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대둔사지』의 불교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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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 2022 년 6 월 [통권 제110호] / / 작성일22-06-07 09:52 / 조회3,342회 / 댓글0건본문
근대불교사서史書 18 | 『대둔사지』 ⑥
『대둔사지』는 이전의 사적기나 불교사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불교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조선후기에 실학자들의 역사연구나 인식과도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어 불교사적으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객관적 서술
첫째,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고증을 기초로 한 객관적 서술이다. 『대둔사지』는 『삼국사기』·『고려사』와 같은 우리나라의 관찬사서를 비롯하여 중국의 불서佛書가 인용되었으며, 각종 사지와 기문記文·문집 등 약 37종에 이르는 자료를 기초로 찬술되었다. 중관해안이 찬술한 『죽미기』가 약 8종의 소략한 자료를 기초로 찬술된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폭넓은 자료의 수집과 활용은 특정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여러 책들을 비교하고, 교감校監했던 당시의 사료 고증을 통한 역사연구 방법론이기도 했다. 찬자들이 대둔사의 창건이나 그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죽미기』의 기록을 비판하고, 그 사실을 면밀하게 규명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서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자료의 수집을 비롯한 고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유배와 있던 정약용의 영향이 컸다. 사지의 체재나 찬술방법론에서 그가 관여했던 흔적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체재는 한 주제를 제시한 뒤 그에 대한 관련 자료를 망라하여 자신의 논지를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실증적 역사학 방법은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엄격한 자료비판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타당한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기에 두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는 “저서著書의 방법은 반드시 그 시대의 선후를 안 뒤 고증考證·증험證驗할 수 있다.”고 하여 그가 역사적 사실을 연대에 따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一. 일가一家의 설만이 있거나 제가諸家의 설이 같으면 그냥 기록하고,
一. 제가諸家의 견해 차이가 있으되 큰 문제가 아닌 경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只云 一云如此]’라고만 말하며,
一. 큰 문제인 경우 각자의 인명 또는 서명을 기록한다.
인용문은 정약용이 37세(1798)때 지은 「진사기찬주계進史記纂注啓」 서두에 써 놓은 주석을 붙인 원칙이다. 그가 고증에 제가의 설을 널리 참고하는 태도가 주목된다. 정약용의 이러한 저술과 주석의 원칙은 찬자들이 대둔사 창건과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생몰년과 활동시기, 삼국의 정세 등을 기초로 대둔사의 창건을 고증한 것이나, 찬자들의 고증을 통해 피력한 각자의 견해이기도 한 ‘안설按說’이나 ‘운설云說’의 형태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무징불신無徵不信’의 유교사관은 그 영향이 가장 뚜렷한 것으로 고대불교에 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삼국유사』와 같은 불교 사서를 근거가 없는 설화나 미신으로 취급한 것이다.
이와 같이 『대둔사지』는 대둔사 내외의 많은 자료를 토대로 이전의 『대둔사사적기』의 오류를 바로잡았으며, 산일散逸된 우리나라 고대불교사 기록을 재구성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당시 실학자들의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비판, 고증의 방법이 그대로 적용되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서술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고대불교사 복원에 기여
둘째, 우리나라 고대불교사 복원에 기여한 점이다. 『대둔사지』의 찬자들은 우리나라 고대사나 불교사 지식, 많은 자료들을 활용하여 대둔사가 법흥왕 13년(514)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기존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그들은 대둔사의 중건이 자장과 도선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이전의 기록 또한 부정했다. 의상과 원효가 대둔사에 주석하였고, 의상이 당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극복하고자 대둔사에 밀단密壇을 설치하고 기도를 드렸다거나, 대둔사가 화엄십찰華嚴十刹 가운데 하나였다는 오류 또한 비판했다.
찬자들의 이러한 찬술태도는 단순히 대둔사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승려가 미천한 계급으로 전락하고, 불교사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이미 전란으로 소실되어 버린 상황에서 기록의 치명적인 오류는 바로 역사적 사실로 각인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찬자들이 대둔사의 연혁과 지나온 사정을 바로잡기 위해 수집한 자료와 그들이 지닌 고대사와 불교사에 대한 폭이 넓고 깊은 지식은 단순히 대둔사에 국한된 지엽적인 차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 대둔사의 역사를 통해 잊혀져 가고, 탄압으로 왜곡되어 가는 우리나라 불교사를 온전히 소생시키고자 했던 사명감 또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정약용은 권4 『대동선교고』에서 『삼국사기』의 불교기사가 “기록이 모두 어그러져 전부를 믿기 어렵다.”며 불신을 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록했으며, 채영의 『해동불조원류』가 “신라의 명덕名德에 대한 사실이 잘못되어 믿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참고하도록 덧붙여 놓은 것이다.” 정약용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과 중국의 『불조원류』나 『전등록』에 입전된 해동 승려의 기록 또한 발췌하여 수록해 놓았던 것이다.
정약용의 이러한 찬술 정신은 단순히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그의 우리나라 고대사에 대한 관심은 우리 역사가 중 국사와 분명히 다른 독자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 것에서 비롯되었고, 문화를 척도로 하는 화이관華夷觀을 기초로 한 자존의식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그의 『대동선교고』 찬술은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의 불교사가 민족사를 체계화시키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조선불교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재구성하고자 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조선후기 대둔사의 위상 조명
셋째, 대둔사가 조선후기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천명한 것이다. 『대둔사지』는 당대사를 중심으로 한 불교사 서술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 대둔사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찬자들은 권1에서 대둔사를 조선후기 선교禪敎의 종원宗院으로 격상시킨 12종사와 12강사의 생애에 대해 비문을 기초로 정리했다. 권3은 조선불교의 중흥조인 서산대사의 생애와 입적 후 대둔사로 의발이 옮겨진 경위와 조정으로부터 그 공적이 인정되어 표충사를 건립하는 시말까지를 정리하기도 했다.
대둔사는 서산대사가 생전에 해남과 대둔사의 지리적 조건을 중요시하고 그의 의발을 보관하게 함으로써 조선후기 대사찰로 성장할 수 있었다. 더욱이 조정의 사당건립과 추존사업은 청허 문도뿐만 아니라 조선불교계의 종원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다. 여기에 당시 화엄학을 중심으로 한 걸출한 종사와 강사들을 배출한 것은 대둔사를 명실상부하게 조선 제일의 사찰로 탈바꿈시켜 놓았던 것이다.
『대둔사지』는 이러한 대둔사의 대내외적인 위상을 선양하는 데 훌륭한 매개체가 되었던 것이다. 찬자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둔사의 과거사 규명과 함께 당대 불교사에 중점을 두어 대둔사의 위상과 대둔사를 중심으로 한 조선후기 불교의 중흥을 모색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요컨대 『대둔사지』는 단순히 대둔사가 지닌 과거의 역사성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당시 침체된 조선불교를 주체적이고 독자적으로 중흥시키고자 했던 찬자들의 의지가 내포된 것이었다.
불교사서에 미친 영향
넷째, 이후 찬술된 불교사서에 영향을 미친 점이다. 『대둔사지』가 찬술되고 난 직후에 대둔사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교류 또한 활발했던 강진康津의 만덕사萬德寺(지금의 백련사)에서도 사지가 편찬되었고, 범해각안梵海覺岸(1820~1896)이 198인의 우리나라 승전을 찬술하기도 했다. 『만덕사지萬德寺誌』는 정약용이 모든 감정을 맡았고, 그와 관련 있는 인물들이 자료를 모으고 그것을 편집하고 교정하여 편찬을 마친 것이다.
그 체재와 찬술방식이 『대둔사지』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정약용을 중심으로 한 만덕사의 승려들이 『대둔사지』를 모범으로 하여 찬술한 것으로 생각된다. 『동사열전』은 범해각안이 찬술한 승전僧傳으로 우리나라 불교사의 사상과 신앙 그리고 홍통弘通에 관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 종합적인 불교사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두 사서가 지닌 체재와 찬술방식, 성격 등은 『대둔사지』가 지닌 역사인식을 계승하고 있다. 정약용과 대둔사 승려들의 찬술의 과정에서 보여준 조선불교사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치밀한 연구와 역사의식이 이후의 사서에서도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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