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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대둔사지』의 찬술자와 정약용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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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  2022 년 2 월 [통권 제106호]  /     /  작성일22-02-04 09:28  /   조회4,50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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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사서史書 14 | 『대둔사지大芚寺志』 ③ 

 

『대둔사지』 찬술은 조선후기 대둔사의 스님들뿐만 아니라 이웃 강진의 백련사白蓮寺 스님들도 참여하였다. 아암과 그의 제자들은 『대둔사지』 전권의 찬술에 참여하였다. 즉 기어자홍은 호의시오(1778~1868)와 함께 교정을 담당했다. 아암은 『대둔사지』에 ‘유수留授’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암이 사지寺誌에 대한 부분적인 초고草稿를 남기고 타계(1811)하였으므로 이를 이용했다는 의미인 듯하다. 

 

대둔사의 명강사로 추앙받은 아암혜장

 

대표적인 인물인 아암혜장兒庵惠藏(1772~1811)은 자는 무진無盡, 호는 연파蓮坡 또는 아암兒庵. 속명은 팔득八得, 이며 법명은 혜장惠藏이다. 전라남도 해남 출신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해남 대둔사의 월송화상月松和尙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춘계春溪와 천묵天默으로부터 내전과 외전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불교경전은 물론 세속의 학문까지 통달하였으므로 그의 명성은 승도들 사이에 자자하였다.

 

 

사진 1. 『대둔사지』에 수록된 아암에 대한 내용. 

 

그 뒤 당대의 대강사인 연담유일蓮潭有一과 운담정일雲潭鼎馹로부터 불교공부를 계속하였다. 30세에는 대둔사 『화엄경』 대법회에서 주맹主盟으로 활약할 정도로 교학에 해박하여 대둔사의 12강사 가운데 1인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아암은 어린시절부터 『수능엄경』과 『기신론』을 특히 좋아했으며, 유교경전에도 이해가 깊었다고 한다.

 

그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다산은 아암이 “불교경전뿐만 아니라 외전 중에서 『논어』를 매우 좋아하여 그 지취旨趣를 연구하고 탐색하여 빠뜨린 온축이 없도록 기했으며, 여러 가지 성리서性理書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확하게 연마하여 속유俗儒들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었다.”고 한다. 다산은 아암의 학덕學德에 스승 연담유일이 12종사宗師 가운데 순서로는 가장 끝이고, 제자 아암 역시 12강사講師 가운데 가장 끝이었지만, 마지막이 아니라 정화精華라고 했으며, ‘蓮老大蓮也 坡公小蓮也’라고 두 사람을 연꽃으로 비유하여 불교계의 지성知性으로 높이 평가했다. 때문에 아암은 연담을 제외한 여러 강백의 어설픈 교학 강의에 부정과 비웃음을 연발했다고 한다.

 

아암과 다산의 교유는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온 직후부터다. 다산이 아암을 처음 만난 것은 1805년 봄 백련사에서였다. 당시 아암은 백련사의 주지로 다산을 이전부터 몹시 만나기를 갈망했다. 다산은 이때의 인연으로 그해 겨울에 거처를 주막에서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옮겼다. 이후 두 사람 사이의 교분은 두터워지고, 다산은 아암에게 『주역』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아암이 다산의 『주역』에 대한 해석에 감탄하여 더 가르쳐주기를 부탁한 것이나, 다산이 『시경』·『서경』·『주역』을 내세워 『화엄경』·『능엄경』·『원각경』을 풀이했을 때 아암이 천성을 되찾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두 사람은 사제의 의義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다산시문집』에는 다산이 혜장에게 보내거나 읊은 14수의 시가 전해지고, 탑명塔銘과 제문祭文까지도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다산이 교유한 승려와 주고받은 시 가운데 가장 많은 수에 해당되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다산은 아암의 성품을 “굳건하고 어질고 호탕한 사람”, “솔직하고 꾸밈새가 없었으며 남에게 아부하는 태도가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이러한 아암의 성품이 교만하게 보일까 염려하여 걱정하는 시도 지어 보냈다. 이밖에 다산은 아암에게 차를 빌기도 하고 서로 보은산방의 풍광에 대해 연구聯句를 읊기도 했으며, 술 마시며 시를 읊조리기도 했다. 그는 35세 때부터 시주詩酒를 즐기다가 1811년 가을, 병을 얻어 두륜산頭輪山 북암北庵에서 입적하였다.

 

『대둔사지』 편찬에 참여한 인물들

 

아암의 제자는 수룡색성袖龍賾性·기어자홍騎魚慈弘·철경응언掣鯨應彦·침교법훈枕蛟法訓 등이 있는데, 수룡색성과 기어자홍이 『대둔사지』 편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수룡색성은 해남 색금현塞琴縣 사람으로 현해모윤懸解慕閏에게 출가했지만, 내외전을 두루 섭렵하고 아암의 문하에서 수행했다. 정약용 또한 수룡과는 막역한 사이로 수룡을 아암의 많은 제자 가운데 가장 기걸奇傑하다고 했으며, 『화엄경』의 교리를 터득하고 두보杜甫의 시까지 배운다고 칭송했다. 더욱이 차도 잘 만들어서 평상시 아암의 심부름으로 차와 서신을 다산에게 전해준 듯하다.

 

기어자홍은 그 생몰년과 행적이 자세하지 않다. 다만 『다산시문집』에 기어에 대한 글이 단편적으로 실려 있을 뿐이다. 아암이 입적한 1811년 9월 다산이 지은 아암혜장의 제문祭文에 의하면 기어자홍에게 “곡하며 아암의 영전에 산과山果와 술 한 사발을 올리게 했다.”고 한다. 또한 수정사水精寺에 살았던 자홍이 능주綾州에 밥을 구하러 왔기에 “군자는 도를 걱정하지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여 그 수행 가운데 빈곤함을 걱정하지 말라고 경책했다.

 

 

사진 2. 아암혜장의 부도탑이 있는 대흥사 부도전. 사진 해남군. 

 

정약용이 아암 입적 후 그 제자들에게 보인 이러한 면모는 단순한 교유의 관계를 벗어나 사제지간의 면모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이들 사이의 관계는 아암이 입적한 이후에도 지속되어 정약용에게서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한 여러 학문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고래보다 더 큰 생물은 없으리

이빨은 설산雪山같고 지느러미는 금성金城같네. 

코를 들어 숨 내쉬니 바다가 들끓고

지느러미 펄떡이매 벼락소리 나누나

우주에 가득한 소리, 바다도 놀란 듯

산 같은 파도에 땅도 기우는 듯

수척한 대장부, 모습 청수한데

언덕 위에 홀로 서서 수심에 잠기네

머리칼 같은 눈썹을 얼레에 감아

바람결에 불으니 살갗이 나르네

고래 꼬리에 붙어도 얽어매진 않았으나 

고래는 아이처럼 묶여 끌려오네.

용을 사로잡고 호랑이 묶는 것이 비교될 것인가 

호파瓠巴와 장경長庚에 손색이 없네.”

(범해각안의 『동사열전』 중에서)

 

다산이 아암의 제자 철경을 장하게 여겨 지어준 게송이다. 철경은 아암의 의발과 가통家統을 전해 받은 이후 그에게 배우고자 한 학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대중들에게 “우리 스승께서는 고래 같은 미혹의 속성을 바로잡을 수 있는 비결이 있다. 내가 그 비법을 전수받았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끌어 올 수 있다.”고 하였다. 대중들은 이때부터 그를 고래를 이끌어 되돌아올 수 있다는 뜻을 가진 ‘철경掣鯨’으로 법호를 불렀다.

 

한편 호의시오는 출가 이후 연담유일의 문하에서 사집四集을 수학하고 완호에게서 『능엄경』을 배웠다. 이후 여러 스승으로부터 불교경전뿐만 아니라 유가儒家의 장구章句나 역사서와 고문을 배웠다. 1807년 겨울에는 역시 『대둔사지』 편찬에 참여했던 수룡색성과 함께 『화엄경』을 공부하기도 했다.

호의는 완호의 법을 계승한 후에는 경주 기림사에서 천불千佛을 조성하여 대둔사에 봉안하는 큰 불사를 수행했다. 그리고 1858년에는 초의와 함께 스승 완호의 비석을 건립하여 그 법풍法風을 널리 폈고, 유덕遺德을 기렸다. 스승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그 문중에서도 효도하는 제자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정약용 또한 호의와 그 교분이 두터워 호의의 법호法號에 대한 게송과 그 서문을 지어 주었다. 아마도 호의가 초의와 같은 완호의 문중이었고, 초의와 다산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다면 호의 역시 다산에게서 많은 학문을 수학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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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동국대 및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공부하고 「조선후기 사지寺誌편찬과 승전僧傳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 저서로 『조선후기 불교동향사』, 『사지와 승전을 통해 본 조선후기 불교사학사』, 『한국근대불교사론』, 『석전영호대종사』(공저), 『신흥사』(공저)등이 있다. 조선시대와 근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사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역임.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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