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표훈사에서 펴낸 불교 포교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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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 2022 년 6 월 [통권 제110호] / / 작성일22-06-07 10:09 / 조회3,680회 / 댓글0건본문
근대불교잡지 산책 18 | 『금강산金剛山』 (통권 10호, 1935.9~1936.6)
『금강산』은 금강산의 표훈사에서 창간한 불교잡지다. 1935년 9월 창간호가 발행된 이후 1936년 6월까지 총 10호가 발행되었다. 잡지의 판권장을 보면 전 호에 걸쳐 편집 겸 발행인은 권상로이며, 인쇄소는 중앙인쇄소, 발행소는 금강산사金剛山社다.
금강산 관광의 열풍 속에서
당시 권상로는 중앙불전 교수였는데 그의 주소는 금강산사와 마찬가지로 경성부 누하동 77의 4번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잡지를 창간한 실제 주인공은 당시 표훈사 주지를 역임하던 최원허崔圓虛(1889~1966)이다.
표훈사에서 『금강산』을 창간한 배경은 무엇일까. 이는 당시 금강산을 둘러싼 일제의 관광지화 사업의 여파에 있다. 『금강산』은 당시 금강산을 관광상품화하던 시류에 대응하여 금강산을 불교적 공간으로 재확인하고 이를 널리 홍보하고자 마련한 기획물이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시작하던 1910년대부터 금강산의 경관에 주목하여 세계적인 관광지로 상품화하고자 하였다.
1910년대부터 일본 관광업계(일본여행협회 조선지부)는 일본인과 서구에 금강산을 소개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15년에는 금강산 그림엽서를 제작 배포하였으며, 1916년에는 『금강산 안내』를 영문과 러시아어로 발간하였다. 한편 만철滿鐵 경성관리국이 발행한 금강산 안내서에는 지도와 경치 사진을 실었다.
1910년대 후반 일본의 명사들과 조선총독이 금강산을 방문하였고, 대규모의 러시아 관광객을 유치하였다. 금강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첫 단계는 철도 개통이었다. 1914년에는 경원선 철도가 건설되었고, 1919년 설립한 금강산철도회사는 이후 전기 철도를 개설하고 노선을 확장해 가다 1931년에는 철원에서 내금강역까지 확장 개통하였다. 조선철도국은 1929년 동해북부선을 개통하였고, 1932년에는 외금강역에서 고성까지 전 노선을 개통하였다. 이러한 철도노선의 완비에 따라 1930년대 초반 금강산 대중관광이 본격화되었다. 1931년에는 탐승객이 15,219명, 1932년에는 24,892명으로 늘어났고, 1933년에는 4만 명에 이르렀다. (이경순, 「1930년대 중반 불교계의 『금강산』 잡지 발간과 그 의의」, 『불교학연구』 51집, 불교학연구회, 2017, pp.162-163 발췌 인용)
7, 8시간이면 경성에서 금강산의 안쪽까지 도달하여 온천을 즐기고 차를 마시며 온갖 오락을 즐길 수 있는 대중관광의 시대에 금강산은 한국 고유의 신앙과 불교 신앙의 성지가 아니라 관광지이자 신사나 교회수련관이 세워진 복합공간으로 변해 갔다. 이는 산내에 주석하고 있던 승려는 물론이고 불교계 지성들의 역사와 문화적 인식에 생채기를 내는 현실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금강산의 유명사찰 표훈사 주지 최원허는 금강산에 내재한 불교 사상과 문화를 외부에 알리고자 잡지를 창간한 것이다. 따라서 이 잡지는 단순한 금강산 홍보용 잡지로 치부할 수 없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오랜 역사성과 종교성을 가진 ‘성소聖所’로서 금강산의 의미를 발굴하여 대중에게 알리겠다는 그 의지는 민족적 자존심과도 이어져 있다.
한편 『금강산』은 당시 일제가 종교정책 중의 하나로 시행하던 심전개발운동을 본지의 주요 지향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금강산』보다 한 달 앞서 『불교시보』(1935.8~1944.4)를 창간하면서 심전개발운동을 전개한 김태흡이 잡지의 주요 필진으로 등장한 것과 관련이 있다. 『금강산』 역시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간행된 시대적 산물이다.
금강산불교회라는 조직 기반
표훈사 주지 최원허는 금강산의 본래면목을 대중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기획 의도를 가지고 권상로에게 발행과 편집을 전적으로 부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을 추진하는 공식 기관으로 금강산불교회를 조직하여 교계의 지식 인프라를 통해 공동의 불교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창간호가 1935년 9월 5일 발행되었는데, 금강산불교회 창립총회는 9월 7일 경성의 각황교당에서 개최되었다. 『금강산』 창간호 발행을 기회로 창립총회의 명분을 삼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회의에서 사회는 이춘경이 맡았고 출석 인원은 22인이었다. 취지 설명은 최원허가 하고 회명을 토의한 결과 금강산불교회로 결정하였다. 당시 좌장席長은 권상로였으며, 권상로의 추천[自辟]으로 최원허, 안진호, 김태흡 3인이 임원 선정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이들의 추천으로 회장 최원허 외에 고문으로 송만공, 송종헌, 임석진, 박한영, 방한암 등 44인의 대덕이 선정되었다. 고문단은 당시 교계의 명사를 총망한 것이었지만, 실제적인 회합이나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창립회의에서는 김태흡 저술로 간행된 『보덕각시연기』와 『법기보살연기』와 권상로가 주간한 『금강산』(이상 표훈사·금강산사 간행)이 모두 ‘본회의 사업’임을 보고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미 잡지 창간 이전부터 최원허와 권상로, 김태흡은 밀접한 논의를 통해 사업을 추진하였음이 드러난다. 안진호는 권상로와 대승사에서 인연을 맺은 인물로 불교사 자료를 발굴하여 사지를 편찬하는 데 진력했던 인물이다.
권상로, 안진호, 김태흡은 1935년 발행한 근대불교의례서 『석문의범』의 제작에도 함께 참여한 바 있다.(안진호 편, 권상로 김태흡 교정, 권상로 서문) 단순하게 말하면 표훈사 주지 최원허가 교계 문화활동의 핵심에 있던 권상로에게 전적으로 의뢰하여 잡지 발행을 진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금강산』은 표면적으로는 지역 잡지지만 실제로는 경성의 명망가가 중심이 되어 제작한 것으로서 중앙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권상로는 1910년대 불교잡지(조선불교월보)의 발행인이며 1924년부터 1931년까지 발행된 『불교』지의 발행인으로서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았던 인사다. 불교잡지 발행을 그만둔 해부터는 중앙불전의 교수로서 후학을 지도하면서 학계와 언론계의 주역으로 오랫동안 자리 잡았다.
1933년 7월 대표적인 불교기관지 『불교』가 종간되었다. 1930년대는 1920년대부터 성장한 불교청년들에 의해 『회광』, 『불청운동』 등 분파적 잡지가 등장하여 교계의 혁신을 도모하고자 했던 시기다. 기존에 언론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던 기성세대들은 언론의 주류에서 살짝 벗어나 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금강산 표훈사에서 전국적으로 배포할 기획 잡지를 발행한다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이 권상로였고, 권상로는 그와 관련이 깊은 김태흡과 안진호를 주요 필진으로 등장시켜 잡지를 발행하였다.
중앙불전 교강사 위주의 필진
『금강산』의 필진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호-권상로, 박한영, 김태흡, 강전준웅(에다 토시오), 최남선(기존 원고)
4호-권상로, 김태흡, 김경주, 김영수, 박윤진, 최원허
5호-권상로, 김태흡, 김영수, 김경주, 박한영, 박윤진, 안진호, 백양환민, 서병재(독자 문의), 최원허
10호-권상로, 박한영, 박윤진, 김경주, 김재수(중앙불전 학생), 윤기원(중앙불전 학생), 김어수(중앙불전 학생)
이를 보면 권상로와 김태흡이 중심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필명으로 복수의 글을 한 호에 투고한 양상이 드러난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중앙불전 교강사진, 즉 박한영, 강전준웅(에다 토시오), 김영수, 김경주, 박윤진 등이 주요 필진으로 등장하였고, 7호 이후에는 당시 중앙불전 재학생이 일부 동참하였다. 정작 표훈사 주변의 인물이 투고한 예는 최원허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인근 사찰인 유점사의 경성포교소 포교사인 변설호의 짧은 글인 「보원거사의 출세」(8호)가 있을 뿐이다.
이외에 백양환민의 「금강산 초대면初對面」(5호)과 백초월(1878~1944)의 「불법중요佛法中要를 소개함」(6, 7호)이 있다. 백양환민은 권상로가 『불교」를 주간할 때 「한라산순례기」(69-79호, 1930.3~1931.1)를 연재한 인물이다. 아마 민족주의 계열의 문화사학자인 것으로 판단된다. 백초월은 당시(1936년) 월정사 강원의 강사를 역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을 볼 때 『금강산』은 논설이나 수필을 막론하고 중앙불전 교수진의 투고와 최원허의 발행 관련 소감문이 큰 틀을 형성하고 있고, 중앙불전 재학생이나 소수의 외부 필진이 일부 참여한 형국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필진의 분포에 따라 잡지는 글의 다양성과 시대적 담론의 수용에 매우 취약한 구조적 특징을 갖게 되었다. 금강산 관련 전설, 불교 경전의 근거, 불교적 해석 등 잡지가 지향하는 금강산의 내면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학술적 기획은 일부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필진 자체가 학자 위주여서 금강산의 현장성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금강산의 본래면목 발굴
잡지가 표방한 지향은 2호에 실린 「금강산불교회 취지서」에 잘 드러나 있다. ‘오늘날’ 세계적 명산으로 소개되면서 세인들이 드나들게 되고 여러 명목으로 이득을 취하는 관광지로 전락해 버린 현실 속에서 ‘금강산의 진면목인 불교의 이상을 널리 선전하여 천하 사람의 머릿속에 영원한 금강 종자의 씨를 뿌리’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한 사업으로 제시한 것은 금강산의 천진면목을 널리 천양하는 동시에 연구와 사업을 겸행하여 불교정신을 보급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심전개발에 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며 금강산불교회를 조직한다고 하였다.
금강산의 진면목, 즉 금강산에 내재한 불교 정신과 문화를 구현한다는 대의에 충실한 글로는 박한영과 권상로의 논설이 대표적이다. 박한영의 「금강관金剛觀」(1-2호), 「금강산 전설 만평」(5호), 「보익輔翼의 금강」(7-9호), 「이 산[此山]의 주인공은 누구[是誰]오」(10호)와 권상로의 「산으로 본 금강경」(1-8호, 10호), 「금강예찬」(권상로, 5호)이 이에 해당한다.
박한영의 「금강관」은 세계의 으뜸인 금강산을 서두에 소개하며 금강 관법觀法, 즉 금강산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 글이다. 내용은 크게 예술관, 종교관, 물질관으로 나누되 잡지에는 예술관과 종교관에 국한하여 소개하였다. 예술관은 시관詩觀, 서관書觀, 화관畵觀으로 나누고 동양의 시인, 서예가, 화가 이름을 다수 거론하였다. 예를 들어 화관의 경우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화가의 여섯 가지 기법[六法]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것이라 하였다. 기운생동氣韻生動, 골법용필骨法用筆, 응물상형應物象形, 수류전채隨類傳彩, 경영위치經營位置, 전모이사傳模移寫 등의 기법이 모두 금강산에 구현된 것으로 소개한 것이다.
금강산의 전설을 소개한 글에는 「금강산의 기문奇聞」(김태흡, 1호), 「법기보살과 보덕각씨 양 연기緣起를 읽고서」(질려원인, 2호), 「금강산 이야기-팔담八潭의 전설」(김태흡, 5호), 「금강산 전설, 명승의 술術 시합」(양섭, 7호) 등이 있다. 천국의 석가산石假山이 지하인간으로 옮겨왔다는 전설, 혈망봉의 유래, 8금강신 설화, 해금강 전설, 법기보살 설화, 보덕각시 설화, 팔담의 전설,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도술 시합 등이 소개되었다. 특히 법기보살과 보덕각씨 설화는 가장 유명한 금강산 관련 불교설화인데, 최원허는 창간호 발행 전후로 김태흡에게 두 설화를 각색한 소설 제작을 당부하여 단행본으로 발행한 바 있다. 두 책은 초판 매진 이후 다시 간행되지는 않았고, 이듬해 김태흡이 사장으로 있는 불교시보사佛敎時報社에서 재간행되었다.
『금강산』에는 이 외에도 금강산 이외의 다양한 기행문, 김태흡의 불경 각색 희곡, 중앙불전 교수진의 학술 논설, 심전개발운동과 관련된 김태흡과 권상로의 강연원고 등이 수록되어 있다.
『금강산』은 1935년과 1936년 사이 불교계가 처한 시대 상황이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고, 금강산을 제재로 한 학술논설 및 불교 대중화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다만 금강산이라는 지역의 잡지이면서도 금강산 소재 여러 사찰의 기관과 학인들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한계가 있다. 『금강산』은 지방의 잡지로 인식되지만 실제적으로는 중앙의 보수적 교계 인사들이 제작한 고답적인 잡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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