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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백두대간의 단전 희양산에 건립된 선궁禪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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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2 년 2 월 [통권 제106호]  /     /  작성일22-02-04 10:02  /   조회4,96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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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16 | 봉암사 ①  

 

영남의 문경聞慶으로 찾아들면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높은 주흘산主屹山의 봉우리들이 줄을 이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들이나 넘나든다는 험난한 조령鳥嶺, 즉 우리말 그대로 새재가 영남 땅에서 서울로 가는 길을 조금 열어주고 있었을 뿐이다.

 

문경 새재와 백두대간의 단전

 

문경에서 풀들이 우거진 고개라고 하여 초점草岾이라고 부른 새재를 넘어가면 충북 괴산 땅으로 들어간다. 여기부터는 평지 길이나 남한강을 따라 배를 타고 한양漢陽으로 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상인이나 관리, 심부름꾼 그리고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를 보러 다니는 선비들이나 이 길을 다녔을까 보통 사람들은 이 길을 다닐 일이 드물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한양 구경도 못하고 새재 남쪽 지역에 태어나 살다가 그곳에서 세상과 이별하였다. 관리들과 세도가들에게 시달리다가 살기 위해 도망쳐 나온 유민流民들이 이 험한 길을 올랐을지도 모르고, 이런 약자들까지 약탈하면서 도적질을 한 산적山賊들도 이 길을 오르내렸을 것이리라.

 

 

사진 1. 백악의 희양산. 

 

오늘날에는 사통팔달로 길이 나 문경은 이제 전국의 어디에서나 하루에도 다녀올 거리가 되었다. 수풀 우거진 험난한 땅 새재가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탈바꿈하여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빈번하게 찾아오는 곳이 되었고, 새재의 제1관문인 초곡성草谷城, 즉 주흘관主屹關에서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과 중성中城,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과 조령산성까지 맨발로 걷는 사람들도 있다. 이 성들은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 동안 왜적倭敵들에게 쑥대밭이 되도록 당한 다음에 정신을 차려 숙종肅宗(1095~1105) 때 축조되었다.

 

고려 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국가권력을 손아귀에 쥔 이성계李成桂(1392~1398)는 우왕禑王(1374~1388)과 창왕昌王(1388~1389)을 모두 편조遍照화상 신돈辛旽(?~1371)이 낳은 아들이라고 하며 죽이고 공양왕恭讓王(1389~1392)을 옹위했다. 이른바 ‘가짜를 없애고 진짜를 세운다’고 하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의 기치를 들고 나와 백성들을 속이고 결국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웠다. 자연히 조선왕조는 초장부터 왕자의 난이니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니 하며 왕실 내의 살육과 충신들을 도륙하는 것을 일삼다가 다시 부패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나라를 농단하는 세력들을 척결해야 한다며 일어선 천하의 선비들을 이 땅에서 몰살시킨 사화士禍를 거듭하다가 결국에는 나라 일을 해야 할 인간들이 동인東人이니 서인西人이니 하면서 패를 갈라 권력다툼을 하는 사이에 나라는 피폐해졌고, 급기야 일찍부터 조선 정벌의 야욕을 불태우던 왜적들이 쳐들어왔다. 

 

사진 2. 희양산 봉암사(정종섭 스케치). 

 

지금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같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천변만화하는 풍광과 운치를 즐기며 새재로 관광을 다니지만, 그 당시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이 땅의 우리 선조들을 생각하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부르며 새 나라를 만들었다는 왕들은 도대체 그 동안 무엇을 했으며, 높은 자리와 나라의 땅을 차지한 관리들은 무엇을 했는지 지금도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또 그런 어리석음과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불교에서는 세상에 선과 악은 없다고 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불교의 이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개인의 주관적 가치에서는 선과 악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들이 같이 모여 사는 사회나 국가에서는 타인의 행복에 무엇이든 기여하는 바가 있으면 선이고, 나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을 희생시키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조금이라도 어떤 짓을 한 바가 있으면 악이리라.

 

도헌국사가 창건한 선궁

 

봉암사鳳巖寺는 문경 희양산曦陽山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문경 시내에서 가은읍加恩邑으로 가서 다시 대야산大耶山 방향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눈부신 영봉 백악白岳의 바위산이 우뚝 솟아 눈 안에 가득 들어오는데(사진 1), 이 풍광을 보면 누구나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으리라. 높이가 998m에 달하는 희양산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단전에 해당한다고도 하는 산인데, 이 거대한 흰 바위산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장장 30리로 뻗어 있는 긴 계곡을 끼고 있어 일찍부터 천하의 길한 땅으로 알려져 왔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차에서 내려 웅장한 산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을 하곤 하였다(사진 2). 

 

봉암사는 신라 경문왕景文王(861~875)의 큰 아들인 헌강왕憲康王(875~886) 5년 879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지선智詵(824~882)화상 즉 도헌국사道憲國師가 창건한 이래 현재까지 선종의 도량道場으로 줄곧 그 맥을 이어오고 있고, 현재는 조계종 종찰로 오로지 승려들만의 수행 공간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사찰이다.  

 

사진 3. 봉암사 일주문. 

 

창건 당시 도헌국사는 희양산 중턱의 봉암용곡鳳巖龍谷에 선궁禪宮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수행승들이 수행하는 공간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용암봉곡이라는 말은 바위산이 봉황을 닮았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고, 높은 바위산에서 아래로 길게 뻗은 계곡으로 물이 흘러 물을 상징하는 용이라는 말을 붙인 것이다. 계곡에 물이 떨어져 이루는 소沼를 용추龍湫라고 하는 것도 용이 물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봉황이든 용이든 실재하지 않고 인간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니 더 얘기할 것이 없다.

 

시호가 지증智證이기에 지증대사로도 불리는 도헌국사가 봉암사를 창건한 이후에 후삼국간의 대립으로 인한 전쟁 속에서 사찰은 폐허화되고 극락전極樂殿만 남아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다 고려 태조太祖(918~943) 18년 정진대사靜眞大師 긍양兢讓(878~956)화상이 중창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여 고려불교의 중흥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진 4. 봉암사 석문. 

 

조선시대 초기에는 그 유명한 함허기화涵虛己和(1376~1433)화상, 즉 득통得通대사는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저술하고 1431년 세종 13년에 그간 퇴락한 절을 중수한 뒤 오랫동안 머물며 강론을 하다가 입적하였다. 이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가 나온 후에 우리나라에서는 『금강경』이 본격적으로 시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유불선儒佛仙의 삼교합일三敎合一을 주장하면서 그 유명한 『현정론顯正論』을 설파한 득통대사의 게송으로 알려진 한 수를 본다.

 

生也一片浮雲起   태어남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라네. 

浮雲自體本無實   뜬구름이라는 것은 그 자체 아무런 실체가 없나니 

生死去來亦如然   태어나고 죽는 것, 오고 가는 것도 마냥 이와 같다네.

 

그 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사찰 당우들이 소실되었고, 그나마 새로 지은 당우들도 1674년(현종 15)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고, 1703년(숙종 29)에도 화재를 겪고 중건되었으나 쇄락의 길을 걸었다. 1907년에 고종高宗(1863~1970)을 퇴위시킨 일본의 조선병합의 야욕에 저항한 의병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으면서 극락전과 백련암白蓮庵만 남고 잿더미가 되었고, 금색전金色殿 빈 터에는 철불 한 구가 방치되어 있다가 그나마 나중에 사라져 버렸다. 

 

사진 5. 침류교와 봉암사 전경.  

  

1955년에 법당인 금색전을 비롯한 몇 칸의 작은 건물이 들어섰으나 지금의 모습과 비교하면 절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늘날 침류교, 대웅보전, 태고선원太古禪院, 동암東庵, 적묵당 등 여러 당우들이 들어서고 대가람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90년 초 원행願行 화상이 주지를 맡아 수행도량으로 크게 중창하면서 이루어졌다.

 

무수한 납자들의 서원이 서린 도량

 

‘희양산 봉암사曦陽山鳳巖寺’라고 쓴 현액이 걸려 있는 고색창연한 일주문을 지나면(사진 3) 사역寺域으로 들어가는데,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납자衲子들이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인간이 일체 고통의 바다에서 나오는 진리를 얻으려고 이 문을 드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니 그 비장함이 길에 깔린 자갈마다 박혀 있는 것 같았다. 그 진리의 깨침이 해결되지 않은 수학문제를 풀 수 있게 하는 것도 아니고 흉년을 풍년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물리학의 법칙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경제를 살려주는 것도 아니다. 붓다가 일러준 그 경지, 즉 ‘붓다가 되는 경지’를 말한다.

 

일주문을 통과하여 뒤돌아보면 ‘봉황문鳳凰門’이라는 현액이 걸려 있다. 여기서 절을 향하여 걸어가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한자와 한글이 함께 새겨진 석문石門을(사진 4) 지나고 용추동천龍湫洞天의 백운계곡白雲溪谷의 물소리를 듣는 사이에 어느덧 침류교枕流橋에(사진 5) 이른다. 옛날에는 징검다리를 밟아 개울물을 건너다녔지만 육중한 통바위를 다리기둥으로 세워 석교를 놓으면서 이제는 바로 다리 위를 걸어 사역으로 들어선다. 사역으로 들어서면 방실이 양쪽으로 가로로 길게 붙어 있는, ‘남훈루南薰樓’라 쓴 현액이 걸려 있는 중층 정문이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넓은 앞마당을 품어 안은 웅장한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서 있다(사진 6). 지금의 대웅보전 자리에는 원래 금색전이라는 작은 법당이 있었는데, 대웅보전을 신축하면서 금색전을 삼층석탑三層石塔 뒤로 옮겼다.

 

 

사진 6. 봉암사 대웅보전. 

  

대웅보전이 있는 옆 공간에는 아름다우면서 당당하게 서 있는 고색창연한 모습의 극락전이 있다(사진 7). 극락전은 봉암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목탑형 전각殿閣이다. 그 형태나 위치로 보아 현재의 목조 건물은 조선시대 중후기에 세워진 왕실 원당願堂일 가능성이 있으며, 기단과 초석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단층 건물이지만 지붕이 겹으로 되어 중층 건물과 같은 외형을 갖추고 있고, 맨 꼭대기 부분은 목탑의 장식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극락전 내부에는 어필각御筆閣이란 편액扁額이 걸려 있는데, 어필을 보관하던 공간으로도 사용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안동의 광흥사廣興寺와 같이 조선시대 사찰에 어필을 보관하는 어필각이 있는 경우가 있다. 원래의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敬順王(927~935)이 피난할 때 원당으로 사용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지증대사와 정진대사

 

봉암사를 지증대사가 창건한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지만, 과연 그가 선문禪門으로서 희양산문을 개창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봉암사가 설립된 후 희양산문을 개창한 이는 봉암사에 들어가 선풍을 크게 일으킨 정진대사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한 편이다. 이는 봉암사 경내에 서 있는 「지증대사탑비智證大師塔碑」와 「정진대사탑비靜眞大師塔碑」의 내용에서 다소간의 차이가 있어 생겨난 문제이다.

 

사진 7. 봉암사 극락전.  

  

「지증대사탑비」에 의하면, 도헌국사는 어려서부터 부석산浮石山에 가서 교학敎學인 화엄공부를 한 다음에 출가하여 17세에 구족계를 받고 혜은慧隱 대화상에게 나아가 선禪을 배워 그 법을 이었다. 그리고 스승인 혜은화상은 준범遵範 화상으로부터, 준범화상은 신행愼行(神行, 信行, 704~779) 화상으로부터, 신행화상은 호거산瑚琚山의 법랑法朗(?~?) 화상으로부터 법을 이었으며(사진 8), 신라의 법랑은 중국 선종의 제4조 도신道信(580~651) 대사에게서 법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신라에 최초로 선종을 전한 것은 법랑화상인데, 그 제자인 신행화상은 다시 당나라로 들어가 북종선을 개창한 신수神秀(?~706) 선사의 맥을 이은 지공志空(?~?) 화상으로부터 법을 받아왔다. 중국의 선종이 5조 홍인弘忍(601~674) 대사에게서 6조 혜능慧能(638~713) 대사로 전해지면서 같은 홍인대사의 문하에서 공부한 신수대사가 따로 그의 선종을 열면서 혜능의 남종선과 신수의 북종선이 갈린다. 

 

 

사진 8. 사라진 단속사 신행선사비의 현존 탑본. 

 

도헌국사에게 이어진 법맥을 정리하자면, ‘당의 도신-신라의 법랑-신행지공-신행-준범-혜은-도헌’으로 내려오는 것인데, 신행화상이 신수종의 법을 이었다면 도헌국사에게 이어진 것도 북종선이라고 할 수 있다. 지증대사는 당나라의 남전보원南泉普願(748~834) 선사에게서 법을 받고 귀국하여 쌍봉사雙峰寺에서 법을 펼친 도윤道允(798~868, 도당 유학: 825~847) 화상의 마지막 대를 잇고, 경문왕景文王(861~875)의 여러 차례에 걸친 왕경으로의 초빙도 고사하면서 오늘날 계룡산鷄龍山을 말하는 계람산鷄籃山 수석사水石寺에 주석하며 구름같이 모여든 대중에게 법문을 펼쳤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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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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