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경주 낭산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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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2 년 10 월 [통권 제114호] / / 작성일22-10-05 14:01 / 조회3,780회 / 댓글0건본문
지난 7월에 ‘낭산, 도리천忉利天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에서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남산’이라는 단어는 남산 전체가 바위마다 마애불과 보살님들이 모셔져 있고 곳곳마다 부처님상과 탑들이 세워져 있는 신라 불교의 신앙심과 예술품의 보고로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낭산은 문외한으로 처음 듣는 산 이름이라 무척 당황하였습니다. 거기에다 ‘도리천’은 불교 신자라면 누구나 이생을 떠나면 마야부인이 계신다는 그 행복한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도리천이 경주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라고 반신반의하며 이번 특별전은 꼭 다녀와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힌남노’ 태풍이 우리나라로 올라온다고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1. 금제아미타여래좌상.
더구나 힌남노의 위력은 다른 곳들은 순하게 넘어갔는데 포항과 경주지역은 피해를 크게 입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때를 놓칠 수 없다’ 하고 일봉스님과 일거스님을 대동하고 9월 7일 13시쯤에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에 도착하였습니다. 특별전시관에서 한 시간 넘게 둘러보고 있는데, 1942년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 일체가 발견된 지 80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되고 있었습니다. 사리장엄구는 스님들에게는 늘 감동을 주는 불구인지라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사진 2. 사리장엄구.
특히 국보 제79호인 금제아미타여래좌상은 비록 높이 12.2㎝에 불과했지만 온화하고 중후한 부처님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다가와 감동이 매우 컸습니다. 사리함 금동 외함 명문에 ‘순금제아미타상은 서기 706년에 모셔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2~737) 5년에 건립된 탑입니다.
상좌들과 의논하여 선덕여왕릉을 시작으로 이튿날까지 주변의 왕릉들을 답사하기로 하였습니다. 선덕여왕릉은 박물관 바로 옆에 있는 듯 생각했으나 승용차를 타고 10여 분 남짓 가서야 주차장에 도착하였습니다. 길을 가다 보니 태풍으로 개울물이 넘쳐 시자 일거스님 등에 업혀 10여 미터의 물길을 건너야 했습니다.
선덕여왕릉을 지키는 충성스러운 소나무들
덕만공주는 632년(진평왕 54년) 정월에 아버지 진평왕이 붕어하시자 그 뒤를 이어 선덕여왕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634년 분황사, 635년 영묘사 등을 완공하였습니다. 643년 3월 당나라에서 8년 만에 돌아온 자장율사는 선덕여왕에게 당 유학 도중에 신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주청했습니다.
“신라의 왕은 여인인 까닭에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어 이웃나라가 침략을 꾀하는 것이니 9층탑을 세워야 나라가 평온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선덕여왕님께 9층탑을 건립하실 것을 청하는 바입니다.”
사진 3. 선덕여왕릉에서 시자 일봉스님(오른쪽)과 일거스님과 함께. 사진 하지권.
이에 선덕여왕은 김용춘에게 황룡사 구층탑의 건립을 명령하였습니다. 신라 주변 9개국의 침략을 막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9층탑으로 건립하였습니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황룡사에 9층탑이 세워지니 진흥왕의 장육존상과 진평왕의 천사옥대와 더불어 신라의 호국 삼보라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선덕여왕릉의 봉분 높이는 6.8m, 직경은 23.4m이며, 봉분 자락에는 괴석으로 2~3단 높이로 약 70cm 정도로 쌓은 호석들이 노출되어 있는데, 이 호석은 신라 당대의 것이 아니라 1949년에 그렇게 보수한 것이라 합니다. 소납의 눈에는 봉토분으로 자연스럽게 끝자락에 잔디가 입혀져 있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웠겠다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념에 젖어 있다가 고개를 들어 능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들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능에서 10~15m 간격을 두고 360도의 공간을 수령이 100년은 넘은 듯한 소나무들이 능을 향해 읍揖을 하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해인사에 있는 소나무들은 그저 하늘로 쭉쭉 뻗어 올라갔으면 갔지 선덕여왕릉 주변의 소나무들처럼 허리를 굽히고 있는 듯한 소나무는 한 그루도 없습니다. 왕릉을 지키는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능을 향해 합장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충성스럽고 충성스럽게 보여 한없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오래 재위한 진평왕의 릉
다음 행선지로는 신라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의 왕릉을 찾아갔습니다. 진평왕은 열세 살에 왕위에 올라 54년을 재임하여 신라 천년 역사 동안 가장 오래 왕노릇을 하셨습니다. 진흥왕으로부터 시작한 신라의 국운이 바야흐로 꽃 피운 것은 진평왕에 이르러서입니다.
그의 뒤를 이어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이 왕위에 오르나 그가 키운 여러 인재들이 두 여왕의 시대를 잘 보필했고, 끝내 김춘추라는 불세출의 명군으로 이어져 삼한 통일의 위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576년(진흥왕 37년)에 진흥왕이 붕어한 후에 숙부인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4년 만에 죽은 뒤에 진지왕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인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니 13살의 어린 나이로 할머니인 사도부인의 수렴청정으로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신라는 진흥왕 때 함경도와 한강 유역으로 영토를 크게 넓혀 확장하였으나 진평왕 때에 이르러서는 이를 되찾으려는 백제와 고구려와 자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일승일패하거나 마침내는 대승하거나 하면서 국방체계를 굳건히 정비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수나라(581~618), 당나라(688~907)와 외교관계를 강화하여 고립을 피해 갔고, 외교관계는 갈수록 긴밀해져 갔습니다.
진평왕 때 신라는 불법佛法을 배우러 중국에 다녀온 유학승들이 늘어났고, 이들의 활동으로 불교가 더욱 융성해졌습니다. 진평왕은 지명스님을 대덕으로 삼고, 원광스님께 중요한 외교문서의 작성을 맡기며 중용하였습니다. 『삼국유사』에는 “584년(진평왕 6년)에 황룡사의 금당金堂이 완성되었다.”라고 하며, 또 “진평왕이 왕위에 오른 첫해였다. 하늘의 사신이 궁전 뜰에 내려와 진평왕에게 ‘상왕께서 옥대를 내려라 하였다’고 전하니, 왕이 몸소 무릎을 꿇고 옥대를 받자 그 사신은 하늘로 올라갔다.”라고 합니다. 진평왕은 교외나 종묘의 큰 제사 때마다 모두 이 옥대를 차고 참가하였다고 합니다.
사진 5, 신문왕릉. 사진 하지권.
진평왕은 632년(진평왕 54년) 정월에 붕어하였으며 한지漢只에 매장하였습니다. 진평왕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맏딸인 덕만德曼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바로 신라 최초의 여왕인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딸인 천명부인은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김용춘과 결혼해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을 낳았습니다. 진평왕릉의 봉분은 높이가 8.4m, 직경이 40m이며 원형봉토분입니다.
감은사를 창건한 신문왕의 릉
진평왕릉에서 멀지 않은 낭산의 남쪽 사천왕사터와 망덕사터 동쪽 구릉의 평탄한 대지 위에는 신문왕릉이 있는데, 선덕여왕릉에서도 그리 멀지 않는 곳입니다. 신문왕은 665년(문무왕 5년) 태자로 봉해졌으며, 681년(문무왕 21년) 가을에 아버지 문무왕이 붕어한 뒤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국사에 전념하여 성과를 올리고 나라를 태평하게 유지하였습니다. 신문왕 때는 685년(신문왕 5년) 봉성사와 망덕사를 창선하는 등 불교도 성행했으며, 당나라와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유교 정치이념의 보급도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682년(신문왕 2년) 아버지인 문무왕을 기리는 감은사感恩寺를 완성하였습니다. 신문왕은 692년(신문왕 12년) 음력 7월에 세상을 떠났으며 낭산 동쪽에 왕릉을 세웠습니다. 후임으로 제32대 효소왕(재위 692~702)이 6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습니다. 한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문왕이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문왕릉은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높이는 7.5m, 봉분 직경은 29.4m입니다. 봉분 자락에는 벽돌처럼 잘 다듬은 치석置石을 이용하여 지대석 위에 수직으로 5단을 쌓은 후 그 위에 개석蓋石인 갑석을 올렸습니다. 호석 받침석도 정밀하게 가공한 받침석을 사용하였는데 사다리꼴로 다듬은 삼각형의 받침돌 44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호석에 기대어 놓았습니다. 정남쪽에 배치된 받침석 정면 윗부분에 ‘문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이 현실로 들어가는 연도 입구로 추정되며, 따라서 매장 시설은 석실묘로 추정됩니다.
66년 만에 다시 찾은 무열왕릉
다음날은 김유신릉, 무열왕릉과 대릉원의 천마총을 탐방하고, 점심을 먹고는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감은사지와 문무왕 수중릉을 참배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침녘에 무열왕릉을 먼저 방문을 하였습니다. 소납의 최초 무열왕릉 참배는 초등학교 6학년인 13살 때 처음 와서 보았으니 지금으로부터 66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주변의 나무들이 잘 가꾸어지지도 않았고 잘 다듬어진 돌길도 아니었고 흙먼지만 풀풀 날리는 황톳길이었던 기억입니다.
신라로 하여금 삼한 일통의 한길로 매진하게 한 그 위업은 무슨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거북의 돌머리가 그때와 다름없이 반겨주는 듯하였습니다. 무열왕은 603년 출생하여 신라의 태종무열왕으로 654년 왕으로 오르고 661년에 붕어하니 재위 8년에 나이는 59세였습니다.
이어서 김유신 대장군릉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전의 왕릉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능묘 하단 부위에 12지신상으로 능 둘레를 장엄해 놓은 능은 김유신릉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어서 눈을 휘둥그레 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유신 태대각간은 673년 신라의 제30대 문무왕 13년에 79세의 나이로 삼한 통일의 원을 이루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라의 제33대 성덕왕(재위 702~739년)은 712년(성덕왕 11년)에 김유신의 아내인 지소를 ‘부인夫人’으로 봉했으며 해마다 1천 석의 곡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42대 흥덕왕興德王(재위 826~836)은 835년(흥덕왕 10년)에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존했습니다. 십이지신상으로 조성된 시기는 김유신묘 축조 이후인 혜공왕(재위 765~780년)대의 8세기 후반기경으로 보는 견해
가 유력합니다. 그러나 십이지신상은 왕릉에만 있을 수 있다는 가설 아래 김유신이 서거한 후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시기이고 흥덕왕대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참배
10여 년 전에 감은사지에 도착하여 황량한 들녘에 서 있는 우뚝한 두 석탑을 마주한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단순한 모양의 삼층석탑이지만 신라나 백제의 어느 유적에서도 본 적 없는 장중한 무게감으로 다가오는 그 감은사지 석탑의 감동을 다시 기대하며 감은사지에 도착했습니다. 주변의 경관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잘 정돈되고 탐방길도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옛날 그때의 감동을 살릴 수가 없어서 참 아쉬웠습니다. 마침 문화해설사 보살님의 설명이 있어 알지 못했던 부분들을 들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소납은 각 층마다의 돌들이 층층이 통돌로 만들어진 줄 알았는데, 1층과 2층은 속이 텅 빈 4면 평석으로 이루어져 속이 비어 있고, 3층만 통돌로 이루어져서 동탑과 서탑 모두 3층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탑에서 나온 사리 내함의 사진을 보여 주는데, 소납은 너무나 놀라고 말았습니다. 옛날 국립박물관에서 본 서탑의 사리 내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문무왕의 수중릉이 내려다보이는 이견대를 찾아가니 마침 수리 중이어서 근처에 서서 멀리서나마 “바다의 왕이 되신 문무왕이시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하루속히 남북 자유왕래를 이루어 통일의 터전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원을 올렸습니다.
신라 679년인 문무왕 19년에 선덕여왕릉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명랑대사의 주술력으로 당나라 수군을 두 번이나 물리쳐 당나라 군사를 쫓아내는 데 성공하여 신라통일의 길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때 당나라 군대의 침략 소식을 전한 사람은 의상대사였습니다. 의상대사는 문무왕 16년(677년) 2월에 왕명으로 부석사를 창건하였고, 그 뒤 부석사는 화엄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습니다.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세운 것은 선덕여왕이 붕어한 646년으로부터 33년 뒤의 일입니다. 당시 신라 사람들은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33천 도리천忉利天이 있다는 불경의 내용이 실현되었다.”라고 하며 선덕여왕의 예지력에 탄복하였다고 합니다.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가을 들녘에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날에 두 상좌와 함께 ‘낭산, 도리천 가는 길’을 답사하며 신라가 삼한을 통일하게 된 사연을 다시금 상념해 보며, 힌남노 태풍으로 수해를 입은 모든 분들에게 위로를 드리며, 경주와 포항 지역의 주민들이 하루빨리 안정을 찾고 피해 복구도 조속히 이루어지길 기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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