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중앙불전 교우회에서 펴낸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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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 2022 년 1 월 [통권 제105호] / / 작성일22-01-05 09:44 / 조회4,568회 / 댓글0건본문
근대불교잡지 산책 13 | 『일광一光』(통권 10호, 1928.12-1940.1)
발행 배경과 경과
근대 불교계에서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한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은 명진학교(1906년)이며 그 전통이 불교사범학교(1910년), 불교고등강숙(1914년), 중앙학림(1915~1922년)으로 계승되어 왔다. 중앙학림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 였고, 그 여파로 중앙학림은 1922년 4월 강제 휴교를 당하였다.
한편 1920년대 초 불교 교단은 교무원과 총무원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계 현안을 재단법인 설립으로 타개하고자 했던 불교계의 의지와 단일한 조직을 원했던 조선총독부의 견인에 따라 1922년 5월, 기존의 30본산연합사무소를 폐지하고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설립하기로 의결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설립 인가를 얻은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제1성은 “규율이 엄정한 참선도량과 시대에 적응한 불전전수학교佛典專修學校” 즉 불교전수학 교를 신설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개교한 중앙불전(사진 1)의 정식 명칭은 중앙불교전수학교이며 2년제로 시작하였다. 이후 학생들이 승격 운동을 전개한 결과, 1930년 4월 7일에는 3년제 전문학교로 승격·인가되었다. 그 결과 1930년에는 1, 2, 3학년이 다 갖추어졌고, 1931년 3월에는 제1회 졸업생이 배 출되었다.
『일광一光』은 중앙불전 개교 첫해인 1928년 12월 28일에 1학년 학생들을 주축으로 창간호가 발행되었고, 1940년 1월에는 제10호(종간호)가 발행되었다. 1940년 2월에는 재단 명칭이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조계학원으로 바뀌었고, 같은 해 6월 19일에는 중앙불전을 혜화전문학교로 개칭하고 불교과, 흥아과興亞科를 설치하여 개교하였다. 이때 중앙불전 학생의 소속은 그대로 계승되어 중앙불전 11회 졸업 예정생이 혜화전문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중앙불전의 첫 졸업생이 배출되기 전까지 교우회는 교수, 직원, 학생이 함께 참여하였다. 『일광』 1~3호는 명목상 교수의 지도하에 1학년, 2학년, 3학년의 재학생 임원이 차례로 담당하였다. 확인되는 인물은 3호 편집자인 강유문이다. 졸업생이 배출된 1931년도 새 학기부터 교우회 회원은 교원, 직원, 졸업생으로 구성되었고, 재학생은 학생회로 분리되었다. 제4호(1933.12)부터 10호까지는 재학생이 아니라 교직원과 졸업생 중심의 잡지로 성격이 변한 것이다. 그러나 매호 그해 졸업생들의 3년간 학창 시절에 대한 회고, 감성적인 시, 수학여행기, 기타 여러 가지 상념과 철학적 고민을 담은 수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일광』은 단순한 교우회지를 넘어 전체 구성원들의 교지校誌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일광』에는 당시 재직했던 교수들의 학술 성과와 교육 환경에 대한 개선 의지, 그리고 교수와 재학생들의 문예적 감성이 담겨 있다. 현재 동국대의 학문과 문학 전통의 저변을 확인할 수 있는 잡지로서의 의의가 크다.
잡지의 지향과 편제
창간호를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일광』(사진 2)의 지향은 비교적 분명하다. 첫째, 불교학, 불교문학, 불교사학의 진흥을 도모하는 학술논문 발표의 장이다. 둘째, 오랜 역사 속에서 왜곡된 현실적인 불교계의 여러 난맥을 타기하고 부흥을 이끌기 위해 탄생한 중앙불전의 존재의 이유와 발전에 대한 담론 개진의 장이다. 졸업생들의 진로 문제에 대한 고민도 포함된다. 셋째, 불교문학에 대한 관심과 작품 발표의 장이다.
『일광』의 모든 글이 일정한 표제어(편명)로 정형화되지는 않았지만, 『일광』의 편제는 목차-권두언-학술논문-논설 및 수필-문학공간-휘보-편집후기 순으로 구성되었다.
학술논문은 김영수, 강전준웅, 박한영, 권상로, 김경주, 조명기 등 중앙불전 교수진의 연구 성과가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불교학 분야의 비중 있는 학술논문이 주목된다. 이어 교내 문제에 대한 여러 구성원들의 시론時論, 현실 불교에 대한 다양한 논의, 논리적 사유를 담아낸 짤막한 글 등이 수록되어 있다. 교수진의 글은 학술적인 내용과 시사적인 내용이 섞여 있는 경우도 많다.
수필에는 교우회의 춘계·추계 정기 원유회, 중앙불전 졸업반의 국내외 수학여행기 등이 포함되어 있고, 졸업반 학생들이 종교와 인생을 소재로 하여 쓴 단상들이 수록되어 있다.
문학공간은 주로 시와 시조, 소설 작품이 수록되었다. 1~3호는 재학생의 작품이 주로 수록되었다. 4호부터 교우회의 성격이 변하면서 수록 내용에도 변화가 발생하였는데, 4호에는 문학란이 없으며, 5호에는 소설 1편만 수록되었다. 6호에는 교수(최남선, 정준모)의 시와 시조가 수록되었고, 7, 8호에는 문명文名을 얻은 김달진(9회 졸업생)과 김어수(9회 졸업생)의 시와 시조를 중심으로 게재하였다. 일제가 전시체제로 진입한 시기에 발행한 9, 10호에는 문학공간이 사라졌다.
휘보에는 「중앙불전교우회의 회칙」, 「실행 세칙」, 「예산 및 회계 내역」, 「회원명부」가 수록되어 있다. 교우회(실은 학교 전체)의 행사 및 활동일지로 「북한봉대」라는 편제가 창간호부터 종간호까지 지속되었다. 회원명부에는 현 직원, 구 직원, 특별회원, 졸업생 명부가 매년 재작성되었다.
편집후기는 1~3호는 재학생이 담당하였고, 그 이후는 현 직원이 담당하였다. 현재 확인되는 담당자는 3호는 졸업반인 강유문, 4호는 밝터, 5~8호는 중앙불전 졸업생이자 도서과 직원인 한영석이다.
학술지 성격-중앙불전의 학문 전통 수립
중앙불전 개교 당시 교수로는 김영수(사진 3)와 강전준웅이, 강사로는 박한영(사진 4), 이희상, 김법린, 백성욱, 윤태동, 백우용 등이 재직하였다. 서무는 조학유가 담당하였다.
제2대 교장을 역임한 포광 김영수는 『화엄경』, 『기신론』, 『금강경』, 인명학, 구사학을 강의하였다. 강전준웅은 인도철학사, 일본불교사, 불교개론, 불교서지학 등을 강의하였다. 3대 교장을 역임한 석전 박한영은 『염송』과 유식학을 강의하였다. 제4대 교장을 역임한 김경주는 불조삼경과 인도지나불교사를 강의하였다.
이후 부임한 김잉석, 권상로도 중앙불전 불교학 연구의 정초를 놓는 데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잉석은 화엄학, 각 종개요各宗槪要 등을 강의하였고, 권상로는 조선불교사, 조선종교사와 함께 조선문학강독, 한문강독을 강의하여 불교학과 국문학 연구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외에 조학유는 종교사회학 관련 강의를 담당하였다.
이상 나열한 중앙불전의 교수진 외에 최남선의 조선문학사 강의와 조선 문학강독, 이능화의 조선종교사, 이병도의 조선유학사, 박승빈의 조선어학도 주목되는 강의다. 교과과목을 보면 당시 유수한 학자들이 출강하여 중앙불전의 학문적 토대를 충실히 마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김영수의 「조선불교와 소의경전」(1호)은 중앙불전 불교학과 교수로서 장래 교과목을 제정할 때 어떤 과목을 선정해야 하는가 하는 실제적인 필요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조선불교의 전등과 교리」(2호)는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중의 하나인 종조宗祖 논쟁을 다루었다. 서론에서 조선 불교는 종명宗名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선종이다 교종이다 일정한 주장이 없고, 법맥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있어서 포교 전도상 일정한 주장을 선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문제로 제기하고, 본론에서 법맥 상속과 교리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 대해 고찰하였다.
강전준웅의 「조선어 역 불전佛典에 대하여」(4호, 일어)는 불경언해의 존재 양상에 대해 상세하게 고찰한 논문이다. 「조선에 유행한 법화경에 대하여-계환의 법화경요해」(6호, 일어)는 가장 많은 판종을 가진 『법화경』의 유통 배경에 대해 고찰한 논문이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 지곡과 월인석보」(7호, 일어)는 제목과 같이 세 문헌의 간행 경과, 외형적 형태와 내용적 특징을 고찰하였고, 문화사적 의의로 마무리하였다.
박한영은 6, 7호에 불교와 문학 관련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가 쓴 두 편의 글은 체계적인 근대의 논문 형식은 아니고 박람강기의 지식과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쓴 논설인데, 중앙불전의 학술과 문학적 전통에 하나의 좌표를 제시하고 있는 글이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와 문학」(6호)은 불교와 문학의 관계를 논한 글이다. ‘대저 문학을 떠나서 불교를 구한다 하면 마치 화목花木을 떠나서 춘광春光을 찾는 것과 같다’라는 표현, ‘불교 교리는 문학 외에서 찾을 수 없다’라는 표현이 요지를 담고 있다. 특히 ‘우리寓理’, ‘달리達理’, ‘불리佛理’를 강조하였고, 견성성불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고 문학의 바다에서 일등 작가가 되려면 『능엄경』, 『정명경淨名經』, 『화엄경』, 『선문염송』을 문학의 재료로 일독하고 문학(창작) 방면으로 시험하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조선 문학 가운데 『구운몽』, 『옥루몽』, 『심청가』, 『별주부전』 등이 모두 ‘불리佛理’에서 꾸며진 것으로 평가하면서 신문학 발전을 위해 우리의 고유한 진리를 먼저 통달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결론으로 삼았다.
문예지 성격-중앙불전의 문학 전통 수립
목차상 문학 지면이 표제로 등장하는 것은 2호의 ‘시가’란, 3호의 ‘시가’란(사진 5), ‘소설’란, 5호의 ‘소설’란이며, 6~8호는 별다른 표제 없이 시 작품을 수록하였다.
1~3호가 재학생의 투고를 권장하면서 창작의 의지를 적극 수용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4호 이후는 교우회의 성격이 졸업생 위주로 바뀌면서 수록 작품에 양적, 질적 변화가 일어났다.
교강사진 가운데 3호의 편집부장인 최남선은 <교가>(사진 6)를 작사하여 3호, 4호에 게재하였고, 6호와 7호에는 시조 <문수산성文殊山城>과 <삼랑성三郞城>을 실었다. <문수산성>은 제물포가 마주 바라보이는 강화도의 문수산을 답사하며 그곳의 전설을 소재로 삼아 산성의 풍경을 읊은 3수의 시조이다.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하는 강화도 정족산성을 소재로 한 3수의 시조이다. 두 작품 모두 전설과 역사, 과거와 현재, 고아한 표현과 운치 있는 묘사가 어우러지는 수작이다.
중앙불전에서 영어강의를 담당한 정준모의 작, 「고시재음古試再吟」은 <녹향단심綠鄕丹心>, <몌별袂別>, <춘포단장春圃斷腸>을 묶은 연작시다. <춘포단장>은 봄날 밭에서 나물을 캐는 아낙네의 모습을 소재로 한 시인데, 얼굴이 ‘검노란’ ‘조선 아낙네’의 얼굴과 집에서 울부짖는 어린아이들을 등장시켜 제목처럼 가난에서 우러나는 애끓는 아픔을 노래하였다.
학생 작품으로는 김달진, 이봉호, 김어수의 작품이 주목된다. 김달진은 1929년에 시 <잡영수곡雜泳數曲>을 『문예공론』에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고, 중앙불전을 졸업한 해에 첫 시집 『청시』(1940)을 간행한 시인이다. 7호의 <오열>은 지향 없는 청춘의 내면을 묘사한 시로 약간의 감상적 어조가 있다. “오뇌는 판테온의 황黃 촛불 녹아나리는 그늘아레 턱 고인 반나체半裸 體의 여상女像의 숨은 가슴에 살찌고”라는 감각적인 심상이 돋보인다. 이는 8호 <침실>의 “하마 울안 벚꽃 봉아리 봉아리는 붉은 입술 입술 마다 수은水銀을 물었겠다”는 표현과 상통한다.
이봉호의 <현실>은 현실과 괴리된 젊은 청춘들의 낭만적 불안감을 담은 시로 30년대 시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어수의 시조 <조사弔詞>는 5연의 연시조로 “시골 잇든 영식이 떠난 그 날에”라는 부제가 붙었는데, 네 살 어린 아기의 죽음 앞에 무너지는 가족의 비애감이 상황의 비극성과 함께 독자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김어수 역시 1938년 6월 『조선일보』에 <조시弔詩>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이상 중앙불전의 교수진은 불교학, 불교어문학, 불교사 영역에서 국학연구의 학풍을 만드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재학생들은 문학적 감수성을 배출하며 시인으로 성장하는 자유로운 문학 창작의 장으로 『일광』을 활용한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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