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만덕사지』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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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 2022 년 10 월 [통권 제114호] / / 작성일22-10-05 09:57 / 조회2,976회 / 댓글0건본문
근대불교사서史書 22 |만덕사지萬德寺誌 ④
『만덕사지』는 다산과 아암의 제자들이 만덕사와 관련된 고려와 조선의 만덕사를 비롯한 불교사 자료를 수집하여 고증을 거쳐 찬술하였다. 『만덕사지』의 핵심이기도 한 고려와 조선을 살다간 만덕사의 대표적 인물들의 행적, 수행, 사상을 기록하였다. 핵심내용이 수록된 권2와 권4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우선 찬자들은 각자 편집과 교정 등의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전권全卷의 찬술에 참여한 것이나 다름없다.
원묘국사와 보조국사에 대한 고증
a. 자굉안慈宏案 옛부터 이 비碑는 왜란에 파괴되었고, 오직 석부만 깨어지지 않아 현재 남아 있다. 조종저趙宗著가 지은 신비新碑는 구부舊趺에 세웠다고 한다.
b. 이청안李淸案 최자의 비명은 『동문선』에 실렸다. -아깝다. 조종저 비는 새로 세우면서 최자崔滋의 비는 다시금 세우지 못한 일이 - 가경 계유년 겨울(1813)에 내가 경성에 가서 『동문선』에 실려 있는 최자의 비문을 베껴다 백련사에 보냈다. 이 뒤로 부터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고 한다.
c. 응언안應彦案 신번新繁은 현재의 남평현에 속하고, 조계는 현재의 송광사이며, 강남은 고려 때 지금의 전라도를 두 개의 도로 나누었는데 담양의 남쪽을 강남도라고 한다고 하다. - 『만덕사지』 권1
인용문은 고려 때 최자崔滋가 지은 원묘국사圓妙國師의 비명碑銘에 대한 찬자들의 견해이다. 이들은 최자의 비문을 수록하고 이에 대한 분석 작업을 시도하였다. 먼저 자굉慈宏이 찬술 당시까지 비문의 상태를 거론하였다면, 이청은 경성京城에 가서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는 비문을 수집하여 백련사에 보냈음을 언급하였다. 그는 이때 “천인天因과 정오丁午의 실적實跡을 찾아서 돌아오기도 하였다. 아울러 응언은 비문에 보이는 원묘요세圓妙了世의 출생지에 대해 세부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세 사람의 비문에 대한 언급으로 보아 사지 찬술에 각자의 역할이 있었지만, 사실史實에 대한 면밀한 고증작업은 찬자 모두가 전권에 걸쳐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표는 찬술자들이 사지寺誌를 찬술하는 과정에서 활용한 자료를 고증하여 그 진위나 보충설명을 한 흔적들이다. 이 가운데는 태삼·한영·지일·설옥 등 찬자가 아닌 승려들의 ‘안案’도 엿볼 수 있다. 찬자들이 사지의 자료와 내용에 가장 많은 견해를 언급한 부분은 권2로 총 30회의 안案과 운云의 사례를 보였다. 권2는 고려시대 원묘요세를 시작으로 한 백련결사의 대표적인 승려들의 생애와 업적을 찬술한 부분이다. 그러나 찬자들이 살았던 동시대가 아니었고, 자료 수집 역시 충분치 못했으므로 그 고증과 찬술 작업 역시 쉬운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명확한 해석과 내용의 재구성을 위해 다른 권수에 비해 많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다산운茶山云 만덕萬德에 무외無畏가 둘이 있다. 그 하나는 법명을 정오丁午라 하고, 그 하나는 법명을 혼기混其라 한다. 정오는 원묘의 3~4번째로 전했고, 혼기는 원묘의 11세이다. 모두가 당시에 법호를 ‘혹칭보조或稱普照’, ‘혹칭정혜或稱靜慧’, ‘혹칭진감或稱眞鑑’, ‘혹칭무외或稱無畏’라 한다. 시험 삼아 승보僧譜를 보니 이러한 유형이 매우 많으니 무외無畏가 두 명인 것은 의심할 것이 못된다. - 『만덕사지』 권2
다산 정약용은 인용문에서 무외가 두 명임을 전제하고 무외정오無畏丁午가 무외임을 주장하였다. 다산의 이러한 노력은 권2의 여러 곳을 통해 볼 수 있다. 『만덕사지』는 이밖에도 제3 원환圓睆을 삼장의선三藏義璇으로 규정하여 찬자 자홍은 “의선義璇은 반드시 원환圓睆의 표덕表德이지 두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여 원환이 의선임을 강조하였다.
다산은 진정국사 천책이 지은 『호산록湖山錄』에 정오가 쓴 발문 끝에 명기된 “불일보조정혜묘원진감대선사정오발佛日普照靜慧妙圓眞鑑大禪師丁午跋”을 사례로 들어 당시 승려들의 법호와 법명이 혼란의 여지가 많음을 전제하고 무외가 원묘를 3~4번째로 이은 정오임을 강조하였다. 다산은 박전지朴全之가 쓴 「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 『고려사高麗史』, 그
리고 『동문선』에 수록된 정오의 시문詩文을 기초로 인용한 기록에 명시된 무외국사가 정오임을 명시明示하고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정오丁午는 진감국사眞鑑國師이며, 정오는 법호法號인데 무외無畏라는 두 자의 법호가 더 있다. 그러나 무외로 행세行世하였으므로 『동문선東文選』에는 무외無畏는 있으나 정오는 없다. 『고려사』에 실린 박전지朴全之가 지은 「용암사기龍巖寺記」에도 털끝만큼의 차이가 없으니 정오가 무외임이 확실하다. - 『만덕사지』 권2
이밖에 찬자들은 “말류가 노무鹵莽하자 바로 무염국사를 조祖에 추대推戴하니 그 오류를 쉽게 가릴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다산은 “무염국사無染國師의 평생에 행동거지인 일동一動 일정一靜이 백월탑白月塔에 자세히 적혀 있는데, 강진의 만덕萬德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만덕사와는 전연 인연이 없는 무염국사를 이전의 기록에서 만덕사의 선조로 인식한 것을 비판하였다.
아울러 “만덕사의 동쪽 기슭에 보조탑普照塔이 고래古來로 목우자牧牛子의 사리舍利를 감춘 곳이라고 하고 목우자를 만덕의 선조로 삼았다.”는 지적에(『만덕사지』 권2) 대해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생애와 흔적을 기초로 비판하고 “동강東岡에 있는 보조탑은 본사本寺의 정오국사丁午國師인데 그도 호號를 불일보조라 하였으니 이것은 정오의 장주藏珠이다.”라고 하였다.
찬자들의 성과와 오류
이와 같이 『만덕사지』는 수집한 자료를 기초로 그 진위를 바로잡고, 소략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견해를 합리적으로 피력하였다. 흩어져 전해 오고 있는 단편적인 기록을 고증작업을 거쳐 만덕사의 역사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불교사까지도 재구성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만덕사지』 찬술자들이 기울인 노력은 만덕사의 복원에 머물지 않았다. 직접적으로는 잘못된 만덕사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잡는 것이었지만, 동시대 유학자들이 허무맹랑하고 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고 비난했던 불교사를 바로잡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한편 찬자들이 찬술의 과정에서 보인 오류도 발견된다. 예컨대 자굉은 제3 원환에 대해 의선義璇으로 이해하였지만, 의선은 조인규趙仁規의 넷째 아들로 그 활동 시기가 원환이 백련사 제3세 주법主法을 맡았던 1248년과는 시기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다. 또한 찬자들은 원환을 만덕사의 8국사國師의 한 사람으로 지칭하고 있지만, 국사國師의 칭호는 『만덕사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찬자들이 제시한 원환에 대한 자료 역시 그가 국사임을 입증하기에는 미흡하다.
더욱이 찬자들이 설정한 8국사가 국사를 역임한 인물들을 기준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밖에도 찬자들은 제7 진감무외국사眞鑑無畏國師와 제8 목암무외국사牧菴無畏國師가 모두 ‘무외無畏’로 표기되어 있어 그 진위를 밝히고 있다. 다산은 제7 무외국사인 정오는 원묘의 3~4번째로 전했고, 제8 무외국사인 혼기는 원묘의 11세라고 하였으며, 무외가 두 명인 것은 의심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1313년 6월 충숙왕이 즉위한 지 몇 달 후인 11월에 부왕의 명을 계승하여 무외국통無畏國統으로 책봉한 인물이 『만덕사지』에서 언급한 제7 진감무외국사인 정오丁午이다. 반면 제8 목암무외국사인 혼기混其는 조인규趙仁規 가문의 출신인데, 대선사大禪師로서 사호賜號만 받았을 뿐 국사나 국통에 책봉된 적이 없는 인물이다.
아울러 다산이 무외가 두 명이라고 주장한 것은 “무외국사無畏國師는 휘諱가 혼기混其, 자字가 진구珍丘, 호號가 목암牧菴”이라는 『불조원류』의 내용 역시 철저한 고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수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불조원류』는 혼기가 조덕유趙德裕의 백부伯父 즉 조인규의 장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곡이 찬한 「조정숙공사당기趙貞肅公祠堂記」 뿐만 아니라 「조인
규사당기趙仁規祠堂記」에도 고려시대의 묘지墓誌나 사당기祠堂記에도 형제간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불조원류』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 이밖에 찬자 응언應彦은 요세의 출생지 신번현新繁縣이 현재의 합천군인데, 전라도 남평현에 속하고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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