찾아 운영되다가 정조正祖(李祘, 1776~1800)때 규장각奎章閣이 만들어지면서 독서당제도는 운영되지 않았다(사진 2).
이런 환경 속에서 전도양양한 엘리트들은 밤낮을 잊고 독서와 연찬을 하다가 때로 여유가 있을 때면 배를 타고 동료들과 원족遠足을 가기도 했던 곳이 저자도와 봉은사였고, 그곳에는 선왕先王들의 위패를 봉안한 원당願堂도 있었기에 관리들의 발걸음도 잦았고 숭유억불崇儒抑佛의 분위기 속에서도 많은 문사文士들이 편한 마음으로 자주 들리기도 했다. 성현成俔
(1439~1504), 김안국金安國(1478~1543), 신광한申光漢(1484~1555), 정렴鄭磏(1506~1549), 박지화朴枝華(1513~1592), 노수신盧守愼(1515~1590), 윤근수尹根壽(1537~1616), 이산해李山海(1538~1609), 최립崔岦(1539~1612), 백광훈白光勳(1537~1582), 최경창崔慶昌(1539~1583), 이달李達(1539~1618), 정두경鄭斗卿(1597~1673), 이경석李景奭(1595~1671), 이덕무李德懋(1741~1793), 정약용丁若鏞(1762~1836), 신위申緯(1769~1845), 김정희金正喜(1786~1856), 장지연張志淵(1864~1921), 오세창吳世昌(1864~1953) 등등 역대 기라성같이 많은 유명한 문인 학자들이 봉은사와 관련하여 시를 많이 남긴 것에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국문학자 이종묵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봉은사를 소재로 한 시詩 가운데는 16세기 무렵의 것이 가장 많고 수준도 높다고 한다(사진 3).
선릉의 능침사찰 봉은사
봉은사는 794년(원성왕元聖王 10)에 신라의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한 견성사見性寺가 그 시초라고 하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7대 성전사원成典寺院 중의 하나인 신라의 봉은사가 현재의 봉은사와 동일한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그 후 고려시대 500년 동안 봉은사에 관한 자료는 현재 찾기 어렵다. 봉은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은 신라 이후 고려 태조의 원당願堂으로 지은 개성開城의 봉은사 그리고 강화도의 봉은사 등 역사상 여럿 있었다.
기록으로 보면, 현재 서울 강남에 있는 봉은사는 1498년(연산군 4)에 성종成宗(李娎, 1469~1494)의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1462~1530)가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을 위하여 능의 동쪽에 있던 작은 절을 중창하여 능침사찰陵寢寺刹로 삼고 절 이름을 봉은사라고 한 것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 때는 절에 왕패王牌를 하사하고, 전토田土가 없는 봉은사에 각도의 절에서 거둔 세와 소금을 주기도 했다. 봉은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성종과 폐출廢黜 사사賜死된 폐비 윤씨 다음 차례에 왕비가 된 정현황후를 안장한 선릉이 있다(사진 4).
그리고 그 가까이에 정현왕후의 아들인 중종을 안장한 정릉靖陵이 있는데,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그 구역이 공원화되어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사진 5). 중종으로 보자면 친부모와 같이 인근 묘역에 묻혀 있는 셈이다. 문제는 정현왕후가 폐비 윤씨의 아들을 키웠는데 그가 연산군燕山君이다. 연산군은 자랄 때까지 정현왕후를 친모로 알았지만 나중에 사사된 윤씨가 친모임을 알고 친어머니를 복위시키려고 했다. 이때 조종지헌祖宗之憲에 비추어 불가하다고 반발하는 신하들과 선비들을 모조리 고문하고 죽이는 피의 제전을 벌였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1504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김굉필金宏弼(1454~1504), 권주權柱(1547~1505), 홍귀달洪貴達(1438~1504), 성준成俊(1436~1504), 이주李胄(?~ 1504) 등 많은 거유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 일가친척들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이와 맥락은 다르지만, 과거 수양대군首陽大君(1417~1468)과 작당하여 무인들을 동원하여 단종端宗(1452~1455)을 쫓아내고 이른바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킨 후에 그를 왕으로 등극시키고 예종睿宗(李晄, 1468~1469)과 성종에게까지 자기 딸을 시집보내 한 시대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하다가 죽은 희대의 인물, 한명회韓明澮(1415~1487)의 묘도 이때 파헤쳐져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임사홍任士洪(1449~1506)과 처남들인 신수근愼守勤(1450~1506), 신수겸愼守謙(?~1506), 신수영愼守英(?~1506) 형제 등과 한패가 되어 온갖 패악을 저지르고 국가의 인재들을 도륙하며 날뛰던 연산군도 결국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쫓겨나고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중종으로 즉위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그간에 있어온 불교 탄압에 더욱 열을 올려 불교의 중심이던 원각사圓覺寺에서 승려들을 쫓아내고 기생들이 사용하게 하고 승과도 폐지해 버렸다. 서울 종로에 있는 원각사의 10층석탑은 현재 플라스틱 거푸집 안에 들어 있고, 그 터는 ‘탑골공원’으로 변해 있다. 자신도 ‘없앰을 당할 날’이 가까웠음을 모르고 날뛰었던 모양이다. 그 원각사는 일찍이 그의 증조할아버지 세조世祖(1455~1468)가 흥복사興福寺를 중수하여 세운 절인데도 말이다.
허응당 보우화상과 선종 수사찰 봉은사
이성계李成桂(1335~1408)가 군사쿠데타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오백년간 번창했던 고려의 왕王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 다음(인류 역사에서 이런 대량학살이 얼마나 될까?) 통치이데올로기로 유교를 내세워 신라-고려시대를 유지해 왔던 불교를 하루아침에 없애려고 했다(그런데 유교가 무엇인지 과연 이해는 했을까?). 태종太宗(1400~1418)은 11개 불교 종파를 7개로 통합하여 242개의 절만 남기고 전국의 사찰을 모조리 없앴고, 세종世宗(1418~1450)은 7개 종파를 다시 선교 2개 종파로 통합하고 사찰도 36개만 남기고 다 없앴다. 세조는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면서 사람들을 무수히 죽인 죄가 두려웠던지 불경을 발간하는 등 부처에게 공들이는 일은 다소 열심히 했으나 죽어 극락에 갔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성종도 불교 탄압에는 마찬가지였고, 그 아들 연산군도 그렇게 날뛰다가 죽었다.
아무튼 봉은사는 이러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출발하였다. 명종明宗(李峘, 1545~1567)을 대리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던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는 독실한 불교신자답게 1551년(명종 6)에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주석하던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1509~1565)화상을 도대선사都大禪師로 용하여 봉은사의 주지로 삼고 불교의 중흥을 도모하였다. 보우화상의 사상은 선교일체禪敎一體와 유불조화儒佛調和를 추구했다. 선종과 교종이 다시 부활되어 봉은사는 선종의 수사찰首寺刹이 되고, 광릉에 있는 봉선사奉先寺는 교종敎宗의 수사찰로 정해졌다(사진 6).
판선종사判禪宗事인 보우대화상은 당시 왕실의 강력한 지원 하에 불교 중흥을 주도하였는데, 1552년에는 300여 개의 사찰을 국가가 공인하는 정찰淨刹로 정하고, 도첩제에 따라 2년 동안 승려 400여 명을 선발하고, 과거시험에서 그간 폐지되었던 승과를 부활시켜 3년마다 실시하도록 하였다. 현재 코엑스가 들어선 넓은 부지는 원래 봉은사의 땅이었는데, 명종 때에 여기에서 승과시험을 실시하여 승과평僧科坪이라고 불렀다(사진 7).
이 승과가 부활되고 실시된 1552년의 승과시험에서 부용영관芙蓉靈觀(1485~1571) 대사의 법맥을 이은 서산대사西山大師 청허휴정淸虛休靜(1520~1604) 화상이 급제하고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어 봉은사 주지를 지냈다. 그렇지만 양사兩司와 성균관 유생 등으로부터 양종과 승과를 폐지할 것을 상소하는 일이 줄기차게 반복되었다. 잠시 다른 장면을 보면, 명종이 즉위한 해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선생은 일본과 강화하고 병란에 대비할 것을 내용으로 담은 상소를 올렸다. 어린 왕이 이를 귀담아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중종의 제1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1491~1515)가 인종仁宗(1544~1545)을 낳고 사망하자 바로 이어 왕비가 된 사람이 문정왕후다. 오랫동안 아들이 없다가 오매불망寤寐不忘 드디어 아들을 하나 낳았으니 그가 명종이 된다. 명종이 12살 나이로 즉위하자 어머니가 사실상 나라를 다스렸다. 대윤大尹세력과 소윤小尹세력간의 권력투쟁에서 이른바 을사사화乙巳士禍로 문정왕후는 그의 반대세력인 대윤세력을 제거하고 왕실의 권력을 장악했다.
문정왕후의 승하와 보우대사의 순교
문정왕후는 1562년에 당시 서삼릉西三陵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선릉의 동쪽 기슭인 지금의 정릉 자리로 이장移葬하고, 거기에 있던 봉은사를 수도산 남쪽 즉 현재의 봉은사가 있는 자리로 옮기면서 대가람을 갖춘 능침사찰로 중창하였다. 조정에서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당우들을 대대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궁궐 같은 가람으로 바뀌었다. 문정왕후는 나중에 남편인 중종과 같은 묘역에 묻힐 생각으로 이런 대규모 불사佛事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정으로 인하여 현재의 서삼릉에는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를 안장한 효릉孝陵과 인종의 친모인 장경왕후를 안장한 희릉禧陵이 있다. 어쩌면 문정왕후가 남편인 중종이 장경왕후와 그의 아들 인종과 함께 같은 묘역에 있는 모양을 싫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중에 자신과 자신이 낳은 명종과 같이 있기를 원했으리라. 1563년(명종 18)에는 13살로 죽은 명종의 외아들인 순회세자順懷世子(1551~1563)의 사패祠牌를 봉안하기 위해 봉은사에 강선전降仙殿도 세웠다. 뒤따라나올 역사의 장면을 미리 보면, 봉은사 중창 불사를 시작한 지 3년 후 문정왕후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자신이 이장한 정릉 묘역에도 묻히지 못한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4월에 승하하자 퇴계선생은 바로 사직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곧이어 보우화상에 대하여 사헌부 등의 신료들과 유생들의 대대적인 공격이 가해졌고 1,000여 건에 이르는 상소 끝에 보우화상은 6월에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 후에도 보우화상을 죽이라는 유생들의 상소가 멈추지를 않았으나 왕은 10월 달에도 이미 형이 확정되었으므로 추가로 논의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상소를 윤허하지 않았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제주목사 변협邊協(1528~1590)에 의하여 몽둥이로 죽임을 당하였다. 죽이라는 왕명이 없었는데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명종실록』에는 보우의 죽음에 대하여 왕에게 보고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1566년 11월의 기록을 보면, 보우화상이 이미 제거되었다는 것만 지나가는 말로 쓰여 있다. 조계종에서는 10월에 순교하였다고 새긴 보우대사순교비를 제주도 조천읍 조천리에 세워두고 있다. 그해 12월에는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선생이 사직 상소를 올렸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젊은 날 어머니를 여의고 잠시 금강산에서 불법에 침잠한 적이 있었지만 이 당시에는 보우화상을 요망한 중[妖僧]이라며 비판을 가하였다. 문정왕후의 승하와 보우대사의 죽음 이후로 불교는 더욱 탄압되고 양종제도兩宗制度와 승과제도도 폐지되면서 침체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절 서양으로 눈을 돌려보면, 1532년에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가 『군주론君主論(The Prince)』을 펴냈고,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는 지동설地動說(heliocentric theory)을 제창하였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관념은 이제 황당한 것으로 되었다. 달에 토끼가 사는 것도 아니고, 하늘에 무엇이 있어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천인감응天人感應’이니 하는 말도 허황된 것임이 드러났다. 이제 우주를 눈으로 직접 관찰하고 확인할 일만 남았다.
이미 1492년에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대항해시대(Age of Exploration)’가 시작되고 유럽의 각 나라들은 세계 재패의 경쟁에 뛰어들어 세계의 바다에는 풍랑이 거칠게 일고 있었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데 조선에서는 보우화상을 때려죽인 이후에 벌어지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보게 된다.
의승병으로 활약한 승과 출신 승려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불과 30년도 채 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상황이 화급해지자 선조宣祖(1567~1608)는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에 주석하고 있는 서산대사에게 나라를 구할 것을 부탁하고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에 임명하였다. 서산대사가 전국에 통문을 내리자 드디어 전국의 승병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왜군과 싸우는 전쟁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의 제자인 처영處英(?~?)대사가 의승장義僧將으로 이끄는 승병은 권율權慄(1537~1599) 장군과 공동 작전을 수행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고, 전쟁 이전에는 봉은사의 주지도 사양하고 서산대사 문하에서 수행했던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1544~1610)화상도 임진왜란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분골쇄신粉骨碎身 구국의 활약을 펼친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승과로 배출된 뛰어난 인재였다. 임진왜란과 정묘재란丁卯再亂등의 전쟁에 나가서 죽은 승려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우리가 잘 아는 부휴선수浮休善修(1543~1615) 대사의 제자이자 봉은사 주지를 지내기도 했던 벽암각성碧巖覺性(1575~1660) 대사도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 등을 맡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거치는 역사의 거친 파도 속에서 승병장으로 구국의 헌신을 하였다.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조선에서는 나라가 초토화되는 이런 전쟁을 거치면서 의승군의 활약과 공로로 인하여 불교가 다시 살아남게 된다.
평소 공자와 맹자를 떠들던 사람들이 결국 나라를 망국의 위기에 떨어지게 만들어 놓고는 급하면 천민賤民 취급하던 승려들에게 목숨 걸고 나라를 구하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반발하지 않고 목숨을 내놓고 백성과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진정 붓다의 가르침인가? 걸핏하면 공자와 맹자를 입에 달고 사는 인간들이 보우화상을 유배지에서 패서 죽인 짓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우리 역사에서 사람을 몽둥이로 때려 피범벅으로 만들어 죽인 일은 사화와 당쟁의 역사를 들추어보면 너무나 많다. 야만野蠻도 이런 야만이 없으리라.
생각이 다른 곳으로 빠졌다. 법왕루로 가는 길의 오른편 석축 위에는 보우대사의 봉은탑과 비가 서 있다. 보우대사를 그렇게 죽였으니 부도가 있을 수 없다. 보우대사의 탑비를 쳐다보면서 불법이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는 역사의 여러 장면들이 먼저 떠올랐다. 헌법학자인 나로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멀지 않아 이 땅에는 천주天主를 공부를 하다가 또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옛거울古鏡’, 본래면목 그대로
유난히 더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불면석佛面石 옆 단풍나무 잎새도 어느새 불그스레 물이 들어가는 계절입니다.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포행을 마치고 들어오니 책상 위에 2024년 10월호 『고경』(통권 …
원택스님 /
-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 속에 있다네
어렸을 때는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 시절에 화장실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거든요. 무덤 옆으로 지나갈 때는 대낮이라도 무서웠습니다. 산속에 있는 무덤 옆으로야 좀체 지나…
서종택 /
-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없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二由一有 一亦莫守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
성철스님 /
-
구루 린뽀체를 따라서 삼예사원으로
공땅라모를 넘어 설역고원雪域高原 강짼으로 현재 네팔과 티베트 땅을 가르는 고개 중에 ‘공땅라모(Gongtang Lamo, 孔唐拉姆)’라는 아주 높은 고개가 있다. ‘공땅’은 지명이니 ‘공땅…
김규현 /
-
법등을 활용하여 자등을 밝힌다
1. 『대승기신론』의 네 가지 믿음 [질문]스님, 제가 얼마 전 어느 스님의 법문을 녹취한 글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이렇게 여쭙니다. 그 스님께서 법문하신 내용 중에 일심一心, 이문二…
일행스님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