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봉선사 홍법강원의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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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 2022 년 8 월 [통권 제112호] / / 작성일22-08-05 09:48 / 조회3,442회 / 댓글0건본문
근대불교잡지 산책 20 |『홍법우』 (통권 1호, 1938.3)
『홍법우弘法友』는 남양주에 있는 봉선사奉先寺 홍법강원弘法講院의 홍법강우회弘法講友會에서 발간한 불교잡지다. 1938년 3월 12일 창간되었고 창간호가 곧 종간호가 되고 말았다. 편집 겸 발행인은 이재복李在福, 인쇄소는 한성도서주식회사, 발행소는 봉선사 강원 내의 홍법강우회이며 비매품이다(사진 1).
홍법강원의 주역 홍월초와 이운허
봉선사는 1469년에 세조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세워진 교종 본찰이다. 전란으로 인해 여러 차례에 걸쳐 소실과 중창을 반복하였다. 근대 봉선사의 역사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 이는 홍월초洪月初 선사(1858~1934)이다. 그는 사찰령 반포 이후 실시된 주지 선거(1913)에서 봉선사 초대 주지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1906년부터 봉선사의 교종판사로 있으면서 봉선사의 실질적인 주지 역할을 담당한 바 있다.
홍월초는 근대불교의 선각자로서 명진학교의 초대 교장을 역임한 바 있고, 1920년대 봉선사 대웅전을 중수하고 삼성각을 신건하는 등 사찰의 외형적 면모를 일신하였다(사진 2). 홍월초의 근대 교육에 대한 열의, 사찰재정 운용의 탁월한 능력, 개인 재산의 공적 활용을 위한 희사 등은 당시 불교계의 모범으로서 언론에도 널리 회자된 바 있다.
근대에 ‘교종본찰’ 봉선사의 강원이 언제 기초가 잡혔는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불교』 36호(1927.6)의 기사에 “진호 대강백 남귀南歸-경기도 대본산 봉선사에 강주로 있던 안진호 사師는 경북 의성군 대본산 고운사의 강청을 받아 본년 4월 중에 부임하였다러라.”라는 휘보 기사를 보면 홍법강원이 세워지기 전인 1927년에도 봉선사에 강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2월 19일에 설립된 봉선사 내 홍법강원은 홍월초 선사(사진 3)의 유촉에 따른 것이다. 홍월초 선사는 입적하면서 유촉서(「고월초선사유촉서故月初禪師遺囑書」, 『홍법우』 창간호, p.94.)를 남겼는데, 주요 내용은 선사의 재산 2만 6천여 평의 토지를 전적으로 봉선사에 기증하고 강원을 설립할 것을 당부한다는 것이다.
홍월초는 평생 모은 토지 2만 6천여 평을 전부 봉선사에 헌납하여 봉선사 소유로 남기면서 이를 기반으로 두 가지 사업을 전개할 것을 당부하였다. 첫째는 불교전문강원의 설립이요, 둘째는 선원의 설립이다. 그리고 이 두 기관을 동시에 운영하기 어려우면 하나를 택하여 운영할 것을 당부하였다. 아울러 이 유촉서에는 특별히 법손 이용하에게 ‘법물法物’로 부여한 토지를 언급함으로써 법맥의 전승자로 이용하를 명시한 것이 주목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35년 2월 19일 ‘월초선사月初禪師 홍법사업弘法事業 봉선사奉先寺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이 창립되었다. 「봉선사 불교전문강원 원칙院則」을 제정한 날짜는 1936년 7월 1일이며, 1938년 3월에 강원의 회지인 『홍법우』가 창간되었다. ‘홍법우’는 원래 “봉선사 강원 학우의 통칭通稱”으로 쓰이던 것인데 잡지의 제명이 되었다.
홍법강원의 강주는 이운허李耘虛(법명은 용하龍夏, 1892~1980)이다(사진 4). 잡지 발간의 주체로서 실무는 담당하지 않았을지라도 전체 교육을 책임진 교수로서 잡지의 지향을 논하는 자리에 빠질 수 없다. 그는 30세(1921년)에 강원도 고성 유점사에서 득도하였고, 1924년 범어사에서 사교를 이수하였다. 이후 박한영이 강주로 있던 개운사 강원에서 수학하면서 1926년 2월에 이순호(청담)와 함께 전국불교학인대회를 개운사에서 개최하고 조선불교학인연맹을 결성하여 강원교육 혁신운동을 주도하였다.
1929년 7월~1932년 2월에는 만주 봉천성에서 보성학교 교장을 지낸 후 1936년(45세) 봉선사 불교강원에 강사로 취임하였다. (이는 봉선사 홈페이지의 소개에 따른 것이다. 봉선사 강원이 1935년에 설립되었다는 앞의 기록을 기준으로 보면 운허가 강주로 부임한 것이 1935년일 가능성도 있다.) 운허는 이후 봉선사 주지를 역임하고 해방 후 광동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에는 국내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찬하였고, 1964년에는 동국역경원 원장에 취임하여 한글대장경 완간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고로 속명은 이학수이며, 유점사 시절부터 개운사 시절에는 박용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운허는 홍월초의 유지를 받들어 세운 봉선사 홍법강원의 초대 강주가 되어 봉선사의 강학 전통을 수립하였고, 그 맥을 현재까지 지속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논설의 주제, 학인들의 각성 권면
『홍법우』는 강령[院訓], 권두언, 논설, 문학작품 순으로 구성되었고, 부록으로 「전조선강원학인명부全朝鮮講院學人名簿」를 수록하였다.
논설에는 유명 인사의 글(권상로, 김영수, 김태흡, 허영호, 변초우), 강주(이운허)와 선배 학인의 글(일주, 묘향산학인, 문동한, 정용기, 석기환), 재학 학인의 글(석경권, 김달생, 이재복 외 16인)이 수록되었다.
외부 명사의 논설 중 권상로의 「세행의 일이점」은 학문을 시작하는 학인들에게 작은 실행의 가치를 전한 글이다. 과거에 잘 운영되던 이력공부가 이제는 졸업장, 수료증 등의 간판을 취득하는 곳으로 전락하여 실지實地의 공부가 과거에 비해 손색이 있다는 것, 종교와 과학은 다르니 불교는 믿음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하고, 개방의 시대에 불교인으로서 작은 세행細行을 어기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조를 우려하면서 작은 행도 지켜서 혜명慧命을 잇고 법류法流를 흐르게 하기를 당부하였다. 비교적 잔잔한 어조로 어린 학인들에게 쉽게 풀어 전달한 훈화 같은 글이다.
강주 운허사문의 「종교와 종교인을 논하야 학인의 각성을 촉함」(사진 5)은 제목 그대로 불교가 처한 기회이자 위기인 현실 속에서 학인의 존재 의의를 되새기며 그 각성을 촉구하는 격려사다. 그는 종교의 참된 가치를 발휘할 승려다운 승려의 부재를 탄식하고 과거와 달리 사회 분위기가 불교의 신흥新興에 박차를 가하는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하며 이를 위한 실천행으로서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는 종교인으로서 책임감을 가질 것. 둘째는 종교인으로서 해解와 행行을 가질 것. 셋째는 사적私的 생활을 영위할 만한 실업적實業的 기능이 있어야 할 것 등이다. 특히 셋째 항목은 홍월초부터 실천했던 강학 정진과 실용주의라는 두 가지 지향을 학인들에게 다시 전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사진 6. 장일우의 시<명상곡>.
졸업생 석기범(문동한)의 「불교에 귀의하기까지」는 1937년 12월 현재 중앙불전 1학년에 재학 중인 강원 선배의 글이다. 이는 김천고보 4학년 재학 당시 김용사의 종소리를 듣고 출가 발심을 하게 된 후, 21세에 봉선사 말사인 수국사에서 불도에 귀의하게 된 과정을 소개한 글이다. 불교철학에 관심을 가진 개인적 소회가 담겨 있다. 그는 중앙불전의 학생회지인 『룸비니』 2호(1938.3)에 학예부 부원으로, 3호(1939.1)에는 학예부장으로 등장하며, 그 잡지에 「인간교육에 대하야」(2호), 「철학개념의 변천에 대하야」(3호), 「Schopenhauer 연구 일단」(3호), 「형이상학론서설」(4호) 등을 투고하였다. 강원 졸업 이후 철학도로서 진지한 학문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뚜렷하다.
강원 소속 학인의 글은 대부분 학인으로서 다짐과 권면을 담은 특징이 있다. 시사 논설의 첫 지면은 당시 홍법우 집행위원장인 김달생의 「홍법강원에 취就하야」가 차지하였다. 이 글에서는 홍법강원의 설판주인 홍월초를 소개하고, 강원 창설의 연기와 특장점을 소개하였다. 그는 홍법강원의 특장점으로 승려의 위의를 실생활에서도 잃지 않는 계율을 지킨다는 점과 매일 한 시간 이상 근로하는 일과를 통해 적극적 사회 참여 및 교화를 기도하는 실천적인 면모를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봉선사 강원이 당시 조선 불교계의 정세에 비추어 가장 적절한 곳이며, 이러한 자세와 풍토가 당시 ‘반도 40여 강원과 700여 법우’에 미칠 것을 기대하였다.
문학창작, 서정성이 가미된 내적 의지의 표현
학인의 문학작품으로는 수필(박동호, 임흥식, 석혜성), 꽁트, 동화(이인화, 권실능, 현수경, 유원종), 한시(김운애, 김달생, 계룡산인)와 시 작품이 있다. 시 작품은 장일우의 <명상곡>(사진 6), 박성도의 <이달의 기도>, 석죽포의 <눈>, 송춘환의 <꿈> 등이다.
고요한 방안은 무거운 침묵만 흐르고
질식할 듯한 혼탁한 분위기에 싸여
무거운 침묵을 지키는 희미한 「램프」
애수에 싸인 처녀같이도 애처러워라.
얄미운 현실!
기구한 운명이여!
가삼을 해치고 싹 트려든 불같은 희망도
칠색七色이 영롱한 홍교虹橋를 타고
낙원의 천국을 동경하든 최고最高한 이상도
거치른 이 땅에
애석하게도 매장하였나니
아- 가련한 운명이여!
--젊은이의 말로여!
희망의 꽃을 줴뜻고
이상향을 뒤흔드른
무서운 마수魔手를 힘껏 꺾어
깊고 깊은 대양에 던지고
황지荒地를 개간하고 재출발하려는
용사여!
개척자여!
초인간적 견지에서
고답적 보조步調로 행진하라! 행진하라!
기침起寢을 알리우는
청정한 사원의 새벽 종소래
그윽히 들린다.
아- 명상!
검은 명상 속에 사로잡히였다. (장일우, <명상곡暝想曲>)
1930년대는 한국문학사에서 시의 시대로 알려질 만큼 풍부한 시 세계가 구축되는 시기이다. 하지만 한문 경전을 주로 읽는 강원의 학인은 자유시 창작보다 오히려 한시 창작이 더 수월했던 마지막 세대로 파악된다. 장일우의 작품은 『홍법우』 수록 시 가운데 현대시 형식을 갖춘 유일한 작품이다. 침잠의 공간, 희망 없는 젊음의 끝에서 초월적 경지를 추구하는 강인한 용사의 모습에서 우리는 담대한 자세로 구도에 정진하는 젊은 수행자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한문 불경을 과목으로 이수하는 불교학의 학인이요 수행자들인 젊은 청년들이 나름대로 소박한 시상 속에 종교적 감성을 곁들인 결과 이 시는 『홍법우』가 가진 계몽적 성격에 다채로운 감성의 숨통을 열어놓은 효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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