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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국가권력에 맞선 실증주의 불교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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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2 년 11 월 [통권 제115호]  /     /  작성일22-11-07 09:19  /   조회2,93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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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22 |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 1913〜200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 1913〜2002)는 교과서 검정 위헌소송 재판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1965년부터 32년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1997년 일부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32년 재판은 표면적으로 국가권력의 학교교육 개입이 일본 헌법에 위배되는가에 대한 법리 싸움이었다. 하지만, 재판의 궁극적 목적은 국가권력이 역사 교과서 검정제도를 이용해 침략전쟁의 긍정론과 군국주의 시절로 회귀하고자 하는 의도를 저지하고,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데 있었다. 

 

사진 1. 1967년 자택에서 교과서 소송제기 후 도착한 응원의 편지를 들고 있는 모습. 

 

한국에서 이에나가에 대한 소개는 전쟁책임과 30년 재판에 집중되어 있어 그의 불교학적 시각을 알기가 어렵다. 이에나가 사부로는 일본 인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연구자로, 국가와 불교라는 관점에서는 하나야마 신쇼(『고경』 22년 10월호)와 학문적 결이 비슷하다. 다만 하나야마가 인도철학과 출신으로 종교철학적 시점을 취했다면, 이에나가는 국사학 시점에서 일본불교를 바라봤다.

 

논포리와 종교 심취 

 

이에나가는 1913년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제일고등학교 재학 시절 마르크스주의와 종교서적에 심취했고, 군국 일본의 ‘국체國體’ 이데올로기에 사상적 충격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1937년 동경제국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동경제대 사료편찬소 촉탁(1937), 니가타新潟고등학교 전임강사(1941), 제국학사원 촉탁(1943)를 거쳐 도쿄고등사범학교 교수(1944)로 근무했다. 

 

사진 2. 1997년 최고판결 후 기자회견 모습. 앞줄 왼쪽 2번째가 이에나가 사부로. 

 

그는 대학재학 시절 국사학과 학생 태반이 가입한 국가주의자들의 모임인 주광회朱光會나 유물사관에 경도된 사회경제 편중파 그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나가는 당시 자신의 모습을 “군국주의에 영합하거나 편승하지 않았지만, 침략전쟁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 정치적 무정견자인 ‘논포리Nonpolitical’였다.”고 회고했다. 

 

“8월 15일, 전쟁이 끝났음을 확인하고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어리석은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구나!’라는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한 번도 전쟁으로 죽은 사람의 모습을 보지 못했고, 일본군의 침략지에서 얼마나 많은 이웃나라 국민들이 비참한 운명에 빠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쟁 중에 시류에 편승·영합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생생한 현실사회에 등을 돌리고 오로지 지상의 세계를 넘어서 절대적 세계에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쟁의 본질을 올바르게 통찰하고 있었던 까닭이 아니라 방관자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우연한 결과에 불과했다. 오늘날의 말로 ‘논포리’로 전쟁을 겪었기에 침략전쟁을 인식할 능력은 없었다.” - 회고록 『전쟁책임』(1985) 중에서 

 

사진 3. 『전쟁책임』(1985)

  

이에나가가 논포리 입장과 함께 종교에 심취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탓에 인간의 유한성을 자주 통감했다. 전문 학문을 선택할 즈음, 나의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더욱 깊어졌다. 강하게 마음을 끌었던 것은 이겨내기 어려운 인간의 유한성과 죄업에 대한 고뇌의 소리였다.”고 언급했다. 불교학에 입문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고대나 중세사상으로 돌아가 그 사상의 샘에서 나의 정신세계의 뿌리를 다시 살펴보려 했다.”고 불교 연구에 들어선 계기를 밝혔다. 

 

부정의 논리

 

이에나가가 일본불교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부분은 쇼토쿠태자聖徳太子였다. 이에나가는 대표적 쇼토쿠태자 연구자인 하나야마 신쇼와 공동연구를 할 기회도 얻었지만, 그 결과물은 하나야마와 달랐다. 하나야마가 쇼토쿠태자 연구를 통해 일본불교의 본질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면, 이에나가는 부정否定의 논리였다. 

사진 4. 『일본사상사에서부정의 논리 발달』(1935). 

 

이에나가가 주장한 부정의 논리를 요약하면, 부정의 논리란 일본에 한정되지 않고 인류 전체가 추구하는 진실이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인간 그 자체가 이상적인 것을 품은 존재였다. 하지만, 서양사회가 크리스트교를 접하면서부터 현실부정의 사고가 유포되었고 절대적 타자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서양사회의 부정의 논리는 일본불교에도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이에나가는 일본의 경우, “쇼토쿠태자에 의해 처음 ‘진眞’의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언급하면서 부정의 논리와 일본불교의 본질을 연결시켰다. 나아가 고대 그리스 사상에는 현실 긍정의 태도가 존재하고, 일본에도 긍정적 인생관이 고대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쇼도쿠태자가 현실의 내재적 개혁과 도덕적 노력을 통해 국가 생활을 향상시키려는 시도는 텐지천황天智天皇에 의해 계승되었다. 다이카개신大化改新, 율령제정 등은 중앙집권국가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국가적 전진을 크게 지지하기 위해, 사상계의 경향 역시 태고 이래 현실 긍정의 태도를 강화한 것은 당연하다.”

- 『일본사상사에서 부정의 논리 발달』(1935) 

 

사진 5. 『이에나가 사부로 전집』(1997). 

 

이에나가는 쇼토쿠태자 시대에는 부정의 논리가 사회 전반에 침투하지 못하고, 이를 압도하는 강한 현실 긍정의 사고가 우세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서 그는 부정의 논리의 진의를 다시 파악하기 위해 가마쿠라 불교의 탄생에 대입시켰다.

 

“가마쿠라 불교의 탄생은 삶의 부정적 측면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성립되었다. 신종교의 조사들은 삶의 심각한 부정적 측면을 파악했고, 인간이 범한 죄업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들은 이것을 교의적 측면에서 이론을 제시하고, 시대의 경험과 자신의 생활을 통한 체험적 신앙으로 고취시켰다. 이를 기반으로 경이로운 사상체계를 쌓아올렸다.”

- 『일본사상사에서 부정의 논리 발달』(1935)

 

이에나가는 불교가 일본에 유입된 이후 부정의 논리라는 새로운 국민사상의 시각이 열렸고, 이는 시대적 기본 사조로 성장했다고 보았다. 특히, 가마쿠라 신불교를 강조함에 있어 신란親鸞을 상징적 존재로 위치시켰다. 그는 쇼토쿠 태자에서 시작한 부정의 논리가 신란에 이르러 보다 우수한 형태로 완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나가가 신란의 불교를 높이 평가한 데에는 신란이 ‘부정의 논리’를 가장 분명하게 표출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신란은 인간이 가지는 죄의식은 자력이 아닌 타력에 의해, 혹은 고난과 수행을 통한 믿음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에나가는 이러한 신란의 사상이 일본과 서구사회가 함께 공유하는 보편적 진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나가의 부정의 논리는 일본이 긍정하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 신도神道와 같은 국가주의 상징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유교는 현세지향이라는 피상의 차원에 갇혀 있는 사상으로 평가절하했다. 심지어 국체國體와 천황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나가의 사상의 근저에는 불교와 독일의 관념론, 마르크스주의, 기독교 등 여러 흐름이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서 신란의 불교가 가장 뚜렷하다. 

 

사진 6. 1967년 도쿄교육대학 일본사학 전공 입학식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2번째가 이에나가 사부로. 

이에나가가 일본불교의 계보를 ‘쇼토쿠태자→가마쿠라 불교’로 바라보는 시각은 하나야마 신쇼와 동일하다. 가마쿠라 불교를 일본불교의 최정점에 올려놓은 점 역시 두 사람의 공통된 시각이다. 하지만 이에나가가 일본불교의 본질을 부정의 논리를 통한 ‘보편성’으로 봤다면, 하나야마는 ‘고유성’으로 바라본 점은 이들의 상이점이라 할 수 있다.

 

이에나가가 펼친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적 진리는 동서양의 많은 연구자가 높게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한 발 나아가 세부적으로 들여다봤을 때, 이에나가는 일본 이외의 다른 불교 수용국가들이 보편적 진리를 어떻게 수용했는가에 대한 논제를 제시하지 못했다. 앞에서 그가 자신의 논문에서 모든 것을 부정했다고 언급한 것처럼, 그는 중국의 문화를 부정의 논리로 전개하려는 능력마저 부정했다. 결국, 불교를 통한 보편적 진리에 접근하고 수용한 이들은 아시아에서 일본뿐이라는 암묵적 용인과 ‘특수주의’라는 한계성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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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현재 아시아 종교문화 교류에 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ikemire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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