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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간단치 않은 층층의 번뇌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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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2 년 7 월 [통권 제111호]  /     /  작성일22-07-05 11:36  /   조회4,17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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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공부해서 견성성불하자!”는 성철스님의 수행론을 비판하는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다.  

“우리가 이미 부처라면 그냥 부처로 살면 되지 왜 수행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각고의 수행을 강조하는 참선수행론이 오히려 견성성불을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렇다.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추고 있다. 본래 깨달아 있다. 이미 부처다. 그러므로 그냥 부처로 살면 된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구르지 않는 돌에는 이끼가 낀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왜일까? 본래 부처라는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 그럴 리가 있겠는가? 불교는 불성의 종교다. ‘당신이 바로 부처다. 불성을 알아라. 불성을 믿어라. 불성을 실천해라. 불성을 체험해라. 불성과 하나가 되어라.’ 우리는 이런 식의 법문을 수없이 접해 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성이 무엇인지 모른다. 간단치 않은 층층의 번뇌망상이 그것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혹 자기가 불성을 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은 착각일 수밖에 없다. 그 생각 자체가 곧 번뇌망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중생은 진여 불성과 무명의 모순적 공존 그 자체다. 그래서 공평하게 말하자면 불성을 꽃피워 부처의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절반, 무명의 구름에 갇혀 세세생생 어두움 속에 살아갈 가능성이 절반이다. 다만 그것은 산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지 실제로는 그보다 열악하다. 특별한 경각심이 없이 가만히 놔 둘 경우 무명의 끝없는 훈습작용으로 인해 번뇌망상의 지분이 자동으로 증가해 간다. 그렇게 돼먹은 것이 중생의 살림살이다.

 

우리가 매 순간 경각심을 가지고 ‘열심히’ 수행해야 하는 이유다. ‘열심히’ 하는 수행이 있어야 층층의 번뇌망상을 해소할 수 있다. 번뇌망상이 해소되는 그만큼 불성을 깨울 수 있고, 싹을 틔울 수 있고, 꽃을 피울 수 있으며,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수행은 농사를 짓는 일과 같고, 불을 때서 물을 끓이는 일과 같다. 농사일을 멈추는 순간 그만큼 곡식의 윤기가 줄고, 불 때기를 멈추는 순간 그만큼 물이 식는다. 그래서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공부가 계속돼야(동정일여) 좋다고 한 것이고, 꿈을 꾸면서 공부가 계속된다면(몽정일여) 더 좋다고 한 것이며, 꿈조차 없는 상태에서도 공부가 한결같다면(숙면일여) 더욱더 좋다고 한 것이다.

 

원래 번뇌망상과 불성은 서로를 배제하는 관계에 있다. 번뇌망상이 커졌다는 것은 그만큼 불성이 암흑에 잠기게 되었다는 말이 되고, 불성이 밝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번뇌망상이 소멸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공부가 한결같으려면 진여불성의 햇볕을 가리는 구름장이 사라져야 한다. 또 반대로 한 찰나라도 공부가 사라졌다면 번뇌의 구름이 권토중래하였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번뇌망상의 권토중래를 막으려면 수행이 힘이 그것을 압도해야 한다. ‘열심히’ 하는 수행이 중요한 이유다. 사실 매일 하던 참선이나 기도를 하루 이틀이라도 멈추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수행을 거르는 그만큼 번뇌가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한다. 그것은 구르기를 멈춘 돌에 이끼가 끼는 것과 같다. 

 

번뇌망상의 뿌리 3세 6추

 

생각해보면 “부처로 살면 된다.”는 말은 완전한 진리다. 그렇지만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 자체가 번뇌망상일 가능성이 십중팔구다. 중생의 차원에서 말하는 부처는 결국 중생심의 투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생심은 표층의 분별의식과 심층의 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심층의 무의식을 아뢰야식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모든 번뇌망상의 원천에 해당한다. 보통 그 작용을 알아차리기 어려우므로 미세망상이라고 부른다.

 

이에 비해 표층의 분별의식은 그 작용을 알기 쉽다. 그래서 추중麤重망상이라고 부른다. 또 미세망상은 세 차원으로 나뉘므로 3세라고 부르고, 추중망상은 여섯 차원으로 나뉘므로 6추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 말나식이라고 불리는 중층의 자아의식을 설정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것의 설정 여부에 대해서는 역대 주석가의 해석이 일치하지 않는다. 성철스님은 말나식을 설정하지 말자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언급이 없으며 논의에도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이다. 

 

사진 1. 『백유경』. 중국의 국민 작가 루쉰魯迅 시주 각인본. 

 

어쨌든 3세 6추가 진여불성을 어둡게 가리는 번뇌망상의 뿌리이므로 이것을 뽑아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셈이다. 성철스님은 그 최심층의 근본 뿌리인 3세 아뢰야식의 소멸을 설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번뇌망상의 다양한 종류와 그 작용에 대한 설법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오로지 번뇌망상이 일어나는 최심층의 뿌리인 3세 아뢰야식의 소멸이 확인될 때까지 수행을 멈추지 말자는 설법으로 일관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번뇌망상이 소멸하는가? 그것과 싸워 이기면 되는가?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번뇌망상과 싸우다 보면 그것을 인정해 주는 꼴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고 상대해 주는 순간 번뇌망상은 그 에너지를 받아 힘을 더 키운다. 그래서 번뇌망상과의 싸움은 실체 없는 도깨비와의 씨름과 같다. 밤새 씨름하다 아침이 되면 낡아서 쓸모없는 빗자루 한 자루가 뒹굴고 있을 뿐인 것이 도깨비와의 씨름이다.

 

번뇌와의 싸움이 그렇다. 힘만 쓸 뿐 실속 없는 싸움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인식되지 않는 심층 무의식과는 어떻게 싸울 것인가? 그래서 이 공부는 번뇌망상을 제거하려 하지도 않고[不除妄想] 진여를 추구하지도 않는[不求眞]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번뇌망상과 싸우지 않고 어떻게 그것을 소멸시키는가? 번뇌망상은 그냥 내버려두고 수행자의 본업인 자기 공부로 돌아가면 된다. 경행經行과 좌선이라는 수행자의 자기 갈 길만을 가면 되는 것이다. 『백유경』의 비유가 있다.

 

옛날 목이 마른 여행자가 물을 찾다가 나무로 된 통을 발견하였다. 그 통의 다섯 구멍에서는 맑고 시원한 물이 흘러나왔다. 여행자는 물을 마셔 갈증을 풀고는 손짓을 하며 나무통에게 말하였다. “물은 충분히 마셨으니 이제 물을 흘려보내지 마라.” 이 말에 상관없이 물이 계속 흘러나오자 여행자가 화를 냈다. “물을 내놓지 말라면 말을 들을 것이지 어째서 계속 물을 흘려보내는 것이냐?” 그렇게 나무통과 싸움을 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말을 했다. “참 어리석군요. 그냥 당신 갈 길을 가면 될 것을 물을 내보내는 통과 싸울 일이 뭡니까?”

 

번뇌망상과 싸우지 말고 자기 갈 길을 가라

 

여기에서 갈증은 집착이고, 몸은 나무통이고, 물은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오욕락이다. 오욕락은 허망한 분별의 소산이다. 수행은 그것의 허망함을 알고 그것을 멀리하는 마음을 내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몸이 있는 한 모양, 소리, 향기, 맛, 감촉을 끊을 길이 없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사람이 돌이나 나무와 같은 무생물이 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담은 번뇌망상은 그냥 놔두고 ‘자기의 갈 길’, 즉 스스로 선택한 수행방편에 전념으로 투신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불교에서 제시하는 우수한 수행방편은 모양에 따른 분별과 명칭에 의한 관념화의 운동을 멈추게 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래서 이 공부의 최일선에서는 ‘한 물건’, 혹은 ‘불성’이라는 외마디 말조차 문제가 있다. 육조스님이 대중들에게 물었다.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이름도 없고, 별명도 없다. 뒤도 없고 앞도 없다. 그대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신회가 나서서 말했다. “모든 부처님들의 본래 근원이며, 저의 불성입니다.”

육조스님이 말씀하셨다. “이름도 없고 별명도 없다고 했는데, 너는 다시 본래 근원이니 불성이니 말을 붙이는구나? 네가 나중에 도량을 세워 가르침을 펴게 된다 해도 그저 알고 이해하는 무리의 일원이 될 뿐이겠다.” 

 

사진 2. 남화선사南華禪寺에 모셔진 육조혜능六祖惠能 대사의 진신사리眞身舍利. 

 

‘불성’, ‘부처’는 할 수 없어서 붙인 이름이지 진리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 단어를 가지고 진리를 보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도 그것은 결국 분별망상의 운동회가 될 뿐이다. 사실 신회의 답변이 교리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든 분별을 내려놓고 그 규정할 수 없는 ‘한 물건’과 한 몸으로 만난 입장에서 답을 내놓으라는 육조스님의 조건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그런 점에서 신회에게는 분별의 혐의가 있다. 심지어 바로 ‘이것’이라 해도 십중팔구 버스 지나간 뒤 손 들기이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모든 화두를 질문형으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모든 화두에 “왜?”, “어째서?”, “이 뭣고?”를 붙이도록 하자는 것이다. 간화선의 핵심 중에서도 다시 핵심만을 취하고자 한 것이다. 왜 그런가? 질문형 화두에는 의도가 끼어들 수 없다(무념). 오로지 모를 뿐인 마음으로 지향하는 바가 없으므로 형상에 따른 분별이 없다(무상). 간절한 의심으로 밀고 나가므로 머물 수가 없다(무주).

그리하여 성철선의 이 질문형 화두들은 매 순간 우리로 하여금 분별을 내려놓고 진리와 맞대면하는 최일선에서 물러나지 않도록 한다. ‘이것’, ‘한 물건’이라는 말조차 끼어들 수 없는 순수한 질문으로 일관하도록 한다. 그렇게 질문형 화두는 가장 깊고 미세한 분별이 일어나는 아뢰야식의 뿌리를 뽑는 마지막 지점까지 수행자를 밀어붙이는 것이다. 

 

사진 3. 신회神會. 『육조단경』의 논란의 수행자. 

 

기억하자. 간단치 않은 층층의 번뇌망상이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이 바로 견성이다. 불법을 공부하다가 무엇인가 전에 없던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깨달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성철선의 이러한 가르침을 진지하게 수용한다면 더 이상 “그냥 부처로 살면 되지 왜 수행을 해야 하느냐?”는 수행무용론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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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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