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1969년 봉암사 제2결사를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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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2 년 6 월 [통권 제110호] / / 작성일22-06-07 11:13 / 조회4,149회 / 댓글0건본문
은암당 고우스님의 수행 이야기⑧
1962년 비구·대처 통합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한 지 5년 만인 1967년에 조계종단사에서 처음으로 해인사에 총림叢林이 설치되고 초대 방장에 56세의 성철스님이 추대되었다. 종단은 지난한 어려움 속에서도 승단 정화운동을 성취하고 수행종풍 진작의 기틀을 다져가고 있었다.
1967년 해인총림 백일법문과 고우스님의 동안거
고우스님도 해인총림 선원에서 동안거 정진을 하려고 방부를 받아 놓고 김장까지 하고 결제 준비를 마쳤다. 그때 갑자기 활안活眼(1926~2019) 스님이 해인사로 찾아와서 같이 묘관음사로 가서 동안거를 지내자고 하였다. 참 난감하였다. 활안스님은 김천 수도암 행자 시절부터 알고지낸 사이로 청암사 강원 시절에도 만났다. 고우스님이 묘관음사 선원에서 첫 안거를 지낼 때도 입승 소임을 맡아 형님처럼 잘 이끌어준 분으로 이후 묘관음사에서 여러 철을 함께 잘 정진하였다. 그 인연으로 해인사까지 고우스님을 데리러 온 것이다. 형님처럼 따르는 선배 스님이 일부러 먼 길을 와서 같이 가자고 하는데 안 간다고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따라나서서 결국 1967년 동안거는 성철스님께서 방장으로 계시던 해인총림에서 하지 못하고 묘관음사로 가서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동안거가 끝나고 해인사에서 안거를 난 법전法傳(1926~2014) 스님이 묘관음사에 와서 성철스님께서 동안거 동안 백일법문을 하셨다는 것을 말해 주어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만약 그때 성철스님께서 백일법문을 설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고우스님께서는 해인총림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하셨고, 직접 백일법문을 듣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하셨다.
1960년대 한국불교는 격동기였다. 일제강점기에 대처승들의 득세에 눌려 뒷방에서 어렵게 참선 수도하던 비구 수좌들은 광복 후 1947년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와 1954년에 본격화된 승단 정화운동을 통해서 천신만고 끝에 교단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리고 1962년 비구·대처 통합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하면서 비구승 주도의 교단 운영권이 확립되어 갔다. 이런 배경에서 1967년에 해인총림이 지정되어 선풍禪風 진작의 기반을 다졌고, 성철스님은 해인총림의 첫 동안거에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는 선종 가풍에서는 드물게 하루에 한 시간 씩 100일 가까이 설법을 하였다.
훗날 1993년경 고우스님께서는 원택스님이 책으로 만든 『백일법문』을 읽어보고는 너무나 기뻐하셨다. 당신이 그동안 공부한 경전과 참선 체험이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 훌륭하게 정리되어 있어 중도 정견이 확고해졌다고 하셨다. 고우스님께서는 『백일법문』을 인류 최고의 불교입문서라 평하였고, 불교 공부를 묻는 누구에게나 『백일법문』 읽기를 권하고 책을 구해서 나눠주시기도 했다.
1969년 봉암사 제2결사의 시대적인 배경
1969년 김용사 주지를 송월淞月(1925~2008)스님이 맡게 되었다. 송월스님은 고우스님의 경안經眼을 열리게 해 준 혼해강백의 유일한 상좌였다. 김용사 주지를 맡게 된 송월스님은 금선대에 있던 고우스님께 큰절 총무 소임을 부탁해서 김용사 총무를 맡았다.
그때 마침 김용사에 와 있던 법연法演스님(지금 봉암사 백련암 주석)이 고우스님이 내려온 금선대로 올라가 정진하게 되었다. 또 김용사 산내 화장암에는 설악산 백담사에서 같이 정진하던 법화스님이 있었다. 이렇게 하여 김용사에는 고우스님과 도반 법화스님, 법연스님이 한 도량에서 정진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수좌 도반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그런데 김용사와 가까운 문경 희암산에 봉암사가 있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희양산 봉암사는 통일신라 후기 지증도헌국사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희양산문을 개산하여 지금까지 선풍이 성성하게 전승되고 있는 한국선의 대표 도량이다. 고려시대에는 희양원曦陽院으로 도봉원, 고달원과 함께 3대 국찰國刹이었다. 개산조 지증도헌국사롤 비롯하여 정진국사, 태고보우국사, 『금강경오가해 설의』를 지은 함허스님과 같은 수많은 고승들이 정진한 유구한 참선 도량이다.
특히 봉암사는 광복 후인 1947년 성철스님이 자운, 보문, 청담, 향곡, 혜암, 월산, 법전, 지관스님들과 함께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 내걸고 결사한 도량이다. 그러나 1950년 전쟁이 터져 결사는 중단되고 말았지만 봉암사의 결사 정신은 1954년 승단 정화운동을 거쳐 1962년 통합 조계종단의 출범으로 이어져 지금 대한불교조계종의 사상·문화적인 기반이 되었다.
전쟁으로 결사가 중단된 이후 봉암사
지금은 봉암사가 대한불교조계종의 유일한 종립선원으로 1년에 단 하루 산문을 개방하고 364일 산문을 닫고 오로지 참선 수도만 하는 세상에 희유한 수좌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결사가 중단된 이후의 봉암사는 우리 민족의 운명처럼 위기를 맞았다. 1947년 가을에 시작된 봉암사 결사는 1949년 동안거를 해제한 뒤인 1950년 봄에 중단되고 말았다. 봉암사에 빨치산이 자주 나타나자 결국 국군이 절과 암자의 출입을 금지하는 소개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유구한 천년 고찰도 시대의 아픔을 비켜가지 못했던 것이다.
1950년 6월에 전쟁이 터져 인민군이 내려오자 국군이 남쪽으로 후퇴한 사이에 만성晩惺스님은 비어 있는 절을 지키기 위해 홀로 봉암사로 가서 여러 번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도량을 지켰다. 전쟁이 끝나자 종단이 정화로 어수선한 틈을 타서 경찰 출신의 속인이 스스로 머리를 깎고는 주지 행세를 하며 700만 평이나 되는 봉암사 임야를 팔아먹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가은 불자들이 봉암사를 지키자고 들고 일어나고 휴정休情스님이 앞장서서 노력하여 6년간의 소송 끝에 팔아먹은 땅을 전부 되찾았다.
성철스님은 팔공산 성전암에서 10년 동구불출 정진을 마치고 1965년 김용사에서 첫 대중설법을 시작한 뒤 사부대중이 모여들자 더 넓은 도량을 찾던 중 봉암사도 방문하여 살펴보았지만 결국 도반 자운스님의 요청으로 1967년 해인사로 가게 된다.
유구한 전통과 결사도량으로서 청정한 기운이 감도는 봉암사가 좋아서 자주 찾는 수좌들이 많았다. 1969년 여름에 법진스님이 봉암사 백운암에서 홀로 정진하고 있었는데, 양식이 떨어져 봉암사 원주스님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봉암사에도 양식이 없다고 주지 않았다. 법진스님이 “어떻게 큰절에 양식도 없느냐?”고 뭐라 하자, 원주스님이 “차라리 스님이 절을 맡아 살림을 사세요.” 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법진스님은 하는 수 없이 양식을 구하러 은사스님이 계시는 서울 대각사로 갔다. 대각사에서는 2만 5천 원이라는 큰 돈(지금 기준으로는 3백만 원)을 보시해 주었다. 그렇게 탁발을 마친 법진스님이 점촌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김용사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도반들을 만났다. 서로 안부를 묻고 하다가 봉암사 이야기가 나오자 “차라리 봉암사를 정화해서 참선도량으로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하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법진스님은 봉암사로 가지 않고 김용사로 가서 수좌들과 봉암사 문제를 더 논의하게 되었다. 그때 김용사에 모여 봉암사 문제를 일차적으로 모여 논의한 수좌들은 법진, 고우, 법화, 법연, 천장, 영명스님 등 여섯 비구들이었다.
당시 김용사에는 성철스님이 불사하여 머무신 상선원上禪院이 있었다. 정식 선원을 운영한 것은 아니지만 선원에 수좌들이 오가며 자유롭게 정진하여 주로 상선원에서 봉암사 정화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때 범어사 무비無比 스님도 우연히 점촌정류장에서 수좌들을 만나 봉암사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동참하겠다”하고 왔고, 정광淨光 스님도 인연이 되어 합류하였다. 이렇게 하여 10여 명 수좌들이 봉암사를 다시 참선도량으로 만들 계획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때 고우스님은 33세로 가장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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