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선문정로』, 다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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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2 년 1 월 [통권 제105호] / / 작성일22-01-05 11:27 / 조회5,322회 / 댓글0건본문
12월이 되어 며칠 지나니 1천여 쪽에 달하는 『정독精讀 선문정로』 편집본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2022년 1월 중으로 발간을 앞두고 있는 이 책은,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강경구 교수님이 10여 년의 세월에 걸쳐 성철스님의 대표작인 『선문정로』의 인용문을 분석 연구하고, 요즈음 세대의 어법에 맞게 ‘현대어역’을 싣고 인용문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붙인 저작물입니다. 놀랍고 반갑고 고마운 저술을 앞에 두니 눈물과 가슴 뭉클함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나간 40여 년 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1981년 1월에 대한불교조계종 제6대 종정에 추대되시고, 그해 12월 1일에 『선문정로禪門正路』를 펴내셨습니다.
제 기억엔, 어느 날 스님께서 부르셔서 찾아뵈니 꽤나 묵직한 원고 두 뭉치를 넘겨주시며 “송광사 불일암 법정스님에게 가서 ‘성철이가 윤문을 부탁한다’고 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략 3년 동안 스님께서 무슨 일로 그렇게 분주하셨나 감이 잡혔습니다. 백련암 서고인 장경각藏經閣을 들락날락 하시며 책을 꺼내 보기도 하시고, 청소를 하려고 큰스님 방에 들어가 보면 책상 위에 크고 작은 노트들이 펼쳐져 있고, 작은 메모지나 편지지에 유려한 필체로 적힌 한문 문구들이 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연찮게 종정에 추대되고 나서 『선문정로』가 출간되고, 다음해인 1982년 7월에 상당법문집인 ‘본지풍광’이 『山이 물 위로 간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이 두 권의 책을 받아들고 “이제 나는 부처님께 밥값 했다. 이 두 책을 제대로 터득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바로 아는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시며 매우 흔연해 하셨습니다.
1987년 발행 『선문정로』.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선문정로』의 내용이 대한불교조계종 중천조이자 송광사 16국사 문중의 초조이신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의 ‘돈오점수론’을 비판하면서 “선종의 정통은 6조 혜능선사의 돈오돈수론이어야 한다.”라는 주장을 담고 있어서 한국불교를 발칵 뒤집어 놓은 형국이 되었습니다. 750여 년 동안 한국 선불교의 정통으로 추앙받아 온 보조지눌에 대한 비판은 엄청나게 불경스러운 일로 여겨졌습니다.
1981년 『선문정로』 초판본.
송광사 스님이나 보조지눌을 연구하는 이들의 반응은 “보조지눌 스님은 고려의 왕에게서 국사 직함을 직접 받은 고승이신데, 성철스님의 권위는 보조국사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주제에 그 사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종정이 되었다고 보조국사를 힐난하다.”라고 거칠게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보조국사 지눌을 연구하는 제1세대 불교학 연구자들은 논문이나 세미나 등을 통해 일제히 성철 종정 예하의 문장 인용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맹폭을 퍼부었습니다. 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주최로 송광사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와 1993년 10월에 해인사에서 열린 백련불교문화재단 주최 국제학술회의 이후 본격적으로 국내외에서 3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고, 그 후 10여 년 동안 돈점논쟁頓漸論爭은 불교학계의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1993년 발행 『선문정로평석』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도에 들어서 부산 옥천사의 백졸스님이 부모님들에게 권유하여 부산 중앙동에 있던 3층 건물을 백련불교문화재단에 기증토록 하고, 2005년 5월에 그 자리에 고심정사古心精舍를 창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6년 6월에는 고심정사에서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의 창립총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학회는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자립하여 2012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4회 학술지를 간행하는 학회로 탄탄하게 성장해 왔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2013년 『동아시아불교문화』 제15집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무심코 페이지를 넘겨 차례를 훑어보는데, 「『선문정로』 문장 인용의 특징에 관한 고찰」이라는 논문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너무나 놀랍고,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한껏 달아오른 흥분이 쉽게 가라앉질 않았습니다. 저자가 누군가 보니, 고심정사 불교대학 초창기인 2006년부터 일 년 학과반에서 틈틈이 강의를 해 주고 계시는 동의대학교 강경구 교수님이셨습니다. 2016년까지 4편의 논문을 게재한 이후로는 더 이상 논문이 보이지 않아서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2021년 4월 24일 성철사상연구원 주최로 열린 “퇴옹성철 스님의 불교관 연구 2” 학술연찬회에서 「성철선의 이해와 실천을 위한 시론」이란 주제로 기조 발제를 해 주셨습니다. 그때 강 교수님은 “원택스님, 이제 5월이 지나면 『선문정로』에 대한 연구가 끝나 곧 좋은 소식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그동안 오래 기다리셨지요.”라는 뜻밖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훈훈한 바람에 짙푸른 나뭇잎이 너풀대는 올 초여름 어느 날, 퇴고를 거듭한 흔적이 역력한 강 교수의 원고가 제 손에 묵직하게 들려 있었습니다. 등에 땀이 차는 것도 잊은 채 며칠에 걸려 원고를 읽고 나니, 시원한 청량감이 몸속에서 일어났습니다. 큰스님은 일제 강점기 초기에 태어나 한문 교육부터 받으셨기 때문에 글을 쓰시는 데 있어선 한글보다는 한문이 더 편하고 쉬우셨습니다. 그러므로 큰스님에겐 한문 문장이 별거 아니지만 한문은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한글 전용이 대세가 되고 보니, 『선문정로』의 내용도 어렵지만 표현 자체가 한문투여서 읽기조차 힘들다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2006년 발행 『옛 거울을 부수고 오너라』
그래서 요즘 세대가 읽고 이해 할 수 있도록 한자음을 달기도 하고, 용어에 대한 설명을 각주로 달고, 2015년에는 큰스님께서 직접 하신 녹음을 풀어 ‘강설’을 덧붙여 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어렵다’는 평이 대세였습니다. 그런데 강 교수님는 『선문정로』의 인용문을 그대로 가져오되, 그동안 학계에서 논쟁의 쟁점이 되었던 글자 바꿈, 생략, 문장 줄임 등을 인용 원전을 찾아 대괄호([ ])로 정리하고, 큰스님의 번역 밑에 ‘현대어’로 번역을 하고, ‘해설’에서는 각 장마다 설법의 맥락과 인용과 특징을 살피고 인용문을 자세히 분석해 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그 입장을 밝히셨습니다.
“『선문정로』는 성철스님의 수행 및 깨달음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집필된 책이다. 이 책의 인용문은 전부 성철스님의 발언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인용문에 개입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문의 생략과 추가에 자유롭고, 완전히 새로운 문장을 구성하는가 하면 문맥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학문적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학자들의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인용문에 개입하여 자기화하는 일은 한자문화권의 전통적 글쓰기나 선사들의 설법에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논의의 편의성과 권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용한 문장이라 해도 결국은 성철스님의 발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성분들이 성철스님의 용광로를 통과하면서 하나로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을 기억하면서 『선문정로』의 길을 따라가보기로 하자.”
2015년 발행 『성철스님 평석 선문정로』
그리고 『선문정로』는 성철스님만의 고유한 사상을 피력하기 위해 펴낸 책이 아니라 수행자 스스로 채워나가야 할 빈칸을 남겨 놓은 ‘수행지침서’이자 ‘길 안내서’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또한 ‘무겁고 어렵다’는 평에선 자유롭지 못할 듯합니다. 우선 1천 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다 보니, 『선문정로』의 어려움에 갈증을 느끼고 계신 분들 조차도 그 두께에 기가 질리고 마실 듯합니다. 그래서 거듭 제안을 드렸습니다.
“이번에 출간되는 『정독 선문정로』는 아무래도 학술적인 성격이 많아서 대중화되기에는 또 한 고개를 넘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인용문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해석은 여기에 남겨 두시고, 중고등학교 정도의 언어 수준이라면 누구나 쉽게 읽고 따라갈 수 있는 ‘성철스님 닮기 선수행지침서’를 만들어 주십시오. 『선문정로』를 연구하시느라 10년 내공을 쌓으셨으니, 이제 우리 모두의 수행지침서로 ‘쉽게 따라가는 선문정로’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강 교수님께서는 “스님께서 큰 숙제를 주시는군요. 학교 정년이 2년 6개월 정도 남았으니 그때까지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라는 답변을 해 주셨습니다.
끝날 듯 끝날 듯하면서도 끝나지 않는 코로나로 모두가 지쳐가고 있는 이때, 22년의 새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강경구 교수님의 역작인 『정독 선문정로』를 징검다리 삼아 성철스님께서 당당하게 부처님께 밥값 하셨다는 『선문정로』에 희망의 깃발을 꽂아 보시길 바랍니다. 선의 지평이 활짝 열릴 그 날에 여러분들과 함께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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