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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무상정각의 발심과 수행과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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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2 년 8 월 [통권 제112호]  /     /  작성일22-08-05 11:13  /   조회4,20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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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불교에 입문하게 된 것일까? 각각의 불자들에게는 불교를 접하게 된 어떤 환경적 요인이 있었을 것이고, 불교의 면면에 익숙해지는 단계가 있었을 것이며, 불교의 본래 목적을 자기화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불교를 접하게 된 일을 표층적 입문이라고 한다면, 불교의 본래 목적을 자기화하는 일을 심층적 입문이라 부를 수 있겠다. 물론 심층적 입문이 진짜다. 

 

불교의 본래 목적은 부처님처럼 사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자기화해야 할 불교의 본래 목적이란 무엇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사는 일이다. 부처님처럼 아낌없이 내려놓고, 부처님처럼 바르게 수행하여, 부처님처럼 밝게 눈뜨고, 부처님처럼 널리 제도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자기 해탈과 중생 구제의 목표를 성취하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이 도달한 궁극의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소원을 세우는 일을 발심이라고 한다. 이때 발심의 내용이 되는 궁극의 깨달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부른다. 위없고(아뇩다라), 올바르고(삼), 평등하며(먁) 바른(삼), 깨달음(보리)이라는 뜻이다. 한문으로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 번역한다. 이것을 성철스님처럼 무상정각無上正覺이라고 줄여서 표현하는 경우도 있고, 조계종 표준 『한글 반야심경』과 같이 최상의 깨달음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 무상정각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대체로 불교의 궁극적 성취를 표상하는 성스러운 어휘들은 과정과 결과의 두 측면에 모두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깨달음을 실천해야 한다는 식의 동어반복적 표현이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같은 경우로 열반이나 무심의 예를 들어볼 수 있을 듯하다. 열반은 수행이 완성되어 모든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열반에 도달하려면 번뇌의 불길을 불어서 끄는 열반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 한편 무심은 일체의 분별이 멈추어 고요한 정지와 맑은 비춤이 현전하는 상태를 말한다. 수행자는 분별을 멈추는 무심無心의 실천을 통해 자거나 깨어 있거나 간에 항일한 무심에 도달하는 길을 걷는다.

 

무상정각 역시 마찬가지다. 머무는 바가 없을 때 위없는 자리[無上]에 도달한다. 그러니까 머무는 바 없는 위없음을 실천함으로써 위없음을 완성하는 것이 무상정등각이다. 올바름[正]은 중도를 실천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팔정도의 바름을 실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바름을 실천하여 바름을 완성하는 것이 무상정각의 길이다. 마지막으로 깨달음[覺]은 자아와 대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실상을 바로 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무상정각의 성취는 무상정각을 성취하겠다는 발심에서 시작하여 무상정각을 실천하는 과정을 거쳐 무상정각의 완성에 이르는 길을 걷는다. 이 표현에는 동어반복적 논리가 이중삼중으로 중첩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불이중도를 내용으로 하는 불교실천론에 흔히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사진 1. 『금강경金剛經』 제9 「일상무상분」 중에서

 

여기에서 지금 당장 무상정각을 실천하겠다는 자세는 무상정각으로 완성되는 깨달음의 길에서 극히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자세는 깨달음이 저 먼 곳에 존재하는 특별한 무엇이라는 변견을 내려놓게 한다. 특별한 무엇, 혹은 궁극의 무엇을 설정하는 일은 불교의 길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특별한 무엇을 설정하면 그 꼬리를 물고 실체가 있다는 생각이 일어나게 되고, 다시 그에 대한 지향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지향은 집착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강경』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일체의 모양과 관념을 내려놓는 실천이 있어야 무상정각의 성취가 가능해진다. 무상정각이라는 궁극의 깨달음조차도 실체가 없는 공空임을 알아 그에 대한 집착까지 마저 내려놓는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상정각을 성취해야 계율의 실천이 가능하다

 

성철스님은 과정과 결과를 통일적 관계로 보는 이러한 원융한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모든 질문을 지금의 과정적 실천이 궁극의 완성도를 갖추었는지를 묻는 일에 집중한다. 계정혜에 대한 설법이 그렇다. 우리는 보통 무상정각의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 계정혜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첫 항목은 계율의 실천이다. 기본적으로 계율은 우리의 습관화된 행위[身]와 언설[口]과 생각[意]에 대한 의식적 통제를 내용으로 한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무상정각을 성취해야 진정한 계율의 실천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무상정각의 성취로 백 가지 천 가지의 모든 행위와 언설과 생각이 저절로 청정하게 될 때 진정한 계율의 실천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존재가 계율 그 자체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것을 법신을 구성하는 계율의 성분[戒蘊]이라고 부른다. 무상정각을 성취하면 중생적 존재를 구성하는 5온의 요소가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의 다섯 성분으로 바뀌는데 그 첫 번째가 계율의 성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계율 그 자체, 진리 그 자체가 되면 공자가 언명한 것처럼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놓아두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된다[從心所欲不踰矩].”

 

사진 2. 공자孔子. 

 

그러니까 진정한 계율의 실천은 무상정각을 성취하여 법신을 전면화한 이후라야 가능한 일이 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려면 바른 실천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이것을 뒤집어 말한다. “진정한 실천을 하려면 바른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실천이 100%의 순도에 도달하여 과정이 곧 결과가 될 때라야 진짜 실천이라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철스님이 이러한 주장을 거듭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수행자들이 수행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시적 체험과 성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부심의 근거로 삼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계정혜의 실천을 내용으로 하는 수행에 있어서 우리는 작은 성취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기회를 빌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띄우고자 하는 중생 살림의 못된 버릇을 수행에도 적용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자. 원래 계율이란 수행상의 장애를 차단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계금취견이 그것이다. 계율을 지켜 특별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소처럼 행동하고, 소의 습관을 내재화하고, 소처럼 생각하는 계율을 닦는 외도들이 있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머리에는 뿔을 달고, 엉덩이에 꼬리를 달고 다녔으며, 소들과 함께 풀을 뜯어 먹었다. 이를 통해 소처럼 번뇌 없는 평화로운 생을 살아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사람이 스스로 특별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한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또 그 정도는 아니지만 육식을 금하는 계율을 절대화하는 일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육식을 하는 자신은 옳고 그것에 철저하지 못한 타인은 문제가 있다는 식의 생각에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육식 금지의 계율은 부처님의 계율이라기보다는 중국불교의 창안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그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계율에 집착하면서 그것의 실천을 이유로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는 일이다.

 

이처럼 계율을 지킨다는 것이 자칫하면 분별과 집착을 내려놓고 중도를 실천한다는 불교의 대원칙을 뒤흔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지키기도 하고, 깨기도 하고, 열어주기도 하고, 닫아 걸기도 하는[持犯開遮] 탄력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바른 계율의 수지가 가능하려면 그것이 깨달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청정한 계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철스님의 주장이다.

 

삼학의 나머지 두 항목인 선정과 지혜의 실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무상정등각이 아니면 제대로 된 참선, 즉 바른 선정과 바른 지혜의 닦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해탈, 해탈지견이라는 법신의 나머지 성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무상정등각이라야 진정한 해탈, 해탈지견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철선에서 발심과 수행과 깨달음은 상호검증의 관계에 있다. 나아가 그것은 도착점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순환구조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발심→수행→깨달음’의 순행적 인과관계가 성립함은 물론 다시 깨달음에 의해 그 발심과 수행의 진실성이 검증되는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깨달음→새로운 발심→새로운 수행→새로운 깨달음 … → 영원한 깨달음’의 순환적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이 과정에서 매 순간 기왕의 성취를 내려놓고 새롭게 발심하고 새롭게 수행하는 일이 일어난다. 앞의 성취를 내려놓는다는 점에서 이 수행은 계승과 발전이 아니라 단절과 초월의 방식을 취하게 된다.

 

어제의 오류와 오늘의 옳음

 

일찍이 도연명은 「돌아감의 노래[歸去來辭]」에서 “오늘이 옳고 어제가 틀렸음을 깨달았다[覺今是而昨非]”고 고백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수행, 혹은 깨달음이란 매일마다 어제의 오류를 깨달아 오늘의 옳음에 도달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수행이 익어가고 전에 없던 경계를 체험할 때 수행자는 정직한 성찰과 자기 검증을 행해야 한다. “나는 지금 불성을 보고 있는가? 보고 있다면 그것이 한결같은가?” 이에 대해 견성이 곧 무상정각이라는 입장이라면 ‘그렇다!’ 혹은 ‘아니다!’의 두 가지 대답만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면 거의 대부분의 수행자는 ‘나는 아니다!’라는 대답을 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차원의 발심과 새로운 차원의 수행이 일어나야 하는 지점이다.

 

사진 3. 도연명陶淵明.

 

무상정각을 기약한 수행은 다이아몬드로 가득 채워진 보물창고를 찾는 보물찾기의 여정에 비유할 수 있다. 현재의 자리가 천신만고를 겪은 끝에 겨우 도달한 귀한 자리라 해도 그것이 청동의 창고라면, 혹은 그것이 백은의 창고라면, 나아가 그것이 황금의 창고라면, 우리는 그것을 아낌없이 내려놓고 새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일체의 관념과 생각에 머물 틈이 없이 오로지 모를 뿐인 상태로 밀고 나가도록 추동하는 화두참구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성철선은 어제의 체험을 말끔히 내려놓고 오로지 오늘의 현재진행형 깨달음을 살아가는 길을 걷자고 제안한다. 성철스님이 무상정각이라는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수행이 이어져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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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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