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수]
세 가지 명지[三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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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 2022 년 1 월 [통권 제105호] / / 작성일22-01-05 09:33 / 조회5,189회 / 댓글0건본문
법수法數 13| 삼명三明
세 가지 명지[三明, tevijjā]란 붓다나 아라한이 갖춘 세 가지 뛰어난 지혜를 말한다. 즉 ①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智], ②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智], ③모든 번뇌를 멸진하는 지혜[漏盡智]를 삼명이라고 한다. 여기에 ④신통변화의 지혜[神足通], 신성한 귀의 지혜[天耳通],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通]를 포함시켜 육신통(六神通, chaļabhiññā)이라고 한다.
바라문교(지금의 힌두교)에서도 ‘떼윗자(tevijjā, 三明)’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그들은 삼베다(tayovedā), 즉 리그베다(Ŗg-veda), 야주르베다(Yajur-veda), 사마베다(Sāma-veda)에 정통한 것을 삼명이라고 한다. 붓다시대의 바라문들은 “삼명을 구족하고 태생을 갖추고 많이 배웠다.”(SN.Ⅰ.166)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바라문들이 삼베다에 통달하고, ‘태생을 갖춤(jātimā)’이란 7대에 걸쳐 바라문 가문의 혈통을 유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태생이 청정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비록 많은 만뜨라를 외우더라도, 안이 썩어문드러졌고, 부정한 방법으로 삶을 연명한다면,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지 못한다.”(SN.Ⅰ.166)라고 비판했다. 그 대신 붓다는 “전생의 삶을 기억하고 천상과 지옥을 보며, 태어남은 다 했고 해야 할 일을 다 한 자가 성자이다.”(SN.Ⅰ.167)라고 했다. 이와 같이 바라문들은 삼베다에 통달한 것을 삼명이라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세 가지 밝은 지혜[明智], 즉 숙명지宿命智, 천안지天眼智, 누진지漏盡智를 갖춘 것을 삼명이라고 한다.
그러면 삼명이란 무엇인가? 「떼욋짜왓차곳따 숫따(Tevijjavacchagotta-sutta)」(MN71)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왓차여, 나는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할 수 있다. 즉 한 생, 두 생, …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MN.Ⅰ.482; 대림 옮김, 『맛지마 니까야』 제3권, p.78) 이 부분은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智]를 설명한 것이다.
“왓차여, 나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天眼]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본다. … 나는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가는 것을 꿰뚫어 안다.”(MN.Ⅰ.482; 대림 옮김, 위의 책, p.78) 이 부분은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智]를 설명한 것이다.
“왓차여, 나는 모든 번뇌를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문다.”(MN.Ⅰ.482; 대림 옮김, 위의 책, p.78) 이 부분은 모든 번뇌를 멸진하는 지혜[漏盡智]를 설명한 것이다.
「자나빈냐 숫따(Jhānābhiññā-sutta, 定과 勝智經)」(SN16:9)에 의하면, 붓다와 뛰어난 제자들은 원하기만 하면, 초선初禪, 제이선第二禪, 제삼선第三禪, 제사선第四禪,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다시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문다.(SN.Ⅱ.210-212) 이러한 구차제정九次第定을 통해 삼명과 육신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경에서는 마하깟사빠(Mahākassapa, 大迦葉) 존자가 삼명을 갖추었다고 설한다. 다른 경(SN8:12)에서는 왕기사(Vaṅgīsa) 존자가 “세 가지 명지[三明]를 나는 증득하였고(tisso vijjā anuppatta)”(SN.Ⅱ.196)라고 밝히고 있다. 「빠와라나 숫따(Pavāraṇa-sutta, 自恣經)」(SN8:7)에 “비구들이여, 이들 오백 명의 비구들 가운데 60명의 비구들은 삼명(tevijjā)을 갖추었고, 60명의 비구들은 육신통(chaļabhiññā)을 갖추었고, 60명의 비구들은 양면으로 해탈(ubhato bhāgavimutta, 兩面解脫)하였고, 나머지는 지혜를 통한 해탈(paññāvimutta, 慧解脫)을 하였다.”(SN.Ⅱ.191)라고 묘사되어 있다. ‘양면으로 해탈한 자’는 무색계 삼매(공무변처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와 더불어 아라한과를 증득한 자를 뜻하고, ‘지혜로 해탈한 자’는 무색계 삼매 없이 아라한과를 증득한 자를 말한다.
이와 같이 붓다시대에는 삼명이나 육신통을 얻은 비구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명이나 육신통을 얻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동아시아불교에서는 ‘여섯 가지 초감각적 지각’ 혹은 ‘여섯 형태의 보다 높은 지식(chaļabhiññā)’을 ‘육신통六神通’으로 번역 함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아주 굉장한 초능력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인정되었던 초감각적 지각이나 힘은 누구나 선정의 수행을 통해 체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붓다는 출가한 후 알라라 깔라마(Āļara Kālā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āmaputta)라는 두 스승으로부터 요가적 명상의 훈련을 받았다. 그는 요가적 명상의 훈련을 통해 초감각적 능력(extrasensory power)을 계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식의 원천으로서의 감각 지각(sense perception)의 한계도 알게 되었다. 더욱이 붓다는 초감각적 요가적 명상과 감각적 능력도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능력들이 실재의 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구성한 금욕주의자들에 의해 잘못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David J. Kalupahana, Buddhsit Philosophy, p.16)
초기경전에 나타난 삼명이나 육신통은 인식론認識論(epistemology)에 속한다.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는 여섯 가지 초감각적 지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1) 신변身變(iddhividha, 神足)은 지식이 아니고 힘이다. 이것은 선정禪定(jhāna) 안에 있는 다양한 ‘의지의 힘’의 나타남이다. 일반적으로 신족통神足通은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선정의 힘에 의해 나타난다. 그래서 원어에 지혜(ñāṇa)라는 단어가 빠졌다.
(2) 투청력透廳力(dibbasata, 天耳)은 일상적인 청력聽力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아주 먼 곳의 소리까지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청력의 지각 범위가 넓이와 깊이에서 확장되므로, 이것을 획득한 사람은 추론될 수밖에 없었던 상호 연관된 어떤 현상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게 된다. 투청력도 신변과 마찬가지로 선정의 힘에 의해 획득된 능력이다. 따라서 원어에 지혜(ñāṇa)라는 단어가 빠졌다.
(3) 정신감응(cetopariyañāṇa, 他心智)은 타인의 마음의 움직임과 일반적 상태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정신 집중으로 얻게 되는 지혜 가운데 하나다.
(4) 과거의 인식(pubbenivāsānussatiñāṇa, 宿命智)은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지각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기억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과거의 존재[前生]에 대한 기억은 다른 능력의 계발에서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정신 집중에 의해서 획득된다.
(5) 투시력(dibbacakkhu 또는 cut’ūpapātañāṇa, 天眼智)은 자신들의 행위(kamma, 業)에 따라서 윤회의 세계를 헤매는 다른 존재들의 생존과 죽음에 대한 지식이다. 이것은 과거의 인식과 더불어 재생再生의 현상을 확증할 수 있게 해준다.
(6) 번뇌를 없애는 지식(āsavakkhayañāṇa, 漏盡智)은 위에 언급한 마지막 네 가지와 더불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David J. Kalupahana, Buddhsit Philosophy, pp.21-22)
위에서 살펴본 초감각적 지각과 일상적인 감각 지각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다. 깊은 선정의 힘, 즉 정신 집중에 의해 초감각적 지각을 얻게 된다. 인간은 눈·귀·코·혀·몸·뜻[마음]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통해 그 대상을 인식한다. 이때 눈은 인간의 눈과 신적인 눈으로 구분된다. 인간의 눈은 대상인 형태를 파악하지만, 신적인 눈은 존재의 생멸을 파악하게 된다. 이것을 천안지天眼智라고 부른다. 귀도 눈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귀와 신적인 귀로 구분된다. 인간의 귀는 대상인 소리를 인식한다. 그러나 신적인 귀는 인간의 귀로 듣지 못하는 소리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을 천이지天耳智라고 한다. 코·혀·몸은 대상인 냄새, 맛, 감촉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마음은 크게 집중되지 않은 마음과 집중된 마음으로 구분된다. 집중되지 않은 마음은 대상인 개념을 파악한다. 반면 집중된 마음은 다시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집중된 마음에서 과거의 인식인 자신의 전생을 알게 된다. 이것을 숙명지宿命智라고 한다. 둘째는 집중된 마음에서 정신 감응은 타인의 사고 과정을 알게 된다. 이것을 타심지他心智라고 한다. 셋째는 집중된 마음에서 번뇌를 없애는 지혜를 통해 모든 번뇌의 인과 과정을 파악하게 된다. 이것을 누진지漏盡智라고 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모든 번뇌를 멸진시키는 지혜, 즉 누진지이다.
초기불교에서는 감각적 지각의 타당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은 우리의 세계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근본적 원천이다. 그러나 동시에 붓다는 감각 지각이 사람을 잘못 인도하기 쉽다는 것을 경계했다. 이것은 감각 지각 그 자체의 어떤 결점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 사람이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것 등을 해석하는 데에 조건 지어져 있던 방식에서 유래한다. 즉 좋아함이나 싫어함과 같은 주관적 태도는 감각 지각을 방해해서 감각적 느낌을 왜곡시킨다.
초감각적 지각의 계발은 주관적 편견을 제거하고자 한다. 하지만 과거[前生]의 인식과 같은 초감각적 지각을 이미 계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아’와 같은 형이상학적 실재나 전능한 신에 의한 우주의 창조와 같은 것을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형태의 초감각적 지각은 형이상학적 믿음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실제로 붓다는 이 지식의 내용을 어떤 궁극적 실재와도 동일시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지식을 구원의 구성 요소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붓다는 초감각적 지각을 통해 얻어진 지식이 어떠한 지식이라도 그 자체 목적으로 보지 않았고, 목적에 이르는 수단으로 취급했다. 다시 말해서 초기불교에서는 세 가지 명지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불교의 궁극 목적은 열반이다. 이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선정 수행의 과정에서 얻게 되는 부수적인 것이 삼명이나 육신통이다. 이것을 얻기 위해 수행한다면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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